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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버림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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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2월호>
소위 “TULIP”으로 불리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는 극단적 칼빈주의의 특징들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비록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주의에는 5대 교리 외에도 수 천 개의 교리들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 자신도 TULIP을 제외하고는 칼빈주의에 관해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TULIP 중에서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의 교리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며, 다른 교리들의 중심이 된다.그러나 전적타락(Total Depravity)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의 교리에는 전혀 이견을 보이지 않던 칼빈주의자들이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에 이르러서는 타락전 선택론(Supra- lapsarianism)과 타락후 선택론(Infra- lapsarianism)으로 대립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들을 선택하신 때가 아담의 타락 이전인지, 아니면 아담의 타락 이후인지로 나뉜 것이다. 이 차이점은 바로 아담의 타락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는가, 아니면 단순히 허용하셨는가의 차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이 하나님께 책임이 있느냐, 아니면 아담에게 책임이 있느냐 하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관점이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타락전 선택론은 구원받을 자들의 선택(election)과 저주받을 자들의 버림받음(reprobation)의 두 가지 모두를 하나님께서 소위 ‘주권적 판결’로 정하셨다고 주장하기에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 불린다.
이에 반해 타락후 선택론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이미 모든 사람의 운명은 지옥으로 버림받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일부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히 그들의 행위에 따라 지옥으로 저주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전 선택론의 문제는 “버림받음”의 교리에 있는 것이다. 지난 호(44호)에서 살펴보았듯이 “버림받음”이라는 성경의 표현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지옥으로의 버림받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처럼 버림받음이란 단어 자체가 성경에서는 전혀 칼빈주의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칼빈주의자들은 계속 버림받음이라는 이상한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가?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심판이나 정죄를 다루는 모든 구절을 인용하여 버림받음의 교리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버림받음의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잘못 사용되는 성경 구절들을 신약에서 몇 가지 살펴보자.
『또 실족하게 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느니라고 하였으니 곧 불순종함으로 말씀에 실족하는 자들에게니라. 그들은 또한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것이라』(벧전 2:8)
칼빈주의자 핑크(Pink)의 사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렇게 되기로’라는 표현은 그 구절의 앞 부분에 있는 ‘실족함’과 ‘그들의 불순종’을 나타낸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불순종으로 정하셨음을 확증해 주고 있다.” 워필드도 불순종하는 자들의 실족함은 그들이 불신앙으로 정해진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고 덧붙였다. 이 해석들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면 칼빈주의자들은 즉각 방어 태세를 취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칼빈주의자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는 말씀 앞에는 복종하지 않으며, 왜 『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2)라는 말씀을 믿지 않는가?
워필드와 핑크는 실족하게 하는 돌에 관한 주석을 감추어 버린다. 돌은 곧 이스라엘의 돌(창 49:24)이며, 모퉁이의 머릿돌(시 118:22)이며, 시온에 기초를 두신 시험받은 돌(사 28:16)이다. “실족하게 함”에 관한 참조 구절은 이사야 8:14, 마태복음 21:44, 로마서 9:33 등이다. 또한 순종이 로마서 10:16에서 믿음으로 정의되었듯이, “불순종”이란 본문에서 믿음의 반대인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벧전 2:7). 성경에서 “누구든지 믿는 자는”이란 표현이 실족하게 하는 돌과 연관되어 나타난다(사 28:16, 롬 9:33)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즉 아무도 그가 믿고 있는 한 실족하도록 정해지지 않았다(롬 9:32).
어떤 사람이 “파멸되기로 정해진”(잠 31:8) 것은 항상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어떤 사람들에게 미혹의 역사를 보내실 것이다(살후 2:11-12). 여기에도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진리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살후 8:10). 심지어 핑크도 이와 같이 올바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때에 유대인들이 그분의 증거를 무시하고 그 결과로 그들의 눈이 가려진 것처럼, 범죄한 기독교계가 진리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미혹의 역사’를 보내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실 것이다.”
아무도 세상의 기초 이전에 실족함이나 멸망이나 저주로 정해지지 않았다.
