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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년’과 ‘삼 년’의 차이 /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으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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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2월호>
‘칠 년’과 ‘삼 년’의 차이Q
「성경에서 큰 차이를 발견해서 질문합니다. 사무엘하 24:13에는 칠 년간의 기근이라고 나오는데, 역대기상 21:11에서는 삼 년간의 기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인데 왜 서로 다른지 궁금합니다.」
A
먼저 질문하신 구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24:13은 다음과 같습니다. 『갓이 다윗에게 와서 그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왕께, 곧 왕의 나라에 칠 년간 기근이 오게 하리이까? 아니면 왕의 원수가 왕을 추격하는 동안 그들 앞에서 삼 개월간 도망하시겠나이까? 아니면 왕의 나라에 삼 일 동안 전염병이 있게 하리이까? 이제 나를 보내신 분께 내가 무엇으로 답변해야 할지 생각해 보소서.” 하니』 반면 역대기상 21:11,12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갓이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나이다. ‘삼 년간의 기근이든지, 아니면 적 앞에서 석 달간 패하여 네 원수들의 칼에 쫓기든지, 아니면 주의 칼, 즉 전염병이 삼 일 동안 이 땅에 만연하여 주의 천사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것인지 너는 택하라.’ 그러므로 이제 내가 나를 보내신 분께 무슨 말을 다시 전해야 할지 숙고하소서.” 하더라.』
질문하신 것처럼 사무엘하 24:13은 “칠 년간의 기근”을, 역대기상 21:11,12은 “삼 년간의 기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성경을 주의 깊게 읽고 찾아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24:13은 『왕의 나라에 칠 년간의 기근을 오게 하리이까?』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왕의 나라에”라는 표현을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역대기상 21:12에서는 “왕의 나라에”가 없이 그냥 “삼 년간의 기근이든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7년이라고 말한 것과 3년이라고 말한 것이 각기 다른 기준에 따라 제시된 것임을 알려 줍니다. 또한 다윗이 주께로부터 받을 죄의 대가로 어떤 처벌을 받을 것인지 최종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한 번이 아니라 적어도 두 번은 다윗에게 각각 다른 연수로 말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해 주는 말씀들이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사무엘하 21:1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후 다윗의 때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간 기근이 있어, 다윗이 주께 물으니라.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기근은 사울과 피흘린 그의 집 때문이니, 이는 그가 기브온인들을 죽였음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대로 다윗의 때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간 기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갓이 다윗에게 말한 “삼 년간의 기근”(대상 21:12) 이전에 이미 다윗이 통치하는 중에 계속되고 있었던 기근이었습니다.
둘째, 사무엘하 21:1-10의 말씀에 따르면, 이미 있었던 “삼 년의 기근”이 있게 된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데 적어도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 기근은 사울과 피흘린 그의 집 때문이니, 이는 그가 기브온인들을 죽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0절에 보면, 다윗은 기브온인들이 그 대가를 돌려받도록 그들에게 사울의 아들들을 넘겨주고 그들이 죽임을 당하게 하는데, 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때까지의 소요 시간은 적어도 “한 달 이상”이 됩니다(9-10절).
셋째, 사무엘하 24:8에 따르면, 다윗의 명령에 따라 요압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온 땅을 두루 다니며 백성의 수를 계수하여 보고하는 데(삼하 24:1-9) “9개월 20일”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말씀들을 종합하면, 갓이 역대기상 21:12에서 말한 “삼 년간의 기근”에 앞서 “삼 년의 기근”이 계속되고 있었고, 또 적어도 “약 10개월 20일 이상”의 시간이 더 흐른 상태라면, 한 나라의 왕인 다윗이 감당해야 할 일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3년 10개월 20일 이상의 기간”에 더해진 “삼 년간의 기근”을 말할 때 「왕의 나라에 6년 10개월 20일간의 기근이 오게 하리이까?」라고 말하지 않고 『왕의 나라에 칠 년간의 기근을 오게 하리이까?』라고 말하는 것은 일상적인 표현입니다. 적어도 한 나라의 계획을 말함에 있어 “10개월 20일 이상의 기간”을 “1년”으로 계산하여 말하는 것은 평상적인 것이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하 24:13은 사무엘하 21장 이후의 말씀들이 배경이 된 상황에서 갓이 다윗에게 말한 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왕의 나라에 칠 년간의 기근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며, 역대기상 21:12에서는 이와 같은 배경을 기록하지 않은 상황에서 갓이 다윗에게 말한 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왕의 나라에”가 없이 그냥 “삼 년간의 기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무엘하 24장과 역대기상 21장에서 갓이 다른 기준으로 두 번 다윗에게 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BB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Q
「로마서 11:25-27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에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144,000명만이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왜 온 이스라엘(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기록되었습니까?」
A
이스라엘은 대환란이라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를 통과하여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실 때 한 개인이 아니라 “민족적으로” 다루십니다. 26절을 주의해서 보시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 즉 “이스라엘”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제거하는 때가 “야곱”의 고난의 때인 대환란입니다. 따라서 이 대환란을 통과하면서 경건치 않은 것들은 제거되고 남은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구원받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반면 요한계시록의 144,000명은 이스라엘 중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의 전체 숫자가 아니라 열두 지파에서 선별된 사람들로서 대환란 중에 구원받는 환란 성도들을 대표합니다. 144,000명은 요한계시록 7장에서 인장으로 표시를 받고, 14장에서는 셋째 하늘에 있습니다(계 14:1). 이스라엘은 144,000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광야로 피했던 이스라엘이 재림하시는 주님을 이 땅에서 맞이하게 됩니다(계 1:7). 대환란 때에 이 땅에 있는 이스라엘이 대환란의 끝까지 잘 견디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마 24:13). BB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으셨는가?>
Q
「칼빈주의를 따르는 분이 요한복음 10:15을 말씀하면서 주님은 교회를 자신의 피를 주고 사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만민이 구원받기를 위한 구절들을 제시하면 그분은 위 구절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상충되는 구절에 대해서는 억지로 풀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0:15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A
먼저 요한복음 10:15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십시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나의 생명을 내어 놓느니라.』 그리고 이 구절의 전후문맥에 있는 두 구절을 함께 보아야 바른 해석을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요 10:11). 『또 나에게 이 양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어 내가 그들도 데려와야 하리니, 그들도 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 그리하여 한 양떼에 한 목자만 있으리라』(요 10:16).
