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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멸망으로 이끄는 “목사 4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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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6월호>
사람은 자신이 본받고 따르고 싶은 “롤모델”을 설정한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할 믿음의 발자취를 본으로 남겨 주셨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한 본을 남겨 놓으시어, 너희로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느니라』(벧전 2:21). 물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가신 주님을 온전히 따랐던 바울과, 또 그의 뒤를 따르면서 성경적인 믿음의 본을 보여 준 성도들을 뒤따라간다면,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따라야 할 “대상”을 잘못 선정하는 데 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그것이 당신을 멸망으로 이끌고 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파멸의 길을 따르리니』(벧후 2:2).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며』(빌 3:19).지난 4월, 한 일간신문에 모 종교전문기자가 「종교계 거인들이 떠난 자리」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요는, 20세기 후반 한국의 종교 지도(地圖)를 그려 온 거인들의 시대가 저물고 있으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거인들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는 것이었다. 그가 아쉬움 속에 거명한 종교계 거인들 중에는 고인이 된 목사들이 있었으니, 곧 한경직 목사, 옥한흠 목사, 하용조 목사, 방지일 목사이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어떤 일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발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성경적인 원칙이다(고전 2:15). 그것이 영적인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도대체 이 목사들이 뭐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이 종교기자는 그들을 “거인” 운운하며 추켜세웠단 말인가? 이러한 심각한 오판은 아담의 거듭나지 못한 성품과 죽은 영의 산물이다. 죽은 영은 마귀의 통제를 받는다. 아무리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인간적이고, 겸손하고, 매우 그럴듯하게 세련되어 보이는 “판단”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영은 거짓말의 아비요, 불순종의 영인 마귀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의 말과 글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판단을 위한 절대적인 잣대(성경)와 성경적인 방법을 부인하는 것이 세상사인지라, 이 땅에서는 오판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제대로 판별하려면 “열매”를 살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들이라. 너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되리니, 사람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느니라.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되리라』(마 7:15-20). 이 여섯 구절 안에서 “열매”라는 단어는 일곱 번이나 나오는데, 그만큼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열매에 유념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열매는 성경적인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무시한 자들에 의해서, 성경적으로 전혀 형편없는 사람들이 과장된 미사여구로 높이 평가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일례로, 친카톨릭적 성향을 가졌던 교회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후천년주의 신학을 비롯한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기독교계 안으로 들여왔던 “어거스틴”에 대해서는 과도하리만치 높게 평가했으면서도, 어거스틴이 이단으로 정죄하여 죽이는 데 찬성했던 “도나티스트들”에 대해서는 평가절하시켰다. 도나티스트들은 로마 황제나 그의 친위대에게 발각될 경우 죽기까지 믿음을 지켜야 하고, 성경을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또한 교회의 순수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로마카톨릭으로부터 분리해 나갔다. 필립 샤프는 성경에 대한 이들의 태도를 보면서, “죽음을 멸시하는 광신적 태도”이자 “순교자의 면류관을 타려고 돌진”하는 자들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이들의 성경적인 믿음을 비아냥거렸던 그는 자신이 했던 그 말에 대해 반드시 주님 앞에서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마 12:36). “고명하신” 교회사가의 수준이 이 정도일진대, 진리와 무관했던 목사들을 잘못 추켜세운 평범한 종교기자의 판단 수준이야 얼마나 더하겠는가! 사실 이것이 오늘날 배교한 교회들과 목사들의 영적 수준이다.
그렇다면 이들 목사 4인방은 생전에 무슨 일들을 했기에 소위 “거인들”이라 불리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의 인정만 받으면 거인이 될 수 있는가? 누가복음 16:15에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 기자는 그들을 거인이라 부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종교계를 이끌던 시대에 우리는 처음으로 보릿고개를 넘어섰고 세계무대에서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을 것이란 희망이 넘치던 때였다.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겪고 견뎌낸 종교 지도자들은 한편으론 국민에게 희망과 격려를 주었고 다른 한편으론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대신 나서 주었다. 그들은 이농(離農) 바람에 갑자기 고향을 떠난 뿌리 뽑힌 이들의 허전함도 달래줬고 종교간 대화에도 앞장섰다. 국민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입을 주목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그런 일들의 결과로써 성경적인 복음과 진리가 확산되었는가? 지옥의 멸망으로 향해 가던 죄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써 죄들을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들로 태어났는가? 아니면 교회들 안에 도덕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성경적인 성별이 이루어지고 영적인 각성이 일어났는가? 그런 종교적인 일들이 세상에서는 환영받고 주목받을 일인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 관심조차 두지 않으신다.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들의 눈에나 대단하게 보일 뿐이다.
