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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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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8월호>

마가복음 1:4,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Q
영어 <킹제임스성경> 마가복음 1:4의 『preach the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를 <한글킹제임스성경>은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라고 번역했는데,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매”라고 번역해야 맞지 않습니까?


A
<한글킹제임스성경>의 번역대로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가 맞습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for the remission of sins”에서 “for”가 “이유”(~때문에, ~로 인하여)를 뜻하는 용법인가, 아니면 “목적”(~위한)을 뜻하는 용법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for”는 지난 호에서 살펴 본 “of”만큼 용례가 다양하기 때문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단어입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을 거짓되이 비방하는 정동수(인하대 교수)는 이 구절에서 “for”를 “목적”의 용례로 오역한 것을 포함하여 관련 구절들에서 많은 오류들을 범했으면서도, 오히려 <한글킹제임스성경>의 번역을 오역이라고 잘못된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4과 똑같은 표현이 누가복음 3:3에 한 번 더 나오는데, 이 구절들의 핵심 표현은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for the remission of sins)이며, 이 표현은 <킹제임스성경>에 모두 다섯 번 나옵니다(마 26:28, 막 1:4, 눅 3:3, 행 2:38, 롬 3:25). 따라서 마가복음 1:4의 바른 번역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 구절들을 함께 설명해야 합니다. 이제 정교수의 오류들을 바로잡으면서 바른 번역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헬라어의 용례
먼저 이 문제의 구절에 대한 헬라어 <표준원문>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는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이 어떤 의미인가를 알려 주는 일차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 헬라어 성경의 용례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영어 <킹제임스성경>에 다섯 번 나오는 『for the remission of sins』라는 이 표현을 우리말로 다섯 번 모두 동일하게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이 문제의 구절들의 정확한 뜻을 파악해야 합니다.

1) 이 표현의 헬라어는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인데, “에이스”가 영어 “for”에 해당하는 전치사입니다. 헬라어 성경의 이 표현은 다섯 구절 중 네 구절에서(마 26:28, 막 1:4, 눅 3:3, 행 2:38) 일점일획의 차이 없이 모두 똑같이 기록되어 있고, 로마서 3:25에서만 다른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δια τὴν παρεσιν τών...), 여기서 “for”에 해당하는 헬라어 전치사는 “디아”(δια)입니다. 그런데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은 네 구절만이 아니라 로마서 3:25을 포함하여 다섯 구절 모두에서 똑같이 『for the remission of sins』라고 번역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주목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이 “에이스”와 “디아”를 같은 뜻으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며, 또 이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목할 것은 <킹제임스성경>은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로마서 3:25의 “파레신”(παρεσιν)이라는 단어를 네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쓰인 “아페신”(ἄφεσιν)과 똑같이 “remission”(죄사함)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역시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이 두 개의 다른 헬라어 구문을 같은 뜻으로 번역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변개된 NIV, NLT, 개역성경,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 쉬운성경, 그리고 정교수의 번역본 등은 이 다섯 구절들을 서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데, 특히 사도행전 2:38과 로마서 3:25을 다른 세 구절들과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정교수는 물론 이들 변개된 성경들의 번역자들이 헬라어 성경과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4,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2) 일반적으로 헬라어 문법에서, “에이스”를 “~안으로”의 뜻이라고, “디아”를 “~을 통하여” 또는 “~로 인하여”의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인 구분은 초급 단계에서 소개되는 용례이고, “에이스”와 “디아”는 이 구분 외에도 매우 많은 용례들이 있습니다. 1) “에이스”는 “~안으로”를 포함하여 “결과나 목적”을 나타내는 뜻 외에도 “이유”를 나타내는 뜻과 용례가 분명하게 있지만(롬 3:25; 4:20, 마 12:41...), “디아”의 경우 “기간”(~동안), “도구”(~을 통하여), “이유”(~로 인하여) 등의 용례 외에는 “목적”(~을 위하여)의 뜻과 용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이 네 구절에서 쓰여진 “에이스”와 로마서 3:25의 “디아”를 똑같은 표현으로 번역했다는 것은 두 단어의 공통되는 용례가 있다는 뜻이며, 그것이 바로 “이유”(~로 인하여)를 나타내는 용례입니다. 로마서 3:25의 “디아”가 이유를 나타내는 용례라는 사실은 <킹제임스성경>뿐만 아니라 변개된 성경을 만들어내는 번역자들이나 학자들도 모두 동의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킹제임스성경>의 번역과 같이 우리말로 이 구절을 번역할 때는 “~로 인하여”라고 일관되게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교수가 “for”로 번역된 헬라어 “에이스”를 마태복음 10:10의 예를 들어 “목적”을 나타내는 “~을 위하여”라고 주장하는 것은 헬라어 “에이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범한 오류입니다. 정교수는 물론 대부분의 헬라어 학자들이 “에이스”의 용례에 대해서 분명한 구분을 못하고 있습니다. 키텔(G. Kittel)의 <신약신학사전, TDNT>에는 “에이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결과를 나타내고 목적을 나타내는 에이스. 이 전치사는 특정한 목적을 향한 행동의 방향을 나타낸다. 이것은 우연적이든지 혹은 의도적이든지 반드시 문맥에서 추정되어야만 하며 항상 분명하지는 않다.』 Kittel, Ibid., p.429.
이렇게 설명한 후에 실제로 목적과 이유의 용례를 바르게 구분하지 못한 채 잘못된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위 최고의 헬라어 학자라고 일컬어지는 로버트슨(A.T. Robertson) 역시 그의 헬라어 문법책에서 누가복음 3:3을 제외하고 이 문제의 네 구절의 용례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한 채 “에이스”(for)의 용례를 해석자의 결정에 맡기고 있습니다. Robertson, Ibid., p.595.
또한 영(Young)과 스트롱(Strong)의 성구사전도 “for”에 대한 헬라어 용례를 바르게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학자들이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누가 정확하게 구분하겠습니까? 바로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입니다. 그들의 원어에 대한 분별력은 현대의 어떤 석학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정확하고 권위가 있는데, 이는 지난 400년간 영어 <킹제임스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입증된 사례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정교수는 “영어” KJV를 자신의 최종권위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킹제임스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번역자들이 헬라어의 용례를 정확하게 번역한 다섯 구절을 현대의 변개된 성경들과 똑같이 변개시킨 것입니다.

