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분류
문자적 해석인가, 비유적 해석인가?
컨텐츠 정보
- 704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4월호>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게 되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신 본래의 취지와 목적에 맞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문자적 해석은 성경 해석의 원칙이며 성경 자체의 지지를 받는다. 그렇기에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성경이 기록된 목적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들은 말씀에 대한 “불신”과 자신의 교리에 끼워 맞추려는 “불순한 의도”로 인해,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하여 비유로 본다. 물론 그러한 “불신”과 “불순한 의도”의 바탕에는 “성경 지식에 대한 무지”가 깔려 있다. 『내 백성이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또한 너를 거부하리니, 네가 나에게 제사장이 되지 못하리라.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또한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호 4:6). 말하자면 호세아서의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올바른 지식을 거부한 자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신다.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금을 납부하는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실족케 해서는 아니되니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올라오는 첫 번째 물고기를 잡으라. 그 입을 열면 동전 한 개를 찾으리니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그들에게 주라』(마 17:27). 이 말씀은 세금 납부를 요구받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낚시를 해서 잡은 첫 번째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찾아 세금으로 내게 하신 이야기이다. 그런데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이하 신천지)에서는 이 구절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유 풀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들은 낚시를 던져 물고기를 잡는 것은 “전도”를 의미하고, 물고기 입에서 동전이 나오는 것은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돈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찾은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나가서 전도를 하고 그 전도된 사람이 준 돈으로 세금을 낸 것”이라고 가르친다. 신천지의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려 주는 그 구절을 그들 마음대로 비유 풀이로 해석함으로써 주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해석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기적 그대로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불신”을 그대로 드러낸 것일 뿐이다.
신천지는 비유가 아닌 것을 비유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비유를 해석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조차도 무시한다. 마태복음 13장의 “밭의 독보리들의 비유”(24-30절)를 예로 들자면, 신천지는 “밭”을 “교회”라고 해석하여 “신천지 교인들”이 “교회”에 가서 “곡식”을 “추수”해 와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다른 교회에 침투하여 그 교회의 교인을 빼내 오는 것을 “추수”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교회의 교인을 빼내 오는 신천지 교도를 “추수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해석해 주신 바에 따르면 “밭”은 “세상”이고(38절) “추수꾼”은 “천사”이다(39절). 바로 몇 구절 뒤에서 예수님의 권위 있는 해석이 제시되어 있는데도 이만희의 비유 풀이를 믿는 자들이 바로 신천지 교인들이다. 그 눈뜬 소경들은 성경을 믿지 않고 교주 이만희만을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우상 숭배자들이다.
신천지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하나의 극단적인 예이다.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해석하는 무리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이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여호와의 증인”이다. 그들은 명백히 기록된 “지옥”도 믿기 싫어서 “스올”과 “게헨나”로 음역했다. “지옥”을 “스올”과 “게헨나”로 음역하면 “지옥”이 없어지는가? 그들이 “지옥”에 관하여 “비유”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구절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이야기가 당시 부자였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고, 당시 가난한 자들이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인해 “유익”을 얻고 “은혜”를 입은 점을 비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공식 웹사이트에서도 부자와 나사로의 실화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만일 부자가 실제로 불타는 고통의 장소에 있었다면, 나사로가 손가락 끝에 적신 물이 불에 바로 증발해 버리지 않았겠느냐?” “물 한 방울이 부자의 고통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느냐?” “그 당시에는 아무도 하늘에 간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아브라함과 나사로가 하늘에 있느냐?”와 같은 무지한 반론을 제시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전에는 낙원(아브라함의 품)이 지옥과 함께 지하 세계에 있었고, 그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실제적인 커다란 구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부자의 대화를 하늘과 지옥 사이의 대화처럼 생각하며 반론을 제기한다. 사실 부자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잠시 잠깐이라도 줄여 볼 요량으로 그의 혀를 식혀 줄 물 한 방울을 간절히 소망했을 뿐이다. 그가 원한 “물 한 방울”은 절박한 간절함을 보여 준다. 그는 그 한 방울로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없애려 한 것이 아니었다. 주일학교 학생도 알 만한 쉬운 내용인데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실재하는 지옥을 피해 가려 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의 핵심적인 단어들을 피하기 위해 억지 반론을 제기하지만, 그들이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첫째, 이 이야기는 “죽은 이후의 이야기”라는 것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거지가 죽었는데...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더라... 너는 네 생전에 좋은 것을 받았고... 만일 누군가가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가면... 비록 누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다 해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니라.』 둘째, 부자의 고통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장소”에서 비롯된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에... 저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더니... 나사로를 보내시어...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커다란 구렁이 놓여 있어서... 갈 수 없고... 올 수 없느니라...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게 하소서.』 셋째,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부자들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고통을 받는 점을 비유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서 듣게 하라.』 초림 당시 유대인들이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은 이유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지키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고 지키지 않았기에 지옥의 심판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옥을 믿고 싶지 않기에 성경을 왜곡하는 자들이다.
