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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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오해한 연세대 신학생의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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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8월호>

"양심적 병역거부.” 언젠가부터 일반인들의 귀에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이것은 전쟁이나 군사 훈련이 자신의 종교적 내지 정치적 신념에 위배된다는 입장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일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일부 국가들에서는 그와 같은 병역거부자들이 특별히 지정된 작업에 종사하는 것으로써 군사 훈련을 대신할 수 있도록 법률로 제도화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2005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러한 대체 복무 도입을 권고했었고, 2006년에는 유엔에서 우리 나라 정부에 대체 복무 도입을 권고했었다. 2007년 가을에는 정부가 대체 복무 도입 계획을 발표했고, 2008년 말에는 국방부가 다시 대체 복무 도입을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대체 복무에 대해서는 한동안 논의되었으나, 법안으로 발효되지 않았다. 현재 병역을 거부한 사람은 1년 반 이상 수감생활을 해야 하고 전과자가 된다.
우리 나라에서 이러한 병역거부 행위는 주로 “여호와의 증인”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2000년 이후로 이러한 병역거부자는 5,000명에 달하는데, 그 중 99% 정도가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그런데 최근 개신교계 내에서 신학생이 병역거부 의사를 밝힘으로써 화제가 되었다.

지난 7월 7일, 연세대 신학과 03학번이며 2005년에는 신학대 학생회장을 맡았던 하동기 씨가 병무청에 자신의 병역거부 의사를 통지했다. 그는 6월 중순에 입영 영장을 받았고, 입대 예정일이었던 지난 7일에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다. 병무청은 하씨를 관악경찰서에 고발했고, 현행법에 따르면 그는 법정에 서고 수감 생활을 해야 한다. 개신교 내에서 병역거부 의사를 밝힌 사람은 하씨가 처음이 아니고 네 번째이지만, 이번 일은 하씨 개인의 행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 내의 집단적인 움직임과 연결되었다.
7월 13일 오전 11시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예배실에서는 병역거부권을 주장하는 34개 사회단체로 이루어진 소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 복무 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라는 모임 주최로 기자회견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름하여 “기독교신자 하동기 병역거부선언 기자회견”이었다. NCCK,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병역거부연대회의, 성공회대 교수, 연세대 신학과 학생들이 참여하여 하씨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고,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후원할 의사를 밝혔다. 기자회견을 주최한 “연대회의”는 이 날 현 정부에 대체 복무 도입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후원회는 세미나와 공연 등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뜻을 알리고, 수감 생활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하씨를 후원하며, 전국 신학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서명운동을 할 계획이다. NCCK 측에서는 신학교 교수들도 적극적으로 병역거부 운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연세대 신학과 학생인 하씨의 병역거부에 관한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전쟁도 사람을 살릴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2.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원하셨는데, 군사 훈련은 이웃 파괴를 위한 것이다.
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은 아무도 아픔과 고통에 내몰리지 않도록 세상을 바꾸어 나가라는 것이고, 거기에는 “원수”도 포함된다.
4. 이 세상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적으로 상정하고 그들을 죽이는 법을 가르친다.
5. 예수님처럼 국가와 권력의 폭력에 휩쓸려 죽을지언정 평화의 길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물론 전쟁은 살아 있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며, 전쟁은 결국에는 없어져야 하고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예언하였고 또 성경을 믿는 사람이 고대하는 미래의 모습 중 하나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시며, 많은 백성들을 책망하시리니 그들이 자기 칼들을 두들겨서 보습을 만들며, 자기 창들을 두들겨서 낫을 만들 것이요,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칼을 들어올리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사 2:4).
그러나 이 일이 지금 병역거부를 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며, 또한 지금 병역거부를 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일까? 하씨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였든지 아니면 성경을 균형 있게 보지 못함으로써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씨는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전쟁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수많은 실제적인 전쟁을 수행해 오신 “전사”시다(출 15: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창 14:17,20) 모세와(민 21:34,35) 여호수아와(수 10:40) 재판관들과(판 3:10; 4:15; 11:32,33) 사무엘과(삼상 7:10,11) 다윗왕과(삼상 17:47,52, 삼하 5:24,25) 아비야왕과(대하 13:15-17) 아사왕과(대하 14:12-15) 여호사밧왕과(대하 20:22-24) 웃시야왕과(대하 26:7) 요담왕(대하 27:5,6) 등이 이끌고 수행하는 전쟁을 도우셨고 승리로 이끄셨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시기 전까지 전쟁은 때로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지휘하시고 도우신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이러한 전쟁 역시 당연히 사람들을 죽이는 전쟁이다.
하씨가 생각하는 “하나님” 개념과 의로우신 진짜 하나님 사이에는 이처럼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것이다. 하씨는 자신의 엉성한 신학으로 예수님을 두둔하고 하나님을 정죄하는 격이 되어 버렸다. 그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모든 의지에 있어서 동일하신 분이심을 부인하려는 것인가?

