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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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공동체”의 문신, 짐승의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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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5월호>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문신(tattoo)과 같은 현대 문화의 복잡성에 대해, 훈련받고 있는 사제의 입장에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가?"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어느 카톨릭 신학생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문신을 두려워하지 말라. 에리트리아 기독교인들은 수년 동안 이마에 십자가를 새겼다. 오늘날에도 이를 볼 수 있다. 십자가는 문신이었다. 문신은 종종 공동체의 회원임을 나타내기도 했다. 문신을 통해서 공동체 소속감을 표현하고 싶은가? 문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문신에는 우리를 진리로 이끄는 무엇인가가 있다. 문신의 의미를 놓고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화두로 사용하라."

필자는 현 교황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준비 모임에서 했다는 이 말을 읽고, 그가 "교황"으로서 해야 할 말을 했으며 그 직분의 "이름값"을 충분히 한 것이라 생각했다. 질문자의 물음은 "현대 문화의 복잡성"에 관한 것이었는데, 교황의 답변은 "십자가 문신"에서 "공동체 회원"으로 옮겨 간 "종교적인" 논리였지만, "마지막 교황"인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머지않은 이 마지막 때에 그의 어설픈 답변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신의 문제는 문화의 개념을 넘어 인류가 직면해야 할 "짐승의 표"와 그 숭배에 관한 것이어서 그 종교적 비중이 결코 가볍지 않다. "문신을 두려워 말라. 문신은 공동체의 소속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문신은 진리로 이끄는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이 섬뜩한 말이, 필자의 마음에는 짐승 앞에서 행할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터져 나올 소리와 중첩되는 듯하여, 불현듯 대환란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짐승의 표를 두려워 말라. 이 표는 세계 공동체의 소속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666은 온 세상을 진리로 이끌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한 개인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분명 교황의 그 말에는 "현 세상을 적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말하자면 온 세상이 치명적인 상처에서 살아난 짐승을 따라가며(계 13:3) "짐승 공동체"의 회원으로서 소속감을 가지기에는 그들의 이마나 오른손에 찍을 표, 곧 일종의 "문신"만한 것도 없는 것이다(계 13:16). 오지의 미개인들이 몸에 그림을 그려 부족 공동체의 표로 삼듯이, 대환란 때 이마나 오른손에 받게 될 표는 그것을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가 육안으로 포착될 것이므로 마귀의 자식들과 환란 성도들을 현장에서 구별시키는 기능을 할 것이다. 그래서 환란 성도들은 그들을 피해『광야와 산속과 동굴과 토굴에서 유리』해야 한다(히 11:38). 표를 받지 않아 "짐승 공동체"의 회원이기를 거부한 성도들 가운데는 목 베임을 당하여 짐승에게 제물로 바쳐질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계 6:9; 20:4), 이것은 문신이 본성적 혐오감의 문제를 넘어서 인류의 비극적인 운명에 상당하고도 강제적인 영향력을 갖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

성경에서 문신은 "레위기 19:28"에 최초로 등장한다.『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의 몸에 어떤 살도 베지 말며, 너희 위에 어떤 표들도 찍지 말라. 나는 주니라.』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주어진 이 명령은 광야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거할 때 금해야 할 사항들 가운데 하나이며, 몸에 표를 찍는 행위가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와 관련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나는 주니라.』라고 말씀하신 분과 무관한 이교(異敎)적 실행인 것인데, 고대 이교도들은 몸에 우상의 표를 새김으로써 자신이 우상의 종들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주』이시므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의 종이 되기 위해 몸에 문신을 새기지 말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Ptolemy IV Philopator, B.C. 221-204)가 유대인들에게 유대교를 버리고 이교도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바쿠스 신에게 바쳐진 아이비 나무의 이파리를 몸에 표로 새기도록 했다고 하는데, 이처럼 문신에는 뼛속까지 스민 종교적 의미가 있으며, 그러기에 몸의 표는 하나님과 마귀 중 마귀를 택하고자 하는 죄인들의 타고난 심리를 반영하는 강력한 증거라 하겠다.

오늘날 문신은 카톨릭 신학생의 질문처럼 "현대 문화의 복잡성" 속에 얽혀 있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과거 종교 세계에서는 신앙의 의미로,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유대인의 왼쪽 팔뚝에 찍는 수인번호로, 범죄 조직에서는 흉포함의 이미지로 쓰이던 것이, 지금은 일반인도 (비록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털어 버릴 수는 없지만) 취미나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자유롭게 활용하는 "신체 문화"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문신의 기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드럽고 탄력적이어서 생체 조직과 결합이 가능한 "전자 피부 문신"이 개발되어 사용자의 신체 정보를 감지하는 것은 물론, 센서(sensor)와 안테나로 근거리 스마트 기기와 연락이 가능하며, 문신에 내장된 마이크로 통화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자 잉크"로 새겨 넣는 문신은 기본적으로 금융 거래 시 본인 인증 수단이 되는데, 고작 "잉크"를 새겨 넣는 것만으로도 센서가 되고, 전자 회로도 되고, 안테나와 마이크도 되는 이 가공할 기술은 인류의 기술 진보가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가를 보여 준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기술 진보가 없다 해도 인간이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해마다 색다른 첨단 기능을 장착한 차가 출시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더 가볍고, 더 얇고, 더 똑똑한 컴퓨터가 개발되지 않아도, "더 스마트한"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아도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렇다면 인류의 기술이 진보하는 것은 삶의 편리성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인류가 왜 그렇게 해 왔는지, 그와 같은 기술 개발에 왜 그토록 몰두해 왔는지는 그들의 사고 체계를 지배해 온 이 세상의 통치자, 곧 마귀에게 그 이유와 답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문신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든, 문신 기술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든, 문신은 대환란 때 "짐승의 표"로 그 정점을 찍게 될 것이다. 인류가 행해 온 그 모든 일들의 근원은 하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인류가 "눈에 보이는 마귀"를 그들의 통치자로 영접하게 하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역사였던 것이다.『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나니 현재는 막는 자가 있어 막을 것이나 그가 그 길에서 옮겨질 때까지만 그리하리라. 그리고 나서 그 악한 자가 나타나리니...』(살후 2:7,8). 바늘로 살갗에 잉크를 찔러 넣던 기술이 "피부에 새기는 전자 회로"로 진보한 것은, 그것을 세계 통치 수단으로 삼게 될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한 인류 역사 6천 년간의 준비 작업이었던 셈이다.

