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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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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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2월호>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시작부터 분명하게 말한다. 만약 세상에 당신이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한 사람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언젠가 한 젊은이가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여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그에게 소리쳤다. “이 바보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 말을 들은 거리설교자가 대꾸했다. “그렇소. 나도 내가 부끄럽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진 않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시인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게 모르게 그분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쉬 알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가장 큰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세태에 대해 개탄하며 그 이유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 이유는 정부와 정부의 위협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럭크만 씨, 한 개인이 거대한 정부를 대적하기는 무리예요!” 그러나 당신은 저항해야 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원했을 때(삼상 8:5)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을 백성들이 앞장서서 폐위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무엘이 주 하나님께 가서 온밤을 기도하며 지새우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그들에게 왕을 세워 주라. 그러나 어떤 종류의 왕이 될 것인지 분명하게 단언하라(protest)!”라고 하셨다(삼상 8:7-9). 사무엘은 일어나서 백성들에게 갔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행했다. 유럽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조상들이 무엇이라고 불렸는지 아는가? 그들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로마카톨릭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좋아하게 하려고 행동하지 않았고 “그것이 틀렸소!”라고 말한 것이다. 당신도 그러해야 한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라 불렸고, 이름 그대로 저항했다. 당신은 “럭크만, 그런다고 대세를 멈출 수는 없소!”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반대하여 저항하라(pro- test)”고 명령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호세아, 에스겔, 다니엘, 요엘, 아모스, 하박국 등의 구약 선지자들이 수행한 일이다. 그들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배교를 막을 수는 없었다. 느부캇넷살왕이 유다를 차지하자 그들도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교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해도 끝까지 싸워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그처럼 저항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더 이상 시인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에게 더 이상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TV에서 데이비드 레터맨이나 자니 카슨을 보고 있는데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런 쇼 진행자들은 죽고 사라졌지만, 당신이 그런 쇼 프로그램이나 보고 있다면 어떻게 진정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척 스윈돌이나 돕슨 박사와 같은 자들이 하는 설교를 듣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그들은 아마추어 심리학자일 뿐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으면서 하루 종일 당신과 당신의 문제에 대해 말하며 당신이 계속 자신과 자신의 문제들만 생각하도록 키질한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내가 말하는 “확신”은 당신이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신념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그렇게 믿는 바가 있었다. 바울은 사형 제도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행 25:11). 바울은 “나는 사형 제도를 확실히 믿는다. 내가 사형을 당할 만한 일을 했다면 내가 직접 사형을 당하겠소!”라고 한 것이다. 이게 바로 “확신”이다.

『그런 연유로 내가 이러한 고난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믿은 분을 알고, 내가 위탁한 것을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확신이 없다. 세상에 시달리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보통의 은사주의 교회가 가진 확신은 플로리다주의 구원받지 못한 정치인이 가진 확신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잘해 줘서 사람들이 당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정치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친근하고, 친절하고, 활달하며, 사려 깊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이 전혀 아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시인하지 않으면 나도 너를 시인하지 않겠다. 네가 나를 부끄러워하면 나도 너를 부끄러워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대형 은사주의 집회가 성행하고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가도 실제로 확신은 갖지 못한다. 더군다나 이들은 자신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확신이 있는가? 나는 있다! 『내가 믿은 분을 알고, 내가 위탁한 것을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나는 하늘에 유업이 있고 나를 위해 예비된 저택이 있음을 확신한다. 나는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몸의 구속을 이뤄 주실 그날을 고대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다(벧전 1:5). 나에게는 확신이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정결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조심할 것이니이다』(시 119:9).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에 시간을 쓰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지 못한다. 성경에 시간을 쓰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자동차가 쌩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옷에 진흙이 튀어 버렸다. 그는 친구에게 “뭐 별로 안 튀었네!”라고 말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가로등 아래로 가서 불빛에 비춰 보니 엄청나게 많은 진흙이 튀어 있었다. 그는 놀라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러운데!”라고 했다. 무슨 차이냐고? 빛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신이 성경에 시간을 쓰면 성령님께서 빛을 비춰 주신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성경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만약 성경에 시간을 투자한다면,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 것이다. 또한 자신이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입을 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조명과 책망을 받을 것이다. 우리 구주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성읍이 숨겨질 수 없느니라』(마 5:14). 주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유일한 빛은 “성경”과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인들”밖에 없다.

세상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음행하고 간음하고 도박하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고 복음 전파하기를 거절한다. 혼들을 이겨오거나,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부담을 가지길 싫어한다. 선교 헌금보다 자신의 애완견 음식과 낚시 장비를 꾸리는 데 더 많은 돈을 쓴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사는데 어떤 왕국이 임할 수 있겠는가? 정말 끔찍한 왕국이 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더 이상 확신이 없다. 확신은 성경에 시간을 쓸 때 생긴다. 성경에 시간을 쓰라. 그러면 확고한 확신을 얻게 될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전하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혹자는 “서둘러서는 안 되죠. 성경에서도 ‘믿는 자는 다급하게 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잖아요.”라고 할 것이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려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이집트를 떠날 때, 발에 신을 신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 움직일 준비를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 나아가 구원받는 일은 아무리 빨리 해도 절대 빠른 것이 아니다. 당신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언제라도 행동에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는 에서를 만나려고 달려갔다. 리브카가 성령님의 예표인 엘리에셀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했는가? 그녀는 그의 낙타를 먹이려고 달려갔다. 아브라함이 그를 찾아온 세 사람에게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는 달려가서 송아지 요리를 준비하게 했다. 삭캐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자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는 달려가서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서둘렀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서두르는가? 그분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려고 서두르는가?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려고 서두르는가?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길 원하며 그 목적을 위해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외에 다른 모든 일은 서두른다. 생계를 꾸려 가려고 서두르고, 차를 사려고 서두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서두르는가?



넷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 마지막 이유는 그들이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겸손하지 않다고 말할 때 나는 주로 미국인들을 생각하며 말하는 것이지만 유럽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해외에 가면 인상적인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복음 전도지를 나눠 주면 사람들이 겸손하게 전도지를 받아 쥐는 모습이다.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이러한 경향은 특히 미국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인도나 필리핀 같은 곳에 가 보면 사람들이 겸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겸손하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만 아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미국인들은 더 이상 겸손하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대단하다고 자만하는 미국인도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었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지옥에 있을 것이다.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니 이는 만민에게 동일한 주께서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심이라』(롬 10:12).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위대하고, 강하고, 높은 집안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러나 위대하고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데, 자신의 통치가 끝나기 전에 빅토리아 여왕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구주께서 내가 영국의 여왕으로 있는 동안 오시기를 바란다. 그러면 내가 왕관을 벗어서 주님의 발 앞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당신은 교황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 “주님, 주님의 은혜로 저를 도우셔서 제가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저는 주님을 이전보다 더 많이 시인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게 주님을 시인할 기회를 주십시오!”

나 피터 럭크만은 그리스도인이다. 나의 가족, 나의 건강, 심지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았다. 나는 주님께 모든 것을 빚진 사람이다. 내게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중요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이 정말 누구를 믿는 사람인지 사람들이 당신의 입장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하라!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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