2. 성경적 교리
이 문제의 표현을 이제 <킹제임스성경>의 본문대로 우리말로 바르게 번역하면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 마태복음 26:28 - 『이는 이것이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For this is my blood of the new testament, which is shed for many for the remission of sins). 이 구절은 주님께서 주의 만찬을 통해 “자신이 직접 흘리실 피의 의미”를 설명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새 언약[the new testament]의 피』라고 말씀하셨는데, NIV와 개역성경을 비롯한 변개된 성경들은 여기서 “새”(new)라는 단어를 삭제했습니다. 이 단어는 이 문제의 구절들을 바르게 깨닫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새 언약”이란 “옛 언약,” 즉 구약(舊約)과 구분되는 신약(新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도 죄를 용서하셨고, 신약에서도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새 언약”의 피를 흘리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죄의 용서가 이루어졌지만, 드려지는 제물과 용서의 내용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죄의 용서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알려 주는 말씀을 히브리서 10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① “구약의” 죄의 용서
구약의 율법에 따라 계속해서 바치는 희생제물들로는 사람들을 “결코 온전케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히 10:1) - 『율법에는 다가올 선한 것들의 그림자는 있으나, 그것들의 형상 자체는 없으므로 그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희생제물들로는 그곳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또한 성경은 그 희생제물들, 곧 구약의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히 10:4,11) - 『이는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똑같은 제사를 자주 드리지만 이것으로써는 결코 죄들을 제거할 수 없으나』 이런 희생제물들은 모두 구약의 율법에 따라 드려졌던 것이었습니다(히 10:8). 이와 같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죄들을 용서하셨지만(죄를 덮어두고 책임을 묻지 않으신 것입니다.) 죄인들이 결코 온전케 되거나 죄들이 제거되지는 않았고 깨끗하게 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출 34:7) -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아니하리니 그 조상들의 죄악을 그 자손들과 그 자손들의 자손들 삼사 대까지 미치게 하느니라.” 하시니라』(참조 - 민수기 14:18). 출 34:7은, 정교수가 “수천 대”라는 말씀을 “수천의 사람들”이라고 이미 오역했던 구절(출 20:6)과 같습니다. 본지 157호 Q&A를 참고하십시오.
이런 사실은 성경을 해석한 것도 아니며, 신학자들의 이성에 따른 신학도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죄의 용서”이며, 성경적으로 “속죄”(atonement)라고 표현합니다. “속죄”라는 단어가 출애굽기 29:33,36에 처음 나오는데, 그 문맥 역시 숫양과 수송아지를 드려 제사지냄으로써 죄를 용서받는 것을 말씀합니다.

