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세대주의 분류

세대주의,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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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6월호>

어떤 특정 교단이나 주의나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노선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과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세대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을 미숙하게 다루는 것은 쉽게 목격하는 일이다.
“세대주의”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방법이나,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세대주의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거부심리가 상당히 작용해 왔다. 특히 무천년, 후천년주의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세대주의를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세대주의를 수용하게 되면 그들의 종말론은 발붙일 곳이 전혀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성경을 풍유적(allegorical)으로 혹은 영적(spiritual)으로 해석하게 된 것은 세대주의를 배격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야기된 현상이다.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어떤 해석이 옳은 성경해석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문제가 또 남게 된다. 100명이 각자 자기 나름대로 풍유적 해석 방법을 동원하여 성경을 해석했다면 누가 옳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혼란과 혼돈 외에 그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경이 재판관이 되어야 하는데, 성경은 제쳐놓고 인간의 견해로 성경을 해석하니 해석이 올바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유명한 학자의 의견에 권위가 세워지고, 실력이 있든 없든 이름 있는 학교에서 학위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신학 풍조가 되었다. 어떤 사람의 경력을 보면 석사 학위가 세 개 이상이 되는 사람도 있고, 박사 학위가 두 개 이상 되는 사람도 여러 명 있다(명예박사는 제외하고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정립된 신학체계가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회(會)를 만들어 놓고 그들이 “선호하는” 비성경적 교리를 세워나가고 또 가르쳐 왔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세대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세대주의는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렵지 않다.

『율법과 선지서들은 요한까지요, 그 후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밀려들어 가느니라』(눅16:16).

예수님 자신도 율법시대에 사셨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점을 율법과 은혜의 분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이 전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 복음을 전하신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예수님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전한 적이 없다. 바울은 오히려 은혜의 복음이 아닌 것을 이 교회시대에 전한다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갈1:8,9).
세대주의를 모르면,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마태복음 10:5-10을 복음으로 전하라고 할 것이다. 비록 그 선교사가 열정적으로 천국복음을 전해도 그것은 가짜 복음이며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율법과 선지서들은 요한 때까지며, 그 후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어 사람들은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천국복음은 유대인에게 한정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전해야 되었던 복음이다. 세대주의를 배격하기 때문에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같은 것으로 보고, 천국복음과 은혜의 복음을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학사학위 두 개, 석사학위 세 개, 박사학위 두 개면 무엇을 하겠는가? 성경을 볼 수 있는 열린 눈과 마음이 없는 것을...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라』(요1:17). 『모든 선지서와 율법은 요한까지를 예언한 것이라』(마11:13). 이와 같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받을 자세만 되어 있다면 성경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고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인 세대주의를 배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Dispensationalism”을 세대주의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부터 잘못된 것이다. 시대적 구분을 했다고 해서 세대주의란 명칭이 붙여졌지만, “Dispensationalism”이라는 용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치리하실 때 언제나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다양한 경영방식을 사용하셨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세대주의”라는 용어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적 경영방침”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구분하지 않고서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 율법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지 이방인과 교회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다르다. 성막과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지 교회에게는 성전을 주신 적이 없다.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성전에 계셨던 하나님께서 이 교회시대에는 거듭난 성도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셨다(고전3:16; 6:19). 교회시대에 교회 건물 안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행7:14; 17:24).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레위인 제사장들은 필요 없게 되었고(벧전2:9), 죄를 지으면 양과 소를 잡아서 피를 뿌릴 성막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없는 것이다.
“세대주의”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방법이지, 다비(Darby)나 에릭 사우어(Sauer)나 스코필드(C. I. Scofield) 등을 세대주의에 연관시킬 필요가 없다. 소위 계약신학자인 찰스 핫지(Charles Hodge)도 성경을 네 세대로 나누었다 - ①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②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 ③모세에서 그리스도까지 ④그리스도에서 마지막까지).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은 어떠했는가? 그는 성경을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로 나누었고, 그 중 구약에서 네 가지 구분을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을 나누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발상이기 전에 하나님의 명령이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유대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유대인에게, 이방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이방인에게, 교회에게 해당되는 것은 교회에게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2:15).
성경을 올바로 나누지 못하고 유대인에게 주신 명령을 교회에게, 이방인에게 주신 말씀을 유대인에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유대인에게 적용하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바른 성경으로 올바로 공부하지 않으면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세대주의를 배격함으로 받는 악영향