이런 종교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네 명의 목사들을 “종교계의 거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그들 스스로가 “종교인들”이었고, 이 세상에 구원받지 않은 수많은 종교인들이 따르고 싶어 하는 “롤모델들”이었기 때문이다. 옥한흠 목사는 생전에 가졌던 한 인터뷰에서(2010년) 김수환 추기경과 승려 법정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이렇게 소회를 밝힌 적이 있었다. “종교는 달라도 참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좀 더 버티고 계셨으면 우리 사회에 양지가 더 넓어질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들이 가시고 나니 음지가 더 다가오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인 목사로서 할 말이겠는가! 이들 두 명의 종교인들은 그들 스스로도 지옥에 갔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 520만여 명의 천주교도들과 1,100만여 명의 불교도들을 비롯하여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의 멸망으로 이끌던 장본인들이었다. 물론 그런 악인들의 죽음을 기뻐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겔 33:11), 그런 종교지도자들의 죽음을 아쉬워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진리의 불빛을 밝힌 적도 없고 영적인 흑암만을 확산시켰던 자들이 죽었는데, 오히려 옥 목사는 그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음지가 더 다가오는 것 같아 답답하다”는 심정을 토로했었다. 진실은 둘 중의 하나이다. 옥 목사는 구원받지 않은 종교인이었거나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비겁한 목사였던 것이다.
이런 종교인의 모습에 있어서는 다른 세 명의 목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그런 종교인들이 하나님과 진리를 위해 무엇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무관한 자들이며, 성경적인 믿음과도 거리가 한참 멀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흉내내는 모방자들일 뿐이다. 모방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follower)이 아니라 흉내내는 사람(imitator)이다. 흉내를 내는 것은 종교적 위선이지 결코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종교적인 위선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마 23장).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회칠한 무덤들과 같음이라. 그것들은 실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나 속에는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도다』(마 23:27,28). 그렇게 보면 종교인들은 그가 거인이라 불리든지 그렇지 않든지 있으나마나 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런 거인들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해서 그들의 떠난 자리를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또한 종교인들은 성경적이고 영적인 일들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일들을 수행할 수 있는 지혜와 영적인 능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영적인 일 비슷하게 흉내만 낼 뿐이다. 이것은 네 명의 목사들이 한국 교회에 남겼다고 하는 몇 가지 주요 족적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우선 한경직 목사와 방지일 목사는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즘)을 그 후대들에게 물려주었다. 특히 한 목사는 종교간 협력과 대화의 모델을 구축한 지도자로까지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가 연합을 위해 성경적인 복음과 진리를 포기한 종교인이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종교인들은 통합과 사랑과 화평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진리를 외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반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어떤 연합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1887년 10월, 침례교연합이 배교한 것에 분개한 찰스 스펄전은 성경에 입각하여 그들로부터 성별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걷는 길은 그들과는 다른 길이다. 과오가 그들 안에 굳건하게 자리잡았음을 보는 순간, 아니, 보인다고 생각되는 순간, 나는 이것저것 따져 볼 필요도 없이 즉시 그 단체를 버렸다. 그후 지금까지 『그들에게서 나와 따로 있』으라는(고후 6:17) 성경적인 진리가 나의 한결같은 방침이었다. 나는 아무리 그들에게 항의를 해봤자 따로 성별되어 있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스펄전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경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배교자들로부터의 성별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물며 다른 종교들에 대한 자세는 어떠했겠는가! 과연 한경직 목사가 성경적인 복음을 통해 수천 명의 죄인들을 주님께로 이겨온 스펄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겠는가! 우리는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판단해야 한다.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으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을 오도했다. 그것도 “광인”(狂人)의 정신으로 말이다. 교계는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를 “제자훈련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변개된 <개역성경>에나 나올 뿐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마 28:19)라고 바르게 보존된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로 변개되어 있다. 결국 변개된 성경이 그를 엉뚱한 일에 미치도록 만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후 5:13). 말하자면 “미쳐도” 제대로 미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용조 목사는 “경배와 찬양”으로 교회들을 망쳐 놓았다. 그로 인해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경배(요 4:23,24) 대신 육신적이고 감정을 자극하는 “쇼”가 교회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문화 전도 집회인 “러브소나타”라는 것으로 죄인들을 오도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운운하면서 매우 정중하고 그럴듯한 언변으로 청중에게 다가갔을 때, 머리로만 믿는 결신자들, 곧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들만 더 많이 양산되고 말았다. 제자훈련이든, 경배와 찬양이든, 러브소나타든, 이런 종교적인 프로그램이나 기독교적인 문화운동들로 인해 과연 무슨 열매가 맺혔는가! 교인들의 숫자만 늘었을 뿐이다. 정작 구원받은 사람의 숫자나 지옥으로 간 죄인들의 숫자에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다. 과연 구령하지 못하는 목사, 구령하지 못하는 교회가 존립 가치가 있겠는가!
반면 지난 2천 년의 교회사 속에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생애는 이런 종교인들과 확연하게 달랐다. 그들은 오직 바르게 보존된 성경책만을 믿었고, 암송했으며, 설교했고, 가르쳤다. 비겁한 종교인들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돌진하는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산과 평원과 사막과 바다를 누비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담대하게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면서 순교자의 무덤에도 기꺼이 몸을 내던졌다. 누군가가 잘 말했듯이, “그들의 생애와 열매는 한마디로 그들이 풀어 준 쇠사슬, 그들이 해방시킨 죄인들, 그들이 먹인 배고픈 자들, 그들이 변화시킨 이교도들로 설명된다. 그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냈고, 그들의 인생 여정은 교회에서 보낸 시간들과 제단에서 외친 찬양 소리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며 흘린 눈물로 엮어져 있었다.”
이제 당신은 누구를 따를지 “대상”을 선택해야 한다. 이들 “목사 4인방”은 죽어서도 여전히 “종교계의 거인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소경이 소경을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다(마 15:14).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