② “신약의” 죄의 용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구약의 희생제물을 바라지 않으시고,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속죄제를 드리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한 번에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었으며, 드려지는 희생제물은 구약과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오셨는데, 그것은 “구약의 죄의 용서”가 아니라 “신약의 죄의 용서”를 이루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 10:9) - 『그때에 말씀하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소서, 주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왔나이다.” 하셨으니 첫 번째 것을 폐하심은 두 번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따라서 동물의 희생제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한 번” 드리심으로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히 10:10) - 『그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이라.』 주님께서는 이렇게 거룩하게 된 자들이 다시는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도록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히 10:14) - 『이는 그가 한 번의 제사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라.』 이와 같은 신약의 용서가 구약과 다른 것은 드려지는 제물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죄의 용서를 이루시는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합니다(요 1:29) - 『그 다음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구약의 용서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신약의 용서는 죄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 용서를 위해 주님께서 오신 것이며, 성경적으로 이런 죄의 용서를 “구속”(redemption)이라고 합니다(히 9:15, 엡 1:7, 골 1:14).

③ “죄사함”(remission)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을 용서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 “용서”(forgiveness)이며, 같은 뜻으로 “죄사함”(remission)이라는 표현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구약의 용서는 “속죄”로, 신약의 용서는 “구속”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용서”나 “죄사함”이라는 말이 어떤 곳에서 구약적인 용서를 뜻하는 용례로 사용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신약적인 용서를 뜻하는 용례로 사용되는가를 분별해야만 교리적으로 오류를 범하기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로 주의해야 할 사실은 문제의 다섯 구절들에 사용된 표현이 구약의 죄의 용서를 뜻하는 “죄사함”(remission)이라는 것입니다. 이 “죄사함”이라는 단어가 구약적인 의미로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는 히브리서 9:22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remission)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구약의” 율법에 따른 죄의 용서를 말하는데, 이는 동물의 피로써는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이 용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다섯 구절에 사용된 “remission”(죄사함)이란 구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죄의 용서를 뜻하고 있음을 유념하고 “for”의 용례를 이해해야 합니다.

④ “새 언약”(new testament), 즉 “신약”의 시작
그렇다면 언제까지 구약적이고, 언제부터 신약적인 죄의 용서가 이루어진 것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며(히 9:15) 첫 언약(구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유언(testament)이 있는 곳에는 유언한 자의 죽음도 필연코 따라와야 하리니 유언(testament)은 사람이 죽은 후에야 효력이 있으며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혀 효력이 없느니라.』(히 9:16,17)고 말씀합니다. [영어 “testament”는 “유언”과 “언약”이라는 뜻이 다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 26:28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피를 흘리심으로써 “새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유언”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주님의 죽으심이 곧 신약의 시작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26:28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신구약의 차이와 함께 신약의 시작을 유념하여 읽기 바랍니다. 『이는 이것이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 이 구절에서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 잔을 들고 “이 잔은,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 지금까지 죄들을 용서해 왔지만 온전케 하거나 제거하거나 깨끗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많은 사람을 위해 죄들을 제거하고 영원히 온전케 하려고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마가복음 1:4 - 『요한이 광야에서 침례를 주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회개의 침례(the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를 전파하니,』
이 구절을 정교수처럼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매』라고 번역하면, 침례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한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거짓 교리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정교수는 이 구절에서 “for the remission of sins”가 수식하는 것이 “repentance”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구원 교리로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 구문은 “the baptism of repentance”와 “for the remission of sins”로 구분되며, “for the remission of sins”가 수식하는 것은 “the baptism of repentance”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repentance”가 수식하는 “baptism”입니다. 따라서 정교수는 “for”를 이유가 아니라 목적으로 오역한 것부터 시작해서, 영어 구문이 무엇을 수식하는가의 문제에서도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부터 구약에서 수세기 동안 죄들을 이미 용서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 400년 만에 나타난 선지자였던 침례인 요한으로부터 “회개하라.”는 선포를 들었고 회개를 외적으로 나타내는 표시로 침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요한의 침례,” 혹은 “회개의 침례”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침례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죄의 용서가 전제된 상황에서만 행해졌습니다. 심지어 모형적으로 설명하더라도, 이집트에서 유월절 양의 피로 인해 죽음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홍해를 건넌 것을 “모세의 침례”라고 하는데(고전 10:1,2), 이것 역시 유월절 양의 피로 속죄가 있은 후에(죄를 덮어주고 지나간 것으로 인하여) 행해졌던 것입니다. 정교수의 번역처럼 침례를 받으면 죄가 용서된다는 거짓 교리는 신약이든 구약이든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3:3은 마가복음 1:4과 같은 내용입니다.)

