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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에 대한 결단 (신명기 26-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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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6월호>
신명기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1-11장, 12-27장, 28-34장), 26-27장은 제2부의 마지막 부분이다. 신명기 제2부는 구체적인 율법 조항들로서,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백성들에게 그 율법을 지킬 것을 결단시키는 내용이다. 특히 27장은 그 땅에 들어갔을 때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라는 명령인데, 그것은 율법이 새 땅에서 시행된다는 엄숙한 선언이다.1. 새 땅에서의 율법 준수를 재차 강조하심 (26장)
(1) 새 땅에서의 첫열매 (26:1-1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 땅에 들어가면 첫열매를 드리라고 말씀하신다(2,10절). 그들은 지금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땅의 산물을 먹지 못했었다. 대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는데, 이로써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음식이었다. 그들은 사시사철 내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 가운데 그들이 친히 지은 농산물로서의 풍요로운 음식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때가 온 것이다. 첫열매란 앞으로 풍성한 추수가 지속된다는 전제 속에서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첫열매를 드리는 것은 땅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이스라엘은 새 땅을 차지한 후 첫열매들을 거두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정하실 곳”으로 가야 한다(2절; 참조. 12:5,11; 17:8; 18:6).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며, 제사장들의 섬김이 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 감사의 내용은 3-10절에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박해받을 때, 그들 “조상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7절)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어 이 땅을 주셨다는 내용이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이므로(3절), 약속의 땅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다. 그들이 첫열매를 바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언약의 백성임을 깊이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감사는 단순한 추수감사절 행사가 아니다. 이 감사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엄숙히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즐거운 축제가 될 것이다. 11절은 이 일로 인해 “너와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 거하는 타국인”이 즐거워하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배려하시는 두 대상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전임사역자들이고, 또 하나는 그 땅의 비천한 자들이다. 레위인들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일꾼에게 드리는 것이니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다름없다. 비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이 드러나는 것임과 동시에 “형제사랑”이라는, 율법의 중요한 정신이기도 하다.
(2) 십일조와 그 쓰임 (26:12-15)
본문에서는 십일조를 명하시는데, 그 십일조를 “레위인과 타국인과 아비 없는 자와 과부”를 위해 사용하라고 말씀하신다(12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돕는 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오해하는 구절이다. 많은 자유주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헌금으로 세상을 돕는 일을 많이 하는데, 이는 신약성경의 원리에 어긋난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신명기의 원리에 충실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본문을 오해하는 것이다.
본문은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다(12절). 율법에는 두 종류의 십일조를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는 “해마다” 드리는 십일조이고(14:22), 또 하나는 3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이다(14:28). 해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직접적으로는 레위인들을 위해 사용된다(민 18:24 참조). 그러나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뿐 아니라 그 땅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도 사용된다. 본문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되는 십일조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의 특별한 법이다. 앞선 장들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이스라엘은 한 조상으로부터 한 언약을 상속받은 “언약의 백성들”이다. 모두가 형제들이며,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특별한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누구도 불행해지기를 원치 않으시며, 그래서 모두가 서로를 형제애로 대해야 한다. 그 사상이 율법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하고 온전한 행위가 된다. 그래서 15절에서는 이러한 선한 행위를 한 것으로 인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복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형제사랑이라는 선한 행위로 유업의 땅을 굳게 지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님을 위한 선한 행위는 상과 유업을 받게 해준다. 그렇지 못할 때 상을 잃어버릴 수는 있지만,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반면 이스라엘은 율법을 어기면 그 땅에서 쫓겨나는 저주를 받게 된다. 이것이 구약의 신정국가인 이스라엘과 신약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다른 점이다.
(3) 율법 준수를 재차 명하심 (26:16-19)
모세는 레위기에 이어서 신명기에서도 모든 율법들을 다 말했다. 이제 그 결론이 내려진다. 결론은 역시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여 그것들[율법]을 준수하고 행할지니라.』(16절)이다. 율법의 준수는 언약의 이행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언약(covenant)은 비록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약속이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하나님과 백성, 쌍방 간의 의무 사항이 들어 있다. 백성의 의무는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무는 그 백성을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오늘 주 너의 하나님께서는 이 규례들과 명령들을 행하라고 명령하셨나니... 너는 그분의 모든 계명들을 준수해야 하리라』(16,18절). 이것이 이 언약에서 백성들이 행해야 할 의무 사항이다. 『그분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들보다 너를 칭찬과 명성과 영예로 높이시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를 주 너의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리라』(19절). 이것이 이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의무 사항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독특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지만(18절, 출 19:5), 아직 “칭찬과 명성과 영예”로 높이지는 않으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율법 가운데서 꾸준하게 하나님을 신뢰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역사를 통해 보건대, 이스라엘은 이러한 상태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이 약속을 스파냐 3장에서 다시 발견한다. 『그 때에 내가... 너희로 땅의 모든 백성 가운데서 명성과 찬사를 얻게 하려 함이라. 주가 말하노라』(슾 3:20). 이 일은 배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완전히 돌이키는 때인 재림 때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이와 같은 결론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염두에 둔 언약 체결이다.
2. 새 땅에서의 백성들의 결단 의식 (27장)
율법의 반포는 끝났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결단을 요구하셨고, 백성들은 굳은 의지로 모압 평지에서 카나안 땅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결단에 대한 구체적인 의식을 요구하신다. 이스라엘은 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겠노라고 엄숙한 선언을 해야 한다. 27장은 바로 그것을 명하는 장이다.
