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비유들 분류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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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6월호>
청지기란 주인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관리인을 말한다.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은 포티발의 집에서 『그의 집을 관리하는 관리인』(창 39:4)이 되었는데, 그의 아내를 제외한 모든 것이 요셉의 관리하에 맡겨졌다.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보소서. 나의 주인이 집 안에서 내가 하는 일은 아는 체를 아니하고,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그가 내 손에 맡기셨으니, 이 집에 나보다 더 큰 사람은 없으며 당신말고는 나에게 아무것도 금한 것이 없으니 이는 당신이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데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더라』(창 39:8,9). 이런 요셉 같은 사람이 주인 몰래 불의를 행하지 않는 신실한 청지기이다.집주인이 청지기에게 바라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청지기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이라』(고전 4:2). 청지기에게 요청되는 것은 첫째도 신실함이고 둘째도 신실함이다.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남몰래 부정을 저지르는 자에게 누가 자기 재산을 맡기겠는가? 청지기가 집주인의 재산을 관리할 때는 언제나 집주인이 제시한 관리지침을 따라 신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감독, 곧 목사를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른다(딛 1:7). 목사에게는 신비들이라 불리는 성경의 진리들이 맡겨져 있으며 그것을 신실하게 관리하며 전파해야 한다(본지 「성경 공부 A to Z」 코너의 “하나님의 경륜을 통해 본 일곱 신비”를 참고하라). 목사뿐 아니라 성도들도 “각자 하나님께 받은 은사”의 청지기로 부름받았다. 『각 사람이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섬기라』(벧전 4:10). 그리스도인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령님의 뜻에 따라 주어진다(고전 12:4-11).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에 따라 가진 은사들이 다르니 예언이면 믿음의 분량대로 예언하고 또 섬김이면 섬기는 일로, 또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또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지도하는 자는 근면함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않고(딤전 4:14)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서 서로를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한다. 자기의 은사로 신실하게 섬긴 청지기는 주님께서 오실 때 큰 복을 받는다. 『주인이 자기 집을 다스리게 하여 제때에 그들에게 양식을 나눠 줄 신실하고 현명한 청지기가 누구겠느냐? 그의 주인이 와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볼 그 종은 복이 있도다』(눅 12:42,43). 자기의 은사로 교회를 세우는 데 기여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때 책망과 수치를 면치 못한다.
누가복음 16:1-13에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온다. 『또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떤 부자가 한 청지기를 두었는데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비난이 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너에 대하여 이런 소문을 들었는데, 어찌된 일이냐? 네가 청지기를 더 이상 못하리니 네 청지기직을 청산하라.’고 하더라』(1,2절). 이 말씀에 언급되는 청지기는 자기 주인의 재산을 맡은 종으로서 그 집안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불의를 행하여 청지기직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 사람이 가지고 있던 직업을 놓치면 당장 수입이 없어져서 곤란해진다. 직업을 잃는다는 것은 큰 곤경에 처하는 일이다. 바로 이 청지기의 고뇌를 보라.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일굴 수도 없고 구걸을 하자니 부끄럽도다』(3절). 그가 땅을 일굴 수 없다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기에는 몸이 몹시 허약하다는 점을 뜻할 수 있는데, 문제의 본질은 그 다음 내용에 있다. 『구걸을 하자니 부끄럽도다.』 이 청지기가 가지고 있는 진짜 문제는 “자존심”이었다. 그는 육체노동을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아깝고, 구걸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도 상했던 것이다. 사실 직업은 사회적 지위를 갖기 때문에 한 집안의 청지기로서의 위치를 상실했을 때는 그와 대등한 직업을 구하지 않는 한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관리자”로서의 직업을 잃고 다른 험한 일을 찾아야 할 때 입는 상처와 같다.