(3) 사도행전 2:38 -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Then Peter said unto them, Repent, and be baptized every one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or the remission of sins, and ye sha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Ghost).
베드로는 주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했으며(행 2:36), 여기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이 어찌해야 할까 물었을 때(행 2:37),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회개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헬라어 성경을 오해하여 “에이스”(for)를 목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침례를 받으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죄들을 사함받기 위해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구절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정교수는 마가복음 1:4의 “for”가 목적의 용례라고 주장했으면서도, 사도행전 2:38을 목적의 용례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신학으로 성경을 왜곡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정작 이 구절에서 자신의 신학으로 성경을 변개시켰습니다. 정교수의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회개하여 죄들의 사면을 얻고 너희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라.』 영어를 조금만 아는 사람도 앞에 제시된 영어 <킹제임스성경>과 비교하면, 이 구절을 결코 이렇게 번역할 수 없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을 거짓되이 비방하는 정교수는 자신의 교리에 맞추려고 전혀 맞지 않은 어순대로 이 구절을 변개했습니다. 개역성경을 비롯한 변개된 한글 번역본들조차도 정교수처럼 이 구절을 왜곡하지는 않았습니다.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거짓 교리를 바로잡는 데 있어서 다섯 구절들 가운데 사도행전 2:38이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데도 정교수는, 마가복음 1:4이 “침례에 의한 중생”의 교리와 상관없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사도행전 2:38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식견 있는 사람은 마가복음 1:4을 가지고 “침례에 의한 중생”의 교리를 논하면서 “똑같은 표현이 나오는 핵심 구절”인 사도행전 2:38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왜 정교수는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이미 사도행전 2:38을 자신의 편견에 따라 영어 문법이나 어법에도 맞지 않게 왜곡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1:4과 같은 맥락에서 사도행전 2:38을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거짓 교리를 바로잡는 사례로 제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교수가, 마가복음 1:4의 “for the remission of sins”가 수식하는 것이 “baptism”이 아니라 “repentance”라고 말하면서 이 구절이 침례에 의한 중생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했으면서도, 사도행전 2:38을 변개했다는 것은, 그가 마가복음 1:4을 실제로는 사도행전 2:38처럼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거짓 교리에 대한 근거 구절로 인식했음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위선적인 행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4) 로마서 3:25 -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성경은 그 주님을 화목제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주님 자신을 드리신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아오시면서 “단지” 죄들을 “사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영원한 구속”을 통한 “그분의 의”를 선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 구약과 신약의 용서가 잘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교수처럼 “for”를 목적의 용례로 오역하면 이 진리는 바르게 제시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에 따르면, 정교수가 마가복음 1:4을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라고 오역한 것은 물론, 문제의 다섯 구절 전체에서 그가 <킹제임스성경>의 본문을 매우 심각하게 변개시켰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말로 주신 최종권위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정교수가 거짓과 오류를 내세워 비방하는 것은, 현대의 성경 변개자들과 진리에 무지한 학자들처럼 자신의 무지와 편견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성경을 대적하고 왜곡하며 공격하는 큰 죄를 짓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바른 성경을 믿고 공부하지 않으면 속게 된다는 사실을 주의하기 바랍니다. BB


1)** A. T. Robertson, A Grammar of the Greek New Testament in the Light of Historical Research, (Nashville, Tenn.; Broadman Press, 1934), pp.591-596;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by Gerhard Kittel, trans.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5), pp.42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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