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구원의 확신을 “없애는” 말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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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11월호>

한승용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교수



구원의 확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만일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그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주저 없이 경고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고후 13:5). 바울이 사역할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육신적인 문제들이 일어났는데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그 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이었다. 바울은 그런 교회를 대상으로 쓴 서신에서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경고했다. 말하자면 그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그 사람 스스로 믿고 간증할 수 없다면 그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자연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기(고전 2:14)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생각을 하고서 지역 교회 내에 분란을 일으키곤 한다.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가 그 안에 구원받지 않은 “교인들”을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은 다음의 말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스스로 우리와 화해하셨고 화해의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과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겨 주신 것이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한 대사들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신 것같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 5:18-20). 이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신다”는 말씀과 “너희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말씀이 함께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구원과 관련하여 무슨 이유에서 “세상”과 “고린도 교회”를 동일선상에서 본 것일까? 그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여전히 “세상의 영을 받은”(고전 2:12)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바로 그 죄인들, 즉 “교회는 다녀도 구원받지 못한” 종교인들에게 “지금이 구원의 날이니 바로 지금 구원받으라”고 바로 다음 장에서 연이어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와 함께 일하는 자들로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말씀하시기를 “기뻐 받아들여진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이 기뻐 받아들여진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후 6:1,2). 이 말씀 역시나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의 열악한 영적 현실을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라는 말씀은 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헛되이” 받아 구원받지 못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내가 전한 복음을 굳게 잡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복음을 통하여 너희도 구원받은 것』인즉(고전 15:2), 실로 고린도 교회에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고전 15:3,4) 복음을 “헛되이 믿어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다수 있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부활”을 빼놓고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되심과 부활”로 이루어진 복음의 3분의 1(“부활”)을 제거하고 믿은 것이다. 흔히 “부활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여 복음을 헛되이 믿은 자들을 바로잡으려고 기록된 말씀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것이 전파되었는데도, 어찌하여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느냐?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2,13). 한 지역 교회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며 그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다수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교회는 양무리의 순수함을 상실한 “동물원 교회”가 되고 마는데, 때로는 “흉악한 이리들”이 그리스도인을 가장하고 들어와서는 양떼를 아끼지 않고 해침으로 그 지역 교회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기도 한다(행 20:29). 그들은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함으로써 구원에 관한 믿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신은 성경의 특정 구절들을 잘못 해석할 때 사라질 수 있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영적으로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는 것이다. 필자는 군 복무 중에 구원받았고, 그 뒤 해당 부대 인근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제대 후엔 고향의 성결교회에 출석하다가 학업 문제로 상경하여 서울 연희동 한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약 1년간 청년부원으로 활동했다. 그때까지는 자신의 구원에 관해 의심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마태복음의 한 구절이 구원의 확신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각종 죄와 모독은 사람들에게 용서가 되나,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은 사람들에게 용서될 수 없느니라.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누구든지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느니라. 이는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니라』(마 12:31,32). 이 구절을 대했을 때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나도 몰래 성령님을 모독하는 죄를 지었다면 지옥에 갈 거라는 생각에 현기증마저 생겼고, 불안감에 타들어가는 가슴으로 서울 광화문의 생명의말씀사로 찾아가 관련 서적들을 모두 뒤적였다. 하지만 그 수많은 책들 가운데 단 한 권도 시원스럽게 답변해 주지 못했다. 이전에 다녔던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초청 강사라는 이가 했던 말, 즉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위에 서 있으니까 아래로 떨어질까 봐 두려운 것 아니겠습니까?”를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 말은 부흥 강사 자신도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 서 있을 때 떨어지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확신 아니겠는가!


바로 그 무렵에 만난 것이 “피터 럭크만 박사”의 책들이었다. 럭크만 박사는 마가복음의 참조 구절을 제시함으로써 필자의 불안을 “속 시원하게” 날려 보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모든 죄들과, 그들이 모독하는 어떠한 불경도 용서되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정죄의 위험에 처하리라.”고 하시더라.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더러운 영을 지녔다.”고 함이더라』(막 3:28-30).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초림 때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마귀 들렸다”고 말한 서기관들과, 그와 동일한 말을 했을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 『또 예루살렘에서 서기관들이 내려와서, 말하기를 “그가 비엘세붑에 들렸다. 그는 마귀들의 통치자를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더라』(막 3:22). 그 서기관들은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그분 안에 계신 “성령님”을 “마귀”라고 했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것이다. 그와 동일한 죄는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뵐 수 있는 천년왕국 때도 범해질 수 있다. 지상에 재림하신 주님은 인간의 눈앞에 계실 것이고, 그 주님을 향해 “그가 더러운 영을 지녔다.”라고 하면 그 역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 용서받지 못할 죄는 교회 시대에는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눈앞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을 모르는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방언과 신유를 마귀 들린 짓이라고 하면 성령을 모독했다며 정죄하지만, 이제는 그런 무지몽매한 자들의 위협에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지금 내 눈앞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며, 마귀의 일을 마귀의 일이라고 한 것은 결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원의 확신을 “없애는” 또 한 가지 예는 “히브리서”에 있다. 『한 번 깨우침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며, 성령의 동참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 만약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시킬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공개적으로 조롱함이라』(히 6:4-6). 교회 시대에서 대환란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책인 히브리서는 “교리적” 위치가 천년왕국이 펼쳐지기 직전에 왕국 복음이 전파되는 『마지막 날들』(히 1:2), 곧 “대환란 시대”를 가리킨다. 히브리서는 “마지막 날들”을 사는 히브리인 성도들이 대환란이 끝날 때까지 “믿음”과 “행위”로 구원을 “끝까지” 지켜서 천년왕국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히브리서의 “대환란”적 특징은 그 책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끝까지”라는 표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집을 맡은 아들이니, 만일 우리가 확신과 소망의 기쁨을 끝까지 굳게 붙들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히 3:6). 『이는 우리가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기 때문이라』(히 3:14). 『우리는 너희 각자가 끝까지 소망의 온전한 확신을 향하여 같은 부지런함을 보여 주기를 바라노니』(히 6:11). 이 말씀들은 만일 누군가가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구원을 상실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 현 교회 시대의 교리가 될 수 없다. 히브리서의 “행위 구원”은 대환란 때를 위한 것으로, 주님께서 『대환란』(마 24:21)을 예언하시면서 제시하셨던 “왕국 복음”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24:1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환란이라는 “일정 기간”을 끝까지 견디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는 그 기간을 통과해야 할 히브리인 성도들에게 “끝까지” 견딜 것을 독려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없애는” 예로 제시한 『한 번 깨우침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며, 성령의 동참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 만약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시킬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공개적으로 조롱함이라.』(히 6:4-6)라는 말씀은 이어지는 11절(『우리는 너희 각자가 끝까지 소망의 온전한 확신을 향하여 같은 부지런함을 보여 주기를 바라노니』)을 통해 그 교리적 위치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즉 대환란 기간에 행위로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다면』 그 사람은 결코 구원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약교회사에 등장한 이단들은 주로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와 같은 과도기적인 책들을 잘못 해석한 데서 기인했다. 교회 시대의 구원 교리는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바울 서신에서 배워야 한다. 구원의 확신을 “없애는” 말씀들로 교리적 체계를 세우면 믿음이 흔들리는 불안정한 신앙인이 만들어진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할 때(딤후 2:15) 현 교회 시대에 받는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었음을 확신하며 주님을 기쁨으로 섬길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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