베드로후서에서 우리는 “버림받음”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칼빈주의자들이 심하게 왜곡시킨 두 구절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잡혀서 멸망케 된 본성이 잔인한 짐승 같아서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다가 그들 자신의 타락 가운데서 완전히 멸망하게 되리라』(벧후 2:12).
『이들은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다니는 구름이니 이들을 위하여 흑암의 안개가 영원히 간직되어 있느니라』(벧후 2:17).
핑크를 비롯한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 방법을 거부하고 사적인 해석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잡혀서 멸망케 된 본성이 잔인한 짐승”을 “버림받은 자”로 만드는 것이다. 핑크는 우리에게 이 사람들이 언제, 왜 멸망으로 정해졌는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 구절만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어떤 짐승도 그것이 “잔인한 짐승”이 아닌 한 멸망당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도 그가 “죄의 삯”(롬 3:23)과 “불의의 대가”(벧후 2:13)를 받지 않는 한 멸망당하지 않는다.
본문의 상대 구절은 유다서 10절로, 이 잔인한 짐승들은 “자신들을 부패시키고” 있다. 베드로후서 2:12의 버림받음을 증명하기 위한 열심 때문에 거의 모든 칼빈주의자들은 17절을 무시하고 만다. 누가 “깊은 흑암”으로 예정되어 있는가? 선택되지 않은 자들인가? 버림받은 자들인가? 성경에 의하면 주님을 부인하고 “그들 스스로 신속한 파멸을 초래하는”(벧후 2:1)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이다. 또한 주님을 부인하고 “자신들을 더럽힌”(유 10,13) 불경건한 자들이다. 죄를 지은 천사들(벧후 2:4, 유 6), 불의한 자들(벧후 2:9), 악인(욥 21:30) 등이 똑같이 “예정되었다.” 심지어 지구도 심판의 날에 불로 심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벧후 3:7).
『이는 어떤 사람들이 몰래 들어왔기 때문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정죄를 받기로 미리 정해진 자들이며 경건치 않은 자들이라.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어 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니라』(유 4).
핑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영원한 판결에 의해 세상의 기초 이전에 정죄받기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핑크가 말한 것이 옳다면 언제, 왜, 어떻게 그렇게 정해졌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 핑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대답은 본문에 있다. 『아담의 칠 대 손 에녹도 이들에 대하여 예언하여 말하기를 “보라, 주께서 수만 성도들과 함께 오시나니 이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그들 가운데 있는 경건치 않은 모든 자가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에 대하여 정죄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였느니라』(유 14,15). 하나님께서 “기록된 판결을 그들에게 시행하게 할”(시 149:9) 날이 올 것이다. 칼빈주의자가 정의한 대로 버림받음을 믿는 베이커(Baker)도 “유다서 4절은 버림받음을 입증하는 구절이 될 수 없다.”고 명백히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저버린 상태로 만들지 않았다고 해서 사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전지하시고 무소부재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어떻게 되실지 아신다. 『주의 눈은 어느 곳에서나 악한 자와 선한 자를 살피시느니라』(잠 15:3). 하나님께서는 사악함을 기억하시고(호 7:2), 사람의 말(마 12:36)과 비밀(롬 2:16)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사람을 사악하게 만들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사악함에서 돌아서는 누구라도 받아들이신다(겔 33:19).
『그가 말씀하시기를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들으나 깨닫지 못할 것이요, 참으로 너희가 보나 알지 못하리라.’ 하라. 이 백성의 마음으로 살지게 하고, 그들의 귀로 둔해지게 하며, 그들의 눈으로 감기게 하라. 그리하여 그들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며, 회심하지도 못하고, 치유받지도 못하게 하라.” 하셨더라』(사 6:9-10).
이 예언은 신약에서 4번이나 인용된다(마 13:14-15, 요 12:39,40, 행 28:15-27, 롬 11:7-8). 여기서 “이 백성”은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며, 그들의 눈이 감기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며, 그것은 백성이 이미 태어난 후에야 일어나는 일들이다. 10절에서 “그리하여... 못하게 하라”(lest)의 의미는 이 백성의 운명이 무조건적 판결에 의해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버림받음의 판결은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받지는 않았고, 이 백성에 이방인은 포함되지 않으며, 눈을 감는 것은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은 오히려 버림받음의 칼빈주의적 가르침을 반대하는 좋은 구절이 될 수 있다.