졸지에 무직 신세가 되어야 할 청지기가 “무릎을 탁 치며” 생각해 낸 방안은 아직 청지기로 있을 때 주인의 채무자들의 빚을 줄여 주는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될는지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내가 청지기직에서 해고된 후에도 사람들은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맞아 주리라.’고 하고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모두 불러 첫 번째 온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주인에게 빚진 것이 얼마나 되느냐?’고 하자 그가 말하기를 ‘기름 일백 말이라.’고 하니, 빚진 자에게 말하기를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서 오십이라 쓰라.’고 하니라. 또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는 빚진 것이 얼마나 되느냐?’고 하자, 그가 말하기를 ‘밀 일백 말이라.’고 하니 그에게 말하기를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고 하니라』(4-7절). 청지기는 이렇게 하면 자신에게 신세를 진 채무자들이 청지기직에서 해고된 자기를 받아줄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 전에 『빨리』(6절) 그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사실 불의한 청지기가 벌인 일은 주인의 돈을 “여전히” 제멋대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해고 원인”이었다. 그런데도 주인은 오히려 청지기가 “상황을 현명하게 처리했다”고 칭찬을 한다. 이것은 정직과 신실의 차원이 아닌 “세상적 지혜”를 칭찬한 것이다. 아마도 주인은 심성이 넉넉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으리라.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가 깎아 준 빚을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게 생각한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지기의 행동에 대해서 『이 세상의 자녀들이 그들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하셨다(8절). 악한 현 세상의 자녀들은 소위 “잔머리”를 쓰는 데 있어 빛의 자녀들보다 뛰어나다. 빛의 자녀들은 잔머리를 굴려가면서 인생을 사는 데 익숙지가 않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가장 어려운 내용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너희가 죽을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들로 영접하리라.』(9절)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영원한 거처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다. 불의의 재물로 사귀는 친구들과의 관계는 인생이 끝나면 끝이다. 우리가 재물로 누군가를 사귀는 데는 그런 한계가 있다. 주님의 뜻은, 돈으로 사귄 친구들이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우리를 받아준다는 것이다. 내가 돈이 있을 때 그 돈으로 친구들을 사귀면 내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때 그 친구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소유한 돈으로 남은 생애 동안 우리를 돌보아 줄 친구들을 사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베풀면” 친구가 생긴다! 결코 주님은 돈에 대해 예찬하신 것이 아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깨닫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비유 속에 “대조적인” 표현들이 있다는 점이다. 『지극히 작은 일에 신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신실하며, 또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하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불의한 재물로도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 신용에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 자신의 몫을 주겠느냐?』(10-12절) 비유 속의 대조적인 표현들은 『신실한 사람』(10절)과 『부정한 사람』(10절)이 그 기본 골격이다. 『지극히 작은 일』(10절, “돈”)과 『큰 일』(10절, “하나님의 일”)의 대조는, 신실한 사람이 지극히 작은 일과 큰 일 모두에 신실한 반면, 부정한 사람은 그 두 가지 일 모두에 부정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말한다(10절). 그뿐 아니라 『불의한 재물』(11절, “돈”)과 『참된 재물』(11절, “하나님의 것”)의 대조도 보인다. 『그러므로 너희가 불의한 재물로도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 신용에 맡기겠느냐?』(11절) 이 말씀은 우리가 “불의한 재물”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일할 때 신실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재물”과 같은 그분의 일을 맡기실 수 없다는 뜻이다. 비록 세상 학업과 직업이라 해도 그 일에 열심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 근면함의 근성을 발휘해서 주님의 일을 열심히 수행한다.
12절에서 보이는 『남의 것』(12절, “하나님의 몫”)과 『너희 자신의 몫』(12절,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받을 보상”)의 대조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우리에게 주어질 보상을 다룬다. 즉 『너희가 남의 것에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 자신의 몫을 주겠느냐?』(12절)라는 말씀에는 지상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에 신실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 자신의 몫인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세상에서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게 행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 주님의 요지는, 만일 우리가 (돈과 같은) 작은 일에도 신실할 수 없다면, (돈과 관련되지 않은) 『참된 재물』(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믿고 맡기시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일을 맡기시기 전에 작은 일들에 관해 시험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실 것이다. 셋째,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청지기로 삼으셨고 이곳 지상에서 그분의 것들 중 일부를 책임지고 맡게 하셨다. 그것으로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면 하늘나라에서 그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 자신의 몫”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교훈은 비유의 최종 결론인 13절에 있다. 『어떤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존중하고 다른 쪽을 경시하게 됨이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시더라』(13절).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돈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고, 돈을 벌기 위한 생업에 열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돈을 얼마를 벌고 그 돈으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돈보다 우위에 모시는, 그분을 첫째로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