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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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부활로 나올 자들의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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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5월호>

2015년 4월 5일 한국 교회의 부활절 예배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교단 연합(예장합동·통합·백석·고신·합신, 기성 등 8개 교단)의 세 단체로 나뉘어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각각 따로 진행되었다. 교회협은 서울시 후암동 중앙루터교회에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는 주제로 예배를 진행했으며, 한기총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섬김과 나눔’이라는 주제로, 교단 연합은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화해와 통일로!’를 주제로 진행했다. 그들의 공통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기보다는 “약자와 함께하는 것”이었는데, 부활절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사회성과 정치성이 짙게 배여 있는 주제들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를 취합해 보면, 세월호 참사와 그 해결, 남북 관계의 해빙과 한반도의 미래, 빈곤 문제와 직결된 비정규직 노동 제도와 청년 실업, 쌍용차 해고 노동자,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자들, 일본군 위안부, 장애인, 다문화 가정, 북한 이탈자 가정 문제 등 “사회복음”에 해당하는 것들을 주된 관심사로 부각시킨 것이다. 나름대로 부활신앙을 강조하며 한국 교회가 그 신앙 위에 바로 서야 한다는 외침도 있었지만, 사실 부활은 사회복음 밑에 깔려서 숨도 쉬지 못했다.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과 성경적인 부활을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부활절에는 당연히 부활이 주제이겠으나, 그 교회 절기는 이교도 로마카톨릭의 유산일 뿐 성경적인 기독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부활절 예배를 통해 그들이 도달하려는 목표는 이 세상의 개혁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이 역시 성경적인 기독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로마카톨릭은 부활절이라는 것을 만들어 자신들도 부활을 믿는 것처럼 가장했고, 그들의 비성경적인 실행을 그대로 가지고 나온 개신교도들도 부활절을 지키며 자신들 역시 부활을 믿는 것처럼 가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셨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주님의 부활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들은 성경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약자들뿐만 아니라 권력자들과 최상위 계층을 위해서도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갇힘이 모든 궁전 안과 다른 모든 곳에도 알려졌음이라』(빌 1:13).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카이사의 집안 사람들이 문안하느니라』(빌 4:22). 궁전에 사는 로마 황제의 집안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였다면, 사회복음주의자들은 주님의 부활이 그들이 주장하는 십자가 이전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공생애와 갖는 “모순”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들이 이것을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성경의 모든 내용이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발판이다. 누군가가 “인간은 자신의 환상이나, 독특한 신조나, 해석자 자신의 자유분방하고 공상적인 변덕에 따라서, 성경의 모든 구절과 사실로 무언가를 말하게 되고, 어떤 것이든 말하게 되고, 모든 것을 말하게 되고,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 말이 정답이다. 자신의 환상으로 주님의 공생애를 해석하고, 십자가를 해석하고, 부활을 해석하여 사회복음에 끼워 맞춰 버린 것이다. 이런 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라고 하지 못할 게 무언가? 한국 교회가 오늘날처럼 혼돈스럽고, 그 가운데서 “다양성 속의 일치”를 외치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고 해석만 있으며, 그 해석도 가지가지여서 기준이 없고, 또 기준이 없기에 서로를 판단할 수 없으므로 잡동사니를 집합시켜 놓고 “연합”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끼리끼리 모여 부활절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들은 왜 부활을 모르는 것인가? 이유는 한 가지,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딤전 2:4) 하나님께서는 그 진리의 지식을 위해 성경을 기록해 놓으셨다. 성경은 『진리의 성경』(단 10:21)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절 예배의 거짓 목사들이 아닌 성경으로 가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님의 신성을 증명한다고 말씀한다.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롬 1:3,4). 주님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 아담의 아들들 가운데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으며, 주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하실 것이라고 친히 계시해 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일으키리라.”고 하시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성전 된 자기 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 그후 주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 때 제자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더라』(요 2:19,21,22). 성경에서 부활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시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부활하여 다시 죽지 않으셨다. 빌라도에게 주님을 고소하던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우리의 율법에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하나이다.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니이다.』(요 19:7)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신성모독죄를 범했기에 율법에 의거해 죽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시며, 바울은 이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딤전 3:16)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도 주님의 신성에 관해서 논쟁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시어 주님의 신성을 나타내셨으며,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골 2:9) 『참 하나님』(요일 5:20)이심을 입증하셨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증명한다고 말씀한다. 『그녀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보라, 한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마 1:20,2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썩어질 남자의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이다.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잉태시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주님께서 요셉의 씨를 통해 나셨다면 요셉의 씨는 죄성을 유전시키는 썩어질 씨이기에 주님은 결코 부활하시지 못하고 사망과 썩어짐 가운데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이는 다윗이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내가 주를 항상 내 앞에서 미리 뵈었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어 나로 요동치 못하게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 마음이 즐거워하였고 내 혀가 기뻐하였으며 또한 나의 육체도 소망 속에 안식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또 주의 거룩하신 분으로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나에게 생명의 길들을 알게 해주셨으니 주께서 나를 주의 임재하심 속에서 기쁨으로 충만케 하시리로다.’라고 하였음이라』(행 2:24-28).