그 짐승이 출현하면,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으나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낫게 될 것이고(계 13:3), 온 세상이 그 일을 기이히 여겨 그를 따를 때 그를 위해 형상을 만들어 형상 숭배를 강요할 것이며, 숭배를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죽이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계 13:12,14,15). 성경은 이 일을 주도할 자를『거짓 선지자』(계 16:13)라고 부르는데, 이 자는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등 큰 이적들을 행하여 세상을 미혹할 것이고(계 13:13), 급기야는『모든 자, 즉 작은 자나 큰 자, 부자나 가난한 자, 자유자나 종이나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숫자를 지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거나 팔 수 없게』 할 것이다(계 13:16,17). 그때 모든 상거래는『그 짐승의 숫자』 곧『한 사람의 숫자』인『육백육십육』(666)을 근거로 이뤄질 것이다(계 13:18). 이 "짐승의 표를 거부한" 유대인 환란 성도들의 이마에도 인장으로 표가 주어질 것인데(계 7:2,3), 인장으로 표시받은 이들의 수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선정된 144,000명이며(계 7:4-8),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혀지지 아니한 남자 동정들이다(계 14: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은 남자 동정들"을 택하시는 것일까?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그들은 짐승 숭배에 참여하지 않아서 숭배 의식 중 하나인 "음행"으로 더럽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모든 가증한 짓들을 보면서, 성읍 한복판에서 드러내 놓고 탄식하며 용기 있게 울부짖었기에 하나님께서 이마에 표를 하시어 보호받게 하시는 것이다.『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그가 계셨던 그룹에서 올라가 성전의 문지방에 이르니 주께서 가는 베옷을 입고, 옆구리에 서기관의 잉크통을 찬 사람을 부르시더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성읍 중간을 통과하라. 예루살렘 중간을 통과하여 그 가운데서 행해지는 모든 가증한 짓들로 인하여 탄식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 하시고』(겔 9:3,4). 짐승이 자기가 소유한 사람들의 이마에 "짐승의 표"를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대환란 때에 의를 위해 분노하고 탄식하는 그분의 사람들의 이마에 서기관의 "잉크"로 "하나님의 표"를 하실 것인즉, 대환란 끝에 셋째 하늘로 휴거된 그들 144,000명의 이마에는『그[어린양]의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다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계 14:1). 이처럼 의를 위해 분노하고 죄에 대해 탄식하는 성도를 주님께서 매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잉크는 종이에 글을 쓰는 유색의 액체이다. 종이에 스며들면 글자가 되지만, 몸에 스며들면 자신의 소유주를 나타내는 "표"가 되는 것이 잉크이다. 잉크는 유연(油煙)이나 목탄을 원료로 한 탄소 덩어리가 그 시초였는데, 오늘날에는 "전자 잉크"가 개발되어 그 사용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에 잉크로 문신하지 않는다. 대환란 때에는 셋째 하늘에 가 있을 것이므로 몸에 짐승의 표를 받을 일도 없다. 다만 현재 그의 마음판에 잉크보다 더 좋은 것으로 "그리스도의 편지"를 기록해야 하는데, 그 편지를 기록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이시다.『또 너희는 우리가 섬긴 그리스도의 편지임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이는 잉크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육신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그리스도인은 잉크의 점과 얼룩이 없는, 거룩하고 깨끗한 "살아 있는 편지"이다. 이 편지가 사람들에게 읽혀지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그리스도인이 그의 몸에 받을 수 있는 표가 있다면 그것은 "주 예수의 표"이다.『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나는 내 몸에 주 예수의 표들을 지녔느니라』(갈 6:17). "주 예수의 표들"은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을 다니며 채찍으로 195대를 맞고 몽둥이로 세 번 맞고 한 번은 돌로 맞음으로써(고후 11:24,25) 몸에 남게 된 상처 자국을 의미한다. 바울은 십자가에 처형되지 않았기에 주 예수의 못 자국들이 없지만,『이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나의 고난들을 기뻐하고 또 그리스도가 고통받으신 이후에 있는 것을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에 채우노라.』(골 1:24)라는 말씀은 그의 몸에 있는 "주 예수의 표들"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며 수고하는 것이야말로 마음판에 그리스도의 편지가 기록된 성도의 삶인 것이다. 바울은 그 일의 표본이며, 우리에게 바로 그 바울을 따르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다.『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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