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진리의 진수 분류

“아들의 죽음”으로 낳으신 “교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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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1월호>

“요한복음 17장”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관한 특별한 계시가 주어져 있으며,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교회가 서로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리와 맞물려 있다. 『이는 그들 모두가 하나 되게 함이오니,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서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요 17:21). 이 “하나 됨”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신비”라고 했다. 『이것은 그분이 계시로 내게 신비를 알게 하신 것이며 (내가 전에 간략하게 쓴 것과 같으니 너희가 읽을 때 거기서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있는 나의 지식을 이해하게 되리라.)...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이 되며』(엡 3:3,4,6). 이 “한 몸 됨,” 곧 “하나 됨”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죄인들이 거듭날 때 성령님에 의해 그 “한 몸”(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받음으로써 일어난다(고전 12:13). 그렇게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롬 12:5) 되고 『개별적으로는 그 지체들』(고전 12:27)이 된 것인데, 이처럼 요한복음 17장의 “하나 됨”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지체가 되어 그 “한 몸”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옵니다』(요 17:22).

위의 요한복음 17:22은 앞선 21절과 함께 교회통합주의자들이 굳게 붙들고 있는 구절이다. 21절을 다시 인용하자면 『이는 그들 모두가 하나 되게 함이오니,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서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요 17:21)인데, 교회통합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우리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연합하는 것이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교리가 달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모여 하나가 되자.”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 됨”을 로마카톨릭 교황을 “목자장”으로 한 모든 교파 교회들의 통합으로 해석하는 것인즉, 그들이 이를 위해 내세우는 슬로건이 바로 “사랑으로 하나 되자.”이다. 사랑만 있으면 교리가 달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에 관해 기록한 “사랑의 사도” 요한은 결코 사랑으로 거짓 교리를 덮어 주지 않았다. “사랑의 사도”는 바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과는 교제하지 말고 성별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오되 이 교리를 가지고 오지 아니하면 그를 집에 영접하지도 말고 그에게 문안하지도 말라. 이는 그에게 문안하는 자는 그의 악한 일들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 1:10,11). 말하자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한다”(고전 13:6). “사랑의 사도”는 성도들을 “진리 안에서” 사랑했으니(요삼 1:1), “사랑”으로 각색의 이단 교리를 포용하는 것은 “진리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벌이는 작태인 것이다. 진리를 뺀 “사랑”만 강조하면 장차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됨을 알아야 한다. 『그 악한 자가 오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 안에 있는 모든 불의의 속임수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살후 2:9,10). 솔로몬이 우상 숭배의 이방 민족들과 “사랑으로 결합”하였듯이(왕상 11:2), 그 가짜 교회들도 『우상 목자』(슼 11:17)인 적그리스도와 “사랑으로 결합”하게 될 것이다.

교회통합을 주장하는 거짓 교회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영광을 받은 “영광스러운 교회”이다. 『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옵니다』(요 17:22). 이 영광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의 영광이며(빌 2:6) 『만물의 상속자』이신 『아들』의 영광이다(히 1:2). 아들께서는 그 영광을 자신과 하나 된 교회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으니, 교회가 『복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살후 2:14)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딤후 2:12) “고난”을 견뎌 낸다면 『아들』과 함께한 『공동 상속자들』(롬 8:17)이 되어 “아들의 형상과 정확히 일치된 모습으로”(롬 8:29) 영원히 통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사 9:7, 마 19:28) 천년왕국을 수립하실 때(계 19:11-16) 신부인 교회도 “주님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골 3:4) 만물이 회복된 천년왕국에서(행 3:21) 주님과 통치하게 될 것이다(계 5:10; 20:1-7). 그 천년왕국이 지나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 세계에서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계 21:1-8) 주님과 영원히 통치하게 되는데(계 22:5), 이 영원한 통치의 영광이 『영광스러운 교회』(엡 5:27)에게 주어진 『영원한 영광』(딤후 2:10)인 것이다.

