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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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실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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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9월호>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은 죄가 아니라 진리이다."라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가난과 시련이 연속되는 생을 살았기에, 가난이 진리라는 말은 뼈에 사무쳐 나온 금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이 골수에까지 스미는 사람이 어디 도스토예프스키뿐이었겠는가? 이 세상에는 가난이 끊이지 않고, 세계 인구 7명 가운데 1명이 "절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 인구 중 80%가 기아와 가난과 질병을 안고 산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세상이 매년 10월 17일을 "세계 빈곤 퇴치의 날"로 삼기까지 하는 것이다.

피조 세계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소위 "사회복음"을 가르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세상의 가난 퇴치에 앞장서야 한다고 외친다. 목사의 급여 중 몇 퍼센트를 사회에 환원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자신들은 가난하지 않다는 말인즉,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부를 자랑하는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구성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너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이것은 현대 교회들이 돈이 많다고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 할 때, 되레 그들은 "자신의 가난"을 염려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보실 때 사회운동을 하는 부자 교회들은 "영적인 절대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며, 그 부자 교회들이 영적으로 헐벗고 굶주리는 가난은 죄요 진리인 것이다. 마지막 때의 배교한 교회들에 관한 이 진리는 당사자들만 모르고 있을 뿐 성경에서 분명히 경고하고 있는 내용이다. 『내가 너에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음으로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게 하며, 또 안약을 네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계 3:18,19).

그렇다면 인류의 가난은 언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성경에 따르면 세상이 현재 겪고 있는 모든 비참함은 "아담의 죄"에서 기인한다. 이브가 준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가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경청한 까닭에, 내가 네게 명하여 말하기를 '너는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너로 인하여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너의 전 생애 동안 고통 중에서 그 소산을 먹으리라. 또 땅은 네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요 너는 들의 채소를 먹을 것이며,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해졌음이라.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 에덴의 동산의 풍요함을 누리기만 하면 되었던 아담이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는 땅을 직접 갈아 농사를 지어야 했다면, 그의 후손들 간에는 분명 작황에 따른 소득 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 소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는 "가난"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아브라함을 위시한 야곱, 이삭 등의 족장들은 나름대로 부를 향유한 것으로 드러난다.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인류의 생계에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택하신 족장들에게 부를 가져다 주셨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성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22:25이다. 『만일 네가 네 곁에 있는 가난한 내 백성 중에서 누구에게 돈을 빌려 주면 너는 그에게 고리대금업자같이 하지 말며 그에게 이자를 지우지도 말지니라.』 이 말씀에서 가난한 사람은 약속의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약속의 땅의 백성이 아닌 자들의 가난에는 관심이 없으셨던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으로 특별히 지목하신 대상은 『과부』와 『아비 없는 아이』(고아)이다(출 22:22). 남편 없이 홀로 사는 여자와 아비 없이 홀로 된 아이는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카나안 땅이라 할지라도 가난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생계를 위해 특별 조치를 내리셨다. 『너는 네 포도원에 떨어진 것들을 줍지도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포도도 다 모으지 말고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하여 남겨 둘지니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라』(레 19:10). 『너희가 너희 땅에서 수확을 거둘 때면 너는 거두는 들 모퉁이까지 깨끗이 거두지 말고, 네 수확 중에서 이삭도 줍지 말고, 너는 그것들을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하여 남겨 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라』(레 23:2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민족 공동체"로 다루셨고,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하셨다. 약속의 땅에서 호의를 입어야 할 대상으로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지목하셨는데, 가난한 자는 바로 "과부"와 "고아"였다. 주님은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타국인으로 살았던 때를 기억하라고 하시며(출 22:21) 약속의 땅의 타국인도 특별히 배려하셨다. 이 세 부류에게는 삼 년째에 드리는 십일조를 먹게 하셨다(신 26:12).

과부와 고아가 약속의 땅에서 가난하게 산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의 다른 백성들이 가난하게 산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왜 가난하게 되었을까? "죄"가 그 복을 박탈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열심히 경청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들을 지켜 행하면... 네 몸의 열매와 네 땅의 열매와 네 가축의 열매와 네 소떼의 소산과 네 양떼들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창고가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4,5)고 하셨다. 즉 구약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가난해질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땅에서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경청하지 아니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들과 그분의 규례들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네 광주리와 네 창고가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열매와 네 땅의 열매와 네 소떼의 소산과 네 양떼들도 저주를 받으리라.』(신 28:15,17,18)고 하셨다. 약속의 땅에서 죄를 지으면 가난해질 것임을 경고하신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의 번성은 하나님의 음성에 열심히 경청하고 그분의 모든 계명들을 지켜 행하는 "행위"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가난은 본질적으로 죄에서 기인했다. 주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 가난한 자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으며(신 15:11), 죄로 점철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았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죄의 삯은 사망인즉(롬 6:23), 사실상 과부와 고아의 가난 역시 원천적으로는 "죄"로 말미암은 배우자의 "죽음"과 아비의 "죽음"이 그 원인이었다.