1. 풍유적 해석방법의 모호함

성경은 유기체와 같이 모든 부분이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부분을 잘못 해석하면 다른 부분들도 계속해서 불균형을 이루게 된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성경 구절을 참조구절로 삼아 그것을 뒷받침할 때 그 설명이 비로소 안전하게 보증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 이단들의 교리는 어떠한가?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성경 구절로 교리를 정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불분명한 성경 구절을 교리로 삼고 그것을 증명할 참조 구절 또한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단 교리로 남게 되는 것이다. 풍유적 해석 방법으로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

2. 풍유적 해석방법의 근거

풍유적 해석 방법은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계열 원문이 나온 알렉산드리아에서 필로라는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희랍 철학을 하나님의 말씀에 접목시킴으로써 성경 진리를 변개시켰던 시초가 되었다. 필로의 야심은 순전히 인간적인 것으로, 모세의 율법을 희랍 철학에 접목시킴으로써 희랍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수용하여 처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성경은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대로 해석될 수 없었고, 오늘날에도 무지한 상태에서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풍유적이고 영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교리로 적용함으로써 많은 이단적 병폐를 낳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규모가 큰 교단들이 이런 오류를 범함으로써, 자신들과는 달리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이상하게 평가하고 오히려 이단시하고 있는 것이다.
필로의 후계자인 오리겐의 방법을 답습한 것이 바로 어거스틴이다. 그의 해석 방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더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요, 예루살렘도 예루살렘이 아니며 다윗의 집도 다윗의 집이 못되고 천년도 천년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해석 방법은 종교개혁 때까지 계속되어 오다가 문자적 해석 방법으로 바뀌었으나 이미 교회에 만연된 오염은 쉽사리 지워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런 전통에서 무천년주의적 종말론이 나왔고 결국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가 사라져 버렸으며(계 20장을 읽을 것),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분을 없애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근대주의와 사회복음을 낳게 한 요인이 되었다. 또 이것이 후천년주의 종말론 개념을 낳아 카톨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아 지상에서 천 년 간 평화를 유지하며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하여 도둑처럼 오셔서 자기 성도들을 데려가신다는 휴거와 그 후에 세상에 닥칠 야곱의 환란을 가리고 있다.

세대주의에 입각하지 않는 성경해석은 개인적인 주관이다.

성경의 어떤 해석도 사사로운 해석이 되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예언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벧후1: 20,21).
신약에 인용된 구약성경도 오직 문자적 해석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을 보는 견해가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면 누구의 해석이 더 옳은 것인가? 성경이 그것을 평가해야 되는 데 성경의 권위가 아닌 인간의 해석을 인정하고 있으니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성경에는 약 800개의 예언이 있는데 그 중 약 300개는 예수님의 초림과 관련되어 성취되었고 나머지 500개는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성취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의 성취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무오함을 입증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5;18)고 하셨고 『율법의 한 점이 없어지기보다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이 더 쉬우리라』고 하셨다(눅16:17).

이렇듯 세대주의란 어떤 학파나 교단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자기 교단이나 신학교가 세대주의를 배격한다고 해서 세대주의적 해석 방법을 버린다면 그는 성경을 알지 못하게 된다. 성경을 가르쳐주는 신학교에서 성경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신학방법론을 버리게 한다면 온당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신학 수준과 미국의 정통신학의 수준을 비교한다면 초등학교 3학년과 대학생 정도의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에도 정통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더러 있지만 그들이 배운 신학이론을 실제로 적용하지 못하고 있기에 절름발이 지식이 되어 버렸으며, 특히 직역성경(한글 킹 제임스 성경)을 배격함으로써 제도권에 합류하여 세대주의를 배격하는 조류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세대주의를 배격했기에 성경 지식이 낙후된 교회와 신학교로 남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사람을 통하여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사람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진리를 말하는지 거짓말을 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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