“영광스러운 교회”가 교회통합주의자들과 함께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의 구절이 계시해 주고 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우리가 교회통합주의자들과 함께할 수 없는 이유는 “진리,” 즉 “교리” 때문이다. 교회통합주의자들은 “교리” 문제로 다투지 말고 십자가 밑에서 하나가 되자고 한다. 그들은 교리의 중요성을 무시하지만, 교리는 성경이 주어진 “첫째 목적”이자, 교회를 비진리로부터 분리시켜 안전한 항로로 인도하는 “나침반”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이 디모데후서 3:16의 “교리”는 3장 전체의 문맥상 『경건의 능력』(5절), 『진리의 지식』(7절), 『나[바울]의 교리』(10절), 『박해와 고난』(11절)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5절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7절의 『진리의 지식』에 결코 이를 수 없다고 했는데, 이 진리의 지식은 10절의 『나의 교리』, 곧 “바울의 교리”를 뜻한다. 바울이 그 밑의 12절에서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라고 한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갈 1:12) 받은 『나[바울]의 교리』대로 살고자 하면 누구나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바울은 그의 교리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딤후 3:10,11). 그뿐만 아니라 모든 순교자들이 성경이 주어진 “첫째 목적,” 즉 “교리”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폭스의 순교사>와 <피흘린 발자취>에 나오는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가르친 교리”에 따라 불경건과 세상 정욕들을 거부하고 신중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이 현 세상을 살아가려고 했기에(딛 2:12) 고난과 박해와 죽음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떤 성도였고, 그가 가르친 교리는 무엇이었는가? 요한복음 17장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사옵니다.』(요 17:16)라는 말씀으로 바울의 정체성을 계시한다. “아들”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신다면 “그분의 몸” 된 “교회” 또한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라고 명령하셨고(마 8:22), 바울은 그가 주님을 따른 것처럼 우리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한다(고전 11:1).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성별된 분이셨고, 사도 바울 역시 주님을 따라 세상에서 성별된 것이다. 『바울이 회당으로 들어가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니 석 달 동안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변론하고 설득시키더라.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완고하여 믿지 아니하고 무리 앞에서 그 도를 비방하니 그가 그들로부터 떠나서 제자들을 분리시켜 날마다 투란노 학교에서 토론하니라』(행 19:8,9). 이 일은 사도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때 소아시아 북부를 경유하여 에베소에 왔을 때 일어난 일로서(행 19:1), 우리는 여기서 한 “담대한 성별주의자”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바울은 “담대하게” 바른 교리를 전했다. 둘째, 바울은 완고하여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을 경우 그들로부터 “떠나” 제자들을 “분리시켜” 따로 가르쳤다. 셋째, 바울은 그렇게 분리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2년 동안 “꾸준히” 바른 교리를 가르쳤으며, 그로 인해 소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주 예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행 19:10). 그 일의 가장 큰 핵심은 진리를 “담대하게” 증거한 사도 바울이 그의 교리를 믿지 않고 비방하는 자들에게서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자기만 떠난 것이 아니라 바른 교리를 믿는 사람들까지 “함께 분리시켜서” “투란노 학교”라는 한 거점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계속 진리를 가르쳤다.