주님께서는 썩어짐을 보지 않고 부활하셨다. 주님은 요셉의 씨로 나신 것이 아니라 씨가 없는 여자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신 “여자의 씨”(창 3:15)이셨기 때문이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하나님으로서의 본성을 동시에 소유하실 수 있으셨다.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어도 죄가 없으셨기에(히 4:15) 썩어짐을 보지 않고 부활하실 수 있었다. 이것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도들의 부활을 보장한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3). 사도 바울이 이 구절을 쓰던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끼어 있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것이 전파되었는데도, 어찌하여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느냐?』(고전 15:12)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그러한 현실을 개탄하며 부활에 관해 15장 전체(총 58절)를 할애하여 기록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며, 잠든 사람들(죽은 성도들)도 멸망한 것이라고 말하는데(17,18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그분은 그분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고, 우리의 죄를 처리하지 못하신 것이 되어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자기 죄값을 지옥에서 직접 치러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복음”이란 것이 없게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들었던 자들의 첫열매들이 되셨다(20절).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에 주님 안에서 잠든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수 있게 되었고, 장차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49절), 곧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형상을 입고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되면 그때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1-54).
이것은 주님의 부활로 이룩된 쾌거이다. 주님의 부활은 썩고, 수치스럽고, 약하고, 흙으로 만들어진 몸을 지닌 성도가 썩지 아니하고, 영광되고, 능력 있고, 하늘에서 나신 분과 똑같은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될 것을 보장해 준다. 그들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공중재림하실 때 살아 있을 성도들 역시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모되어 서른세 살 반의 죽지 않는 초자연적인 남성의 몸을 지니고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이다(빌 3:21, 요일 3:2).

오늘날 비성경적인 부활절을 지킨다며 행인들에게 달걀이나 돌리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이다. 이 두 이단 교리는 단 한 번의 “총체적인 부활”만을 가르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고(행 3:15) 그 부활로 인해 확신이 커져서 능력 있는 일들을 행했던(행 4:10) 사도들은 단 한 번의 총체적인 부활이 아닌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가르쳤기에 강한 적대감과 반대와 박해에 직면해야 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책임자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들에게 와서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며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예수를 통하여 전파하는 데 격분하여서 그들을 체포하여 그 다음 날까지 가두었으니 이는 그때가 이미 저녁이었기 때문이라』(행 4:1-3). 이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은 한국 교회가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총체적인 죄들이 총체적으로 심판받는 총체적인 부활”에 앞서 “의인들의 부활”이 있게 될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다면” 그들이 부활한 후 남겨진 자들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총체적인 부활은 성경적인 교리가 아니다. 말하자면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 때보다 먼저 부활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인데, 오늘날 부활절을 지킨 한국 교회는 부활에 관한 교리가 주님의 사도들과 다르기에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일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이 물리적인 부활을 부인하고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가르쳤던 후메내오와 필레토와 같은 자들이며(딤후 2:17), 사실상 성도들에게 약속된 성경적인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부활절 예배를 진행한 위선을 저지른 것이다.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롬 1:4) 주님께서는 그분의 성도들 또한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시키신다(행 4:2). 주님께서는 이 성경적인 부활을 가르치지 않는 자들을 가리켜 “종창(암) 같은 말로 믿음을 뒤엎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딤후 2:17,18).
뒤에서 밀어 주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암 환자들은 보기에도 참 안쓰럽지만, 자신이 영적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새벽부터 총체적인 부활을 외치며 활보하고 다닌 한국 교회가 그보다 더 안쓰럽다. 그들이 마지막에 있을 것으로 알고 있는 그 부활에는 사실 “그리스도인”이 없기 때문이다. 큰 백보좌 심판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과 죄지은 천사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기에(고전 6:2), 그때 “총체적으로” 부활하는 사람들은 “교회 시대와 무관한” 사람들뿐이다. “이 교회 시대에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들은 지옥에서 천 년 이상 있다가 자신들이 총체적인 부활이라고 잘못 가르친 그 부활로 나오게 되는데, 이 시대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그때 부활하면 영락없이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저주의 부활』(요 5:29)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구원에 관해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그들에게 한 가지 묻고자 한다. “부활절 예배를 드린 그들은 큰 백보좌 심판 때의 저주의 부활로 나오기 위해 새벽부터 그토록 부활을 외친 것인가?”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니 그들이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1,13-15). 그들은 이렇게 되기 위해 부활을 외친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해마다 무의미한 부활을 외치는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음성에 경청하는 것이다. 즉 『만일 너희가 내가 전한 복음을 굳게 잡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복음을 통하여 너희도 구원받은 것이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달하였나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서』(고전 15:2-4)라는 복음의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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