솔로몬은 약속의 땅에서의 가난의 원인 중 하나로 "게으름"을 지적했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각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갔더니, 보라, 농작물이 온통 가시나무와 더불어 자랐으며, 엉겅퀴가 그 지면을 덮었고, 돌담이 무너졌느니라. 그때 내가 보고 곰곰이 생각하였으며, 그것을 쳐다보고 교훈을 받았느니라.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자자 하면, 네 빈곤이 여행자같이 올 것이요, 네 빈궁이 강도같이 이르리라』(잠 24:30-34, cf. 잠 6:9-11).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의 땅을 게을러서 관리하지 않았을 때 가난해졌다. 약속의 땅에서의 가난은 자신에게 주어진 유업을 "관리"하지 못해서 오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든 가난은 주님의 관심사임이 분명하다. 주님은 가난이 죄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여 무시해 버리는 분이 아니시며, 그분의 백성의 가난에 관심을 보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셨을 때에도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셨는데, 주님은 침례인 요한에게 가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하셨고, 영생을 구하는 부자 청년에게는 『네가 온전해지기를 원하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마 19:21)고 하셨다. 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귀하게 여기셨으며(막 12:42,43), 잔치를 베풀려거든 대갚음하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불러 베풀고, 대신 부활의 때에 복을 받으라고 하셨다(눅 14:13,14).

인간은 타인의 가난을 무시하기 쉽지만 죄를 다루셔야 했던 주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셨다. 물론 주님의 처사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국한된 것이며, 주님의 이 행위는 팔레스타인 땅의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다(신 15:7,8,11). 결코 이것을 오늘날의 교회들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세상 죄인들을 돕는 데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물질적인 가난과 그에 대한 원조의 원칙은 신약의 교회에까지 확장된다. 세상이 아닌 "교회 내의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관심과 도움을 신약성경에서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성도들을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얼마를 기부하였음이니라』(롬 15:25,26).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다른 지역 교회 성도들의 기부금을 전달하는 것을 "성도들을 섬기는 일"로 보았으며, 이 일은 그가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에게 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갈 2:10). 사도들 역시 신약 교회 시대에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가난에 대해 관심을 비쳤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도 당시 성도들이 교회에 모일 때 가난한 성도들의 식사를 함께 싸 와서 나누어 먹었음을 알 수가 있다(고전 11:21,22). 이 점은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는 은사주의자들의 교리를 반박하는 것으로, 비록 예수님을 믿더라도, 꼭 죄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회 성도들이 가난하게 살 수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 내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관심을 두는 사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들의 혁명"이 일어났다. 칼 마르크스의 이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이 그것이다. 어떻게 하면 일 안 하고 먹고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한 "게으름뱅이"의 머리에서 나온 이론이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부를 가진 자본가들(유산 계급)의 지배와 착취에 항거하는 노동자 계급(무산 계급)이 지도 주체가 되어 결국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이론이 팽배해진 것이다(공산주의는 오늘날 세계 정치인들이 선호하는 "사회주의"의 최종 형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 불리는 이것은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의 지도하에 실현된 후 동유럽과 중국, 쿠바, 베트남 등으로 확산되었지만, 스탈린의 집권 때 그 모순이 부각되었고, 고르바초프가 개혁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가난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있게 된 진리이며, 이처럼 세계 역사를 요동치게 할 영향력을 갖고 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가난의 문제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대환란 때 전 세계를 뒤흔들 요인으로 또다시 작용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부와 가난으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진 현 세상에 "짐승의 표"라는 것을 제시하여 온 세상이 가난에 대한 염려 없이 평등하게 먹고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할 것이다. 『그가 모든 자, 즉 작은 자나 큰 자, 부자나 가난한 자, 자유자나 종이나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숫자를 지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거나 팔 수 없게 하더라. 지혜가 여기에 있으니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숫자를 헤아려 보라. 그것은 한 사람의 숫자이니, 그의 숫자는 육백육십육이니라』(계 13:16-18). 작은 자와 큰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자유자와 종의 계층을 없앨 이 "공산주의" 체제는 온 세상의 환영을 받을 것이며, 너 나 할 것 없이 짐승을 따르면서 그의 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의 표를 거부할 환란 성도들은 재산을 빼앗기고(히 10:34) "찢어지는 가난"에 내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환란 성도들은 물질적인 가난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왕국 헌법으로 주신 마태복음 5장의 말씀처럼 "영이 가난한 자들"이 되어 물리적인 천국의 소유자들이 될 것이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영의 가난함은 "죄를 깊이 뉘우치는 통한의 영"을 말하는데, 바로 이것이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 민족이 대환란 때 그 메시아를 다시 기다리며(히 9:28) 가져야 하는 자세일 것이다. 짐승의 표를 거부한 그들은 추위에 옷 없이 유숙하고 산지의 소나기로 젖으며 피할 곳이 없어 바위를 품어야 할 "절대 빈곤"에 이를 것이다(욥 24:7,8). 그렇게 가난에 찌들어 연명하더라도 민족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내어 준 죄를 회개하면서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인내하면(계 12:11,17; 13:10, 마 24:13), 바로 그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에게 왕국을 주실 것이다. 그때 그들은 가난을 벗어던지고, 지복의 천 년 동안 아담의 타락 이전의 모습으로 회복된 세상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사 11:6-9; 35:1-7).

인류의 숙원인 "빈곤 퇴치"는 특정 경제 체제를 선전하는 정치가들이나 대환란 때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이뤄 주는 게 아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잠깐 먹고사는가 싶더니 이내 전무후무한 대재앙 속에 죽어갈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있게 된 가난은 십자가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속죄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첫 사람 아담의 죄로 있게 된 "가시나무와 엉겅퀴의 가난"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으로(요 19:2) 대속되어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찬란한 풍요함으로 만물이 회복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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