이 예언이 인용된 네 번 중에 두 번만이(마 12:14-15, 행 28:25-27) 버림받음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었다.
『주께서 그처럼 많은 기적들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들이 주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이루려 함이라. 그가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을 누구에게 나타내 보이셨나이까?” 함이요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말하였으되 “그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나니,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마음으로는 깨닫지도 못하며 회심하지도 못하게 되어 나로 그들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요 12:37-40).
핑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본문을 언급하지만 그의 요한복음 주석서에서는 그와 반대로 말함으로써 바르게 주석하고 있다. “요한복음 12:37에는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말하며, 39절에는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 두 진술의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셔서 이제 그들은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잘못은 전적으로 그들의 것이고, 이제 그들은 그들의 사악함의 결과를 겪어야만 한다.” 핑크는 TULIP의 향기에 취해 있을 때 보지 못하던 것을 이제 말씀을 대면하면서 정확한 성경의 해석 앞에서 깨어나 보게 된 것이다. 이 이사야의 예언이 네 번 언급되는 것을 보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이 그들의 메시야를 거부하고 신비적인 형태의 왕국이 계시된 때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주께서 공적 사역을 끝마치실 때와 연관해서 인용되었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교회시대 동안 이방인에게로 향하신 것과 연관하여 바울에 의해 언급되었다. 또 이사야에 있는 근본적인 인용 구절은 유대인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대환란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사야의 인용구는 전혀 버림받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직 성경을 거부하는 칼빈주의자의 눈에만 한 민족의 눈먼 것이 개인적인 버림받음이라고 간주될 뿐이다. 물론 이 구절이 교리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될지라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칼빈주의의 “버림받음”의 교리로 가져오는 것은 사사로운 해석이 될 뿐이다. 마귀는 믿지 않는 자의 마음을 가려버린다(고후 4:4).
『기브온 거민 히위인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을 맺은 성읍은 하나도 없었으며 그들이 다른 모든 성읍을 싸워서 취하였더라.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분은 주이시니, 그들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오게 하셨으며 그가 그들을 완전히 멸하시고 그들로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고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그대로 그들을 멸하신 것이더라』(수 11:19-20).
핑크는 당신으로 하여금 이 구절의 “완악함”이 어떤 환경도 고려되지 않은 임의적인 것이라고 믿도록 한다. 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어 그들을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당하게 하시는가? 이것은 영원한 버림받음인가? 주권적인 판결인가? 하나님의 선한 즐거움인가? 아니다. 민족들의 죄와 부패가 그것에 대한 유일한 이유이다.
하나님은 왜 그 민족들이 멸망하는지를 분명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신다(계 18:24-25). 그들은 근친상간(레 18:6)과 간음(레 18:21)과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레 18:21)과 동성애(레 18:11)와 동물과의 혼음(레 18:23) 등의 죄를 저질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들을 아주 싫어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강력한 파멸로 멸망시키겠다고 하셨다(신 7:23). 그러나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들 역시 다른 나라들과 같이 멸망한다(신 8:20). 결국 아무것도 영원 전에 정해지지 않았고, 모든 것은 조건적이다. 성경에는 이유와 목적 없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완악하게 하시는 경우가 없다. 하나님은 헤스본 왕 시혼을 완악하게 하셨는데(신 2:30), 시혼은 헤스본에서 아모리 족속의 왕이었으며(민 21:25) 아모리 족속은 거짓 신들을 섬겼다(출 34:15).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들의 형상을 부술 것을 명령받았고(출 34:13)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령받았다(신 7:2). 더욱이 완악케 하는 것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후에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의 마음을 완악케 하셨다(사 63:17).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막 6:52; 8:17). 그들이 버림받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가? 그들은 결코 영원한 버림받음의 위치에 처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