그렇게 성별되어 진리를 지속적으로 가르친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소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주 예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만일 믿지 않고 반박하는 무리들과 어떻게든 교제해 보려고 머뭇거렸다면 사도 바울의 교리와 사역은 빛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빛을 어두움에서 분리시켰더니 진리의 빛이 더 멀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분리”는 영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고린도후서 6장이 사도 바울의 “분리”가 무슨 의미였는가를 보여 준다.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가 불의와 어찌 관계를 맺으며 빛이 어두움과 어찌 사귀겠느냐?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어찌 조화를 이루며 또한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떤 부분을 같이하겠느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일치되겠느냐?... 그러므로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그들에게서 나와 따로 있고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4-17). 고린도후서 6:17의 “따로 있고(separate)”라는 단어는 사도행전 19:9에서 바울이 그 도를 비방하는 자들로부터 제자들을 따로 떼어놓을 때 사용한 “분리시켜(separated)”라는 단어와 같은 말이다. 헬라어로는 둘 다 “아포리조(ἀφορίζω)”로서 “경계선을 그어 서로 떨어져 있게 하다(to border off).”라는 뜻이다. 바울은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분리,” “의와 불의의 분리,” “빛과 어두움의 분리,” “그리스도와 벨리알의 분리,”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의 분리”를 말하고 있다. “불의,” “어두움,” “벨리알,” “우상들”과 어떤 부분도 함께할 수 없으므로 분리해서 나와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성경의 교리와 다른 것을 가르치는 자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 어떤 단체나 개인으로부터도 분리되어야 한다. 똑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정중한 말과 그럴듯한 언변으로』(롬 16:18)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로부터 분리되어 “그들에게서 떠나야”(롬 16:17) 한다. 각 지역에 우리만의 거점을 확보하고 그곳에서 바른 교리를 계속해서 가르치고 공부하여 진리의 빛이 지속적으로 확산되게 하는 것이 진리를 전파하는 성경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제자들을 분리시켜 가르친 바른 교리는 무엇인가? 그 “담대한 성별주의자”의 “교리”는 디모데후서 2:15이 밝혀 주고 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바울의 교리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해서 알아낸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이다. 이 교리는 성경을 시대별로 나누어서 알게 된 교리로서, 이처럼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않으면 성경은 모순투성이가 된다. 어디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고(엡 2:8) 어디서는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다고 한다(마 24:13). 어디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고(레 11:8), 어디서는 음식에 관한 규례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골 2:16). 어떤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시대별로 역사하시는 경영방침에 따라 해석하고 우리가 사는 “교회 시대”에 맞게 따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 세 부류로 나눠 다루시기 때문에(고전 10:32), 하나님께서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말씀하셨는가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성경이 풀리게 되는 것이다.

시편 118편에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라운 것이로다.』(시 118:22,23)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자칭 성경학자라는 자들이 그들의 교단 신학교들에서 『쓸데없다고 제쳐 놓은』(행 4:11) 교리가 바로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공부해 보면 그 교리는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라운』 교리임을 알게 된다. 비로소 성경이 밝히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으로 태어난 교회가 실행해야 할 교리는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이다. 이 성경적인 교리를 깨닫고 성별했다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해야 한다.

바른 교리를 공부했을 때 교회가 얻게 되는 유익은 “순결”을 지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신랑께서 신부인 교회가 셋째 하늘에서 그분 앞에 서게 될 날을 위해 말씀으로 신부의 “순결”을 유지하는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교회를 말씀에 의한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게 하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내서 점이나 주름진 것이나 또는 그러한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6,27). 성경에는 순결을 잃어버린 지역 교회가 나오는데, 바로 고린도 교회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한 남편』에게 정혼시켜 『한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했지만(고후 11:2), 그들은 “바울이 전파하지 않은” 『또 다른 예수』, 『또 다른 영』, 『또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 영적 간음을 저질렀다(고후 11:4). 『마지막 때에... 마귀들의 교리들』(딤전 4:1)과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히 13:9)로 영적 간음을 저지르지 않고 『한 순결한 처녀』로서 주님께 드려지려면,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로 무장하여 성경대로 섬겨야 한다. 그래야만 셋째 하늘에서 있을 『어린양의 혼인식』(계 19:7)에서 『성도들의 의』인 『정결하고 흰 세마포』(계 19:8)를 입고 주님의 순결한 신부로서 설 수 있게 된다.

성경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만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는 교회이다. 『지옥의 문들』(마 16:18)이 이기지 못하는 교회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해 주신 바로 그 교회이다. 바로 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아버지께 영광이 모든 시대들, 곧 끝없는 세상에 걸쳐 있게 하기 위함이다”(엡 3:20,21). 그 일은 다가올 끝없는 세상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진행 중이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들의 죽음”으로 교회를 낳으신 “아버지”께 “순결한 성별”과 “참된 경배”(요 4:24)로 나아가야 한다. 휴거될 때까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꾸준히 공부함으로써(딤후 2:15) “아들”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며(벧후 3:18)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휴거를 기다리며 천년왕국을 바라보는 참된 신약 교회의 모습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