요한복음 10:11이나 질문하신 10:15 등은 칼빈주의의 제3강령인 “제한적 속죄”를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되는 구절입니다. 제한적 속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으며,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결코 피흘리지 않으셨다는 거짓 교리입니다. 성경적 분별이 없이 이 구절들을 보면,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양들”이라고 불리는 소위 “선택받은 사람들”(혹은 모든 사람이 아닌 “제한적인 사람들”)만을 위해서 속죄하신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정확히 읽고 편견에 따른 해석을 바로잡으면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이 오류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두고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반면 11,15,16절의 “양들”을 “교회”로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특히 이런 구절을 근거로 양들을 교회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만을 위해 속죄하셨다는 주장은 매우 비성경적인 거짓 교리입니다.
첫째, “양들”이 누구입니까?
핑크나 쿠스탕스를 비롯한 칼빈주의자들은 사람이 구원받기 이전에도 양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거짓입니다. 성경에서 양으로 불리는 대상은 둘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며, 둘째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구원받기 이전에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들 중에 교리적으로 양이라고 불리는 대상은 오직 “이스라엘, 즉 유대인”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목자 없는 양이라고(마 9:36) 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마 10:6; 15:24)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구약의 많은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 밖에 있는 이스라엘을 양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렘 13:17,20; 23:1-3; 50:6,17, 슼 9:16; 10:2; 11:17; 13:7, 왕상 22:17, 시 74:1; 78:52; 79:13; 119:176, 겔 34:6,11-19...), 특히 “잃어버린 양”(렘 50:6)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이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 때에는 결코 그들을 양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는 타국인이었습니다(엡 2:11,12). 오히려 구원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성경에서 돼지나 개, 이리나 염소로 불립니다(마 7:6,15; 10:16; 25:33, 벧후 2:22). 이방인들이 양으로 불리는 때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을 때입니다. 즉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 때에만 교리적으로 “양”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0:11,15,16의 양들은 아직 믿지 않는 상황에서 양이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에 이 양들은 구원받은 사람들, 즉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특히 16절의 “이 양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은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들이 양들을 “선택받은 사람들”이나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며 왜곡된 해석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해 속죄하셨습니까?
앞에서 살펴본 성경적 증거에 따르면, 요한복음 10:11,15의 양들은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양들이 이스라엘을 뜻한다고 해서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나의 생명을 내어 놓느니라.”는 15절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해” 속죄하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 구절에는 이스라엘“만으로” 제한하는 표현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깨닫기 위해서는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말씀하거나 기록한 것인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곡된 성경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신 것이기에 단지 이들이 언급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예를 살펴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주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신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함이라』(갈 1:4). 이 구절에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요? 2절을 보면 바울과 또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이들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셨다는 뜻입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단지 이 편지를 받는 대상을 향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요? 바울과 디모데와 고린도 교회와 고린도 지역에 있는 다른 성도들입니다(고후 1:1). 갈라디아서 1:4에서보다 좀더 적은 무리인데, 이들만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3)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롬 5:8). 여기서 문맥상으로 “우리”는 바울을 포함해서 편지를 받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4)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노니, 이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음이라. 따라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3:16).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누구일까요? 요한과 요한의 편지를 받은 수신자들입니다. 단지 이들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셨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5) 『또 빵을 가지고 감사를 드린 후, 떼어 그들에게 주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시고 저녁 식사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나의 피로 된 새 언약이니,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것이라』(눅 22:19,20). 여기서 “너희”는 최후의 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입니다. 또 디도서 2:14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은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고 자신을 위해 정결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디도 두 사람만을 말합니다. 열두 명과 두 명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이런 구절들이 이들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듯이 요한복음 10:11,15 역시 양들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말씀을 받는 대상에게 말씀이 기록되거나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균형잡힌 판단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칼빈주의자들이 제한적 속죄를 주장하는 것이 오류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속죄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소위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 곧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신 예수를 보니,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도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더라』(히 2:9).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요일 2:2).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값으로 내어 주셨으니 때가 이르면 증거되리라』(딤전 2:6). 『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2).
이와 같은 말씀들과 질문하신 요한복음 10:15 등과 같은 구절은 결코 상충되지 않으며, 위와 같은 성경적 설명이 결코 성경을 억지로 푸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철학적 사상 체계에서 기인한 칼빈주의 거짓 교리와 그에 대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면 본 학회에서 출간한 다음 책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칼빈주의는 성경적인가?』(pp.77-98).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칼빈주의자인가』(pp.33-35). 『극단적 칼빈주의의 이해』(pp.160-165,257-258).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요한복음』(pp.336-339).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