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공부 A to Z 분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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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12월호>

장준익 / 솔로몬성경연수원 강사


성경 공부 A to Z


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마태복음 7장은 왕국 헌법인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며, 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이전에 왕국을 기다리던 유대인 청중에게 말씀하신 설교이다. 5장에서는 왕국의 규례들을 말씀하셨고, 6장에서는 왕국으로 들어갈 때까지 유대인들이 겪어야 할 일들과 행해야 할 일들을 말씀하셨으며, 7장에 와서는 왕국 헌법의 다양한 규정들을 선포하셨다. 7장의 말씀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잘 아는 유명한 말씀들인 반면에 그 교리적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고 남용되는 경우도 많아, 정확히 알고 바르게 적용하는 데 주의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어떻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마.’라고 네 형제에게 말할 수 있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뽑아 내라. 그러면 네가 밝히 보고 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리라』(마 7:1-5).


본문은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나 미덕으로 사용될 수 있는 구절이지만, 이것을 지나치게 적용하여 진리를 가지고 오류를 판단하는 것조차 “비판”이라고 여기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라는 말씀대로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고전 2:13). 이 영적인 사람의 모든 판단은 “성경”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을 수 있다(고전 2:15). 왜냐하면 성경을 근거로 하여 판단하는 영적인 사람을 역으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근거로 삼은 성경을 판단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영적인 사람을 가르칠 사람도 없는 것이다(고전 2:16). 이처럼 영적인 사람은 어떤 일에 있어서도 사람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


마태복음 7:1의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이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 두 말씀이 서로 다른 경륜(또는 세대)에서 적용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태복음 7:1은 왕국 시대의 백성들과 관련된 말씀이고, 고린도전서 2:15은 교회 시대의 성도와 관련된 말씀인 것이다.
『위선자여, 먼저 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뽑아 내라.』(마 7:5)에서 자기 눈의 들보를 뽑아내야 할 “위선자”는 산상설교와 복음서 전체에서 특별한 대상을 지칭한다. 마태복음 7장의 첫머리에 언급된 “판단”의 문제는 거짓 선지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위선자”는 예수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을 책망하실 때 자주 사용하시던 표현이다(마 6:2,5; 23:13-15,23,25,27,29). 주님께서는 특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 같은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판단하고 재판하는 것을 자기들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백성들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려는 행위로 보셨다. “판단”과 관련된 산상설교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적용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 찔림을 주었을 것이다.
판단의 문제는 왕국뿐만 아니라 그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할 대환란 때의 구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믿고 끝까지 인내해야 할 대환란 기간에 다른 유대인 형제들을 판단하고 그들을 “원망하는” 유대인은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원을 상실하기 때문이다(약 5:7-11).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5절의 “위선자들”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계신다. 6절의 “개들”과 “돼지들”은 베드로후서 2장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며, 급격한 파멸을 스스로 불러들이느니라... 그러나 참된 잠언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이니 “개는 그 자신이 토해 낸 것으로 다시 돌아가고 또 돼지는 씻고 나서 그녀의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였도다』(벧후 2:1,22).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6에서 “개들”과 “돼지들”을 언급하신 뒤 “15-21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다루심으로써 그분의 설교가 이스라엘 내의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 특별히 맞춰져 있음을 계시하신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재림 때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21절). 그들을 가리키는 “약탈하는 이리들”(15절)은 “갯과”의 짐승으로, 베드로후서 2장에서 거짓 선지자가 개에 비유되는 것과 일치한다. 돼지는 거짓 교사를 가리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이는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자는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기 때문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느냐?』(마 7:7,8,11)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극적인 기도”의 모범으로 가르쳐지고 있지만, 본질상 구약적인 기도이다. 왜냐하면 기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요 16:23,24). 따라서 이 기도는 산상설교에 포함된 소위 “주기도문”과 동일한 관점, 즉 왕국 직전의 왕국 백성에게 제시된 기도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거기서 “너희”라는 말이 강조되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너희 아버지,” 곧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께 기도하기 때문이다.


위의 기도는 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올바로 기도한다면, 이 기도의 모형은 신실하신 주님께 드리는 기도의 아주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구하며(빌 4:6),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면서(살전 5:17), 적극적으로 찾고 문을 두드린다면 결국 찾게 되고 응답의 문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점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르지 않다. 그분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점 역시 기도의 동일한 원칙이다. 다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하며 그러할 때 응답받는다는 데 그 차이점이 있다. 『또 말에 있어서나 행실에 있어서나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 3:17).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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