전쟁하시는 예수님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그 동일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악한 세력들을 몰살시키시며 “손에 피를 묻히실” 것이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흰 말이 보이더라. 그 위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며 의로 심판하고 싸우시더라... 피에 적신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더라... 그의 입에서는 예리한 칼이 나와서 그것으로 민족들을 칠 것이요 또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며,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실 것이라. 또 그의 옷과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그 남은 자들은 말 위에 앉으신 분의 칼, 즉 그의 입에서 나오는 칼로 살해되니 모든 새들이 그들의 살로 배를 채우더라』(계 19:11-21).
제자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바로 그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오신다. 지금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그분은(골 3:1) 진노의 날에 왕들을 쳐부수시고 시체들로 땅을 가득 채우시는 “전사”로서 오실 것이다(시 110:5,6).
하씨가 생각하는 “예수님” 개념과 사랑으로 충만하신 진짜 예수님 사이에는 이처럼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것이다. 하씨는 자신의 엉성한 신학으로 초림하신 예수님을 두둔하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정죄하는 격이 되어 버렸다. 그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이 아니라고 부인하려는 것인가?

전쟁에 대한 성경적 관점
성경은 평화로운 때에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살인죄로 정죄하지만(출 20:13), 범죄자를 마땅히 죽이는 사형이나(출 21:12)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정죄하지 않는다.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 적군인 요압의 형제를 죽인 아브넬의 행위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평화로운 때에 아브넬을 죽인 요압의 행위는 사악한 것이었다(삼하 3:39, 왕상 2:5,6).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개인적인 실행에 관한 것이지, 전쟁의 상황에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전쟁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 당연히 아름답고 덕이 되는 일이 될 수는 없겠지만(대상 28:3),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세워지고 악인들이 제거되는 그때가 오기까지(마 13:41,43,49,50) 곧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현 시대에는 때로 전쟁이 필요하고 허용되며, 심지어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받들어 전쟁을 수행해야 되는 경우들도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싸웠던 성경의 온갖 전쟁들 역시 적들로부터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간직하기 위해서, 악인들을 멸하기 위해서 수행되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방어적”이라기보다 “공격적”으로 수행된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마저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군사 훈련에 대한 성경적 관점
한 나라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통치자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가 됨으로써 그분의 보호를 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다의 여호사밧왕 때의 상황을 살펴보자.
『그들이 주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고 유다의 온 성읍들을 두루 다니며 백성을 가르치니라. 주의 두려움이 유다 주변에 있는 땅의 모든 왕국들에 임하므로 그들이 여호사밧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아니하더라』(대하 17:9,10).
그 다음으로 인간인 그들이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가의 군사력을 기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태동하던 출애굽 때부터 그들을 군대로 부르셨고(출 12:41), 전쟁을 준비하게 하셨다(민 1:3). 전쟁을 즐기는 나라가 아닌 한, 군사 훈련이 잘 되어 “전쟁 준비가 잘 돼”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전쟁을 피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방책이 된다는 점 또한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역시 여호사밧왕 때의 상황을 살펴보자.
『그가 유다의 성읍들에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전사들과 힘센 용사들을 예루살렘에 두었더라... 유다에 속한 천부장들은 앗나가 우두머리요, 그가 힘센 용사 삼십만을 거느렸더라. 그 다음은 대장 여호하난인데 그가 이십팔만을 거느렸으며, 그 다음은 시크리의 아들 아마샤니 그는 주께 자신을 기꺼이 드린 자라. 그가 힘센 용사 이십만을 거느렸더라. 또 베냐민에 속한 자는 힘센 용사 엘리아다며 그가 활과 방패로 무장한 이십만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여호자밧이니 그가 전쟁할 준비를 갖춘 십팔만을 거느렸더라』(대하 17:13-18).
전체적으로 교훈을 주지만, 특히 군사들을 거느리는 사람을 두고 “주께 자신을 기꺼이 드린 자”라고 평가하는 말씀과, 이들이 “전쟁할 준비를 갖춤으로써” 실제로 전쟁할 필요가 없었음을 주목할 만하다. “전쟁 준비”를 갖추지 않은 나약한 나라는 오히려 전쟁을 즐기는 주변국의 의도대로 전쟁에 휘말릴 것이다. 그때는 두 손 들고 멸절되든지, 아니면 그야말로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눠야 할 것이다.

전쟁의 종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전쟁이 사라지는 것을 바란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그러나 신학생인 하씨와 엉터리 신학으로 무장된 NCCK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병역거부자들이 군대에 가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줄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에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쟁을 통해 악인들을 멸절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계 19,20장).
전쟁은 결국 전쟁을 통해 끝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평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오해한 연세대의 병역거부 신학생이 지금이라도 자신이 얼마나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는 중인지 깨달을 수 있을까? 젊은 시절을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한 길에서 낭비함으로써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다. 젊고 미숙한 사람을 성경적으로 계도하는 대신에 오히려 이 계기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그 개신교 집단들은 반성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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