위와 같은 일은 신천지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집단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수많은 목사들과 교인들도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례로 어떤 자들은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마 14:15-21)을 기적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로부터 받은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복하신 뒤 먹게 하자, 어린아이가 선뜻 자신의 음식을 내놓은 모습에 가책을 느낀 사람들이 자기 품속에 숨겨 두었던 빵과 물고기를 꺼내 놓고 함께 먹었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여 자기가 가진 음식을 내놓게 만든 것이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라는 얘기다.
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가르친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그 교회들의 목사들이다. 이 나라 기독교계는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점령당하여 홍해를 가른 모세의 기적도 믿지 않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즐비하다. 그들은 지도에서 출애굽 경로까지 바꿔 가며 성경에서 말씀하신 홍해가 실은 “늪지”였다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도 강물 위에 떠 있던 얼음 위를 걸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얼음 위에 계신 것도 몰라보고 자기도 “물 위로”(마 14:28) 주님께 걸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겠는가?
믿음 없는 자들이 성경을 불신하는 것은 기적을 믿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불신이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불신을 낳았는데, 그 불신을 신학 용어로 교묘히 바꾼 것이 “무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이다. 무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는 <하나님의 도성>을 쓴 어거스틴(A.D. 354-430)이 그 기초를 놓았다. 어거스틴은 “천년왕국은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라며 “무천년주의”를 가르쳤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실제적인 왕국을 믿을 수 없기에, 그 왕국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을 교묘하게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제시하고 계신 “천 년”이라는 문자적 기간을 무시할 수 없게 되자, 교회의 영적 통치 “천 년 후”에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비성경적인 “후천년주의”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천 년” 또한 문자적인 “천 년”이 아닌 “어떤 불특정한 기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결국 무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는 “불신”의 앞면과 뒷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올바르고 유일한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천 년” 동안 통치하신다는 “전천년주의”이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주님께서 재림하신 뒤에 20장에서 뭐라고 말씀하는지 보라. 『그들은 그 짐승에게나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표를 그들의 이마 위에나 손에도 받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므로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통치하더라』(계 20:4). 재림 뒤에 천 년 통치가 있는 것이다. 대환란 기간이 끝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간 통치한다는 사실은 성경의 명백한 진리이다. “천 년”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성경을 불신하여 왜곡된 해석을 하는 자들을 따르면 파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신천지의 “비유 풀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의 “비유적 해석”, 또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의 “무·후천년주의”는 성도들의 건전한 믿음을 파괴한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배격하고 비유적 해석을 수용하면 그것이 곧 배교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해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로 돌리리라.』(딤후 4:3,4)라고 경고했다. 문자적 해석은 성경 해석의 원칙이지만, 비유적 해석은 꾸며 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따르지 말고 선한 것을 따르라』(요삼 1:11). 악인들의 “비유적 해석”을 따르지 말고,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문자적 해석”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