(1) 에발 산에 율법의 돌들을 세움 (27:1-8)
이제 모세는 큰 돌들에다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여 에발 산 위에 세워 두라 명한다(2-4절).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을 이루는 도구이다. 율법 준수에 따라서 언약이 이행되느냐 파기되느냐가 결정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가까이 두고 항상 읽어, 잊지 말라고 하셨다. 율법의 말씀을 손에 매고 눈 사이에 표가 되게 하며 집 기둥들과 대문들에 기록하라 하셨다(6:8,9). 향후 왕이 선임되면 왕은 율법책을 한 권 베껴서 항상 곁에 두고, 읽고 또 지키라 하셨다(17:18,19). 그리고 이제는 큰 돌들에 율법을 새겨서 에발 산에 세워 두라 하신다. 그것도 석회로 발라 단단히 고정시켜 놓으라 하셨다. 모든 백성 앞에 확실한 기념으로 세워 놓는 것이다.
또 하나, 그들은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아야 하는데, 그 제단은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 쌓여져야 한다(5절). 그곳에서 그들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것이다(6,7절). 희생제를 드린다는 것은 경배하는 것이요, 또 헌신하는 것이다. 특히 화목제를 드린다고 했는데, 화목제는 서원의 경우에 드린다. 이 경우엔 그들이 앞으로 율법을 잘 지키겠다는 서원이요 약속이다.
율법과 함께 경배가 드려진다. 율법은 곧 말씀이니,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하나님께 머리 숙여 경배함이 있어야 한다는 영적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에는 말씀 선포가 핵심이라는 사실도 보게 된다. 성도들이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에 따라 헌신하는 반응이 나타나야 한다. 말씀 앞에 결단과 헌신을 드리지 않은 성도는 예배 시간에 자리를 채운 것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제단을 세운 돌이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임을 주목해야 한다. 6절에서는 “온전한 돌덩어리들”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손에 의해 인위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돌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뤄야 한다는 영적 원리이다.
둘째, 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사실이다. 다니엘 2:45에서는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산에서 떨어져 나간 돌”을 보게 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을 말한다. 초림 때 세우신 영적 왕국이 아니라, 재림 때 이 땅을 실제적으로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시어 온 땅을 통치하실 것인데, 그때 이스라엘은 온전한 “제사장 왕국”이 될 것이며(출 19:6), “칭찬과 명성과 영예로 높여질” 것이다(신 26:19).
(2)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의 축복과 저주 (9-26절)
이스라엘은 에발 산에 제단을 세울 뿐 아니라,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해야 한다. 이 두 산은 세켐이라는 지역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서 마주보고 있는 산들인데, 여섯 지파(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칼, 요셉, 베냐민)는 그리심 산에, 다른 여섯 지파(르우벤, 갓, 아셀, 스불룬, 단, 납탈리)는 에발 산에 선다(12,13절).
세켐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아브라함이 칼데아 우르에서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거쳐 카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세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2:7).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첫 제단을 쌓았다. 아브라함이 카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난 곳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곳은 카나안 땅을 대표할 만한 장소가 분명하며, 율법을 반포할 만한 장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향후 남북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여로보암은 세켐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기도 하였다(왕상 12:25).
특이한 것은 여기 나타난 지파들은 원래의 12지파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레위 지파가 빠지고 요셉 지파가 에프라임과 므낫세도 나뉘어서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파별로 유업을 나눌 때의 경우이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선택된 지파이므로 별도의 유업이 없다. 또 요셉은 장자권을 받았기에(대상 5:1) 다른 형제들보다 두 배의 유업을 받아 두 지파로 분리된다. 하지만 본문은 지파별로 유업을 받는 장면이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는 장면이다. 이 경우에 레위 지파라고 특별할 이유가 없다. 레위도 모든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열두 지파의 구성원으로서 율법 준수에 대한 결단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누구나 예외가 없으며 어떠한 특권 계층도 없다.
14절부터는 두 산에 마주 선 이스라엘 지파들이 율법에 복종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레위인이 선창하고 모든 백성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형식을 이루고 있는데, 레위인은 다른 지파들과 함께 동일한 자리에 서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일을 주도하는 것은 레위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역자들에게도 동일하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데에는 다른 성도들과 동일하지만, 일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특별한 위치에서 성도들을 이끌게 된다.
15절에서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16절에서는 아비와 어미를 천히 여기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17절은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를 저주한다.
18절은 소경에게 길을 헤매게 하는 자를 저주한다.
19절은 타국인과 아비 없는 자와 과부의 재판을 왜곡하는 자를 저주한다.
20-23절은 극악한 성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저주한다. 주로 근친이나 수간에 대해 경고하는데, 이처럼 카나안의 성적 범죄는 극에 달했으며(레 18장), 이는 우상 숭배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범죄이다.
24절은 이웃을 은밀히 치는 자를 저주한다.
25절은 뇌물을 받고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자를 저주한다.
26절은 마지막으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려고 확정하지 않는 자”를 저주한다. 즉 말씀 행하기를 거절하는 자이다. 잠언 28:9에서는 『율법을 듣는 데서 귀를 돌이키는 자는 그의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리라.』고 말씀한다. 누구라도 죄를 범할 수는 있지만, 그 죄를 지적하는 말씀 자체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다.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한 성도는 비록 죄를 지어도 돌이킬 수 있지만,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은 비록 도덕적인 죄들을 짓지 않는다 할지라도 멸망하게 된다. 그의 모든 길이 죄이기 때문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