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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제에 일자무식한 삯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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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3월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영국에서 요한 웨슬리와 함께 18세기 영적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설교자이다. 그가 미국 보스턴에 갔을 때 그곳의 회심하지 않은 목사들에 대해 설교했고, 서필드에 갔을 때에도 회중 가운데 있는 많은 목회자들에게 그들이 설교하기 전에 반드시 회심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조지 휫필드가 말한 “회심하지 않은 목사”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 말은 죄를 증오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목사이면서도 죄를 가지고서 강단에 서는 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 목사가 구원받았다면, 구원받았음에도 죄를 밥 먹듯이 짓다가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위선을 부린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가 구원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죄와 죽음과 심판의 문제도 해결 보지 못한 자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다고 나서는 주제넘은 짓을 한 것이 된다.죄를 가지고서 강단에 서는 목사들은 지난 2천 년 신약교회사에 끊임없이 존재했다. 그런 위선자들이 강단에서 선포하는 말씀에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교회 시대가 결국 배교로 끝나는 일차적 책임은 회생불가능으로 썩어 간 교회들의 강단에 있다. 성령님께서 그런 목사들을 왜 들어쓰시겠는가? 18세기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강단들에 회심하지 않은 설교자들이 있었다면,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강단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자신이 어기는 말씀을 회중에게 강요하는 위선자들인데, 초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거짓 종교지도자들을 강력히 저주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한 모든 것을 지키고 행하라.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않음이라. 이는 그들이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사람들의 어깨에 지워 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옮기는 데 손가락 하나도 대려고 하지 아니함이라... 그러나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라!』(마 23:2-4,13) 그 뱀들, 독사들의 세대가 받게 된 화는 『지옥의 저주』(33절)였다. 예수님 이전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위장한 자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그분께서 들어쓰시지 않으므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떤 선지자가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고 성취되지도 않았으면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선지자가 주제넘게 말한 것이니 너는 그를 무서워 말지니라』(신 18:22).
이 시대에 “목사” 하면 대단한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든, 배교한 교인들이든 그들은 자기들의 “목사”를 깍듯이 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인가? 자기 교회의 목사가 자기들이 가야 할 인생길과 섬김의 길을 올바르게 제시해 줄 것으로 믿고 기꺼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기 목사에게 속고 있다! 그 목사들 가운데는 조지 휫필드의 말처럼 “회심하지 않은 목사”가 있는 것이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세움 받은 목사들은 훌륭한 목사들이 많다. 그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양무리를 먹이고 지키는 데 불철주야로 애쓸 뿐만 아니라, 교회 밖 죄인들을 지옥의 형벌에서 구해 내기 위해 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파한다. 한국 교회에 그런 목사들이 있는가 보라. “목사”라는 타이틀을 자랑하면서 자기의 영적 지위가 존중받기를 바라는 자들은 수두룩해도, 바른 말씀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양무리를 진리의 지식으로 양육하는 데 힘쓰는 목사는 극히 드물다. 그들은 대부분 “생계형 목사들”이다.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고 자기가 믿지도 않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용해 먹는 사악한 위선자들일 뿐이다. 『내가 자주 너희에게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고 있느니라.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며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들의 수치 속에 들어 있고 그들은 땅의 것들을 생각하느니라』(빌 3:18,19).
필자가 섬기고 있는 성경침례교회는 위와 같은 거짓 목사들에게 속아 살다가 성별하여 온 성도들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그중 한 자매는 자기가 만나 본 목사들이 죽음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고서 공개질의서 같은 것을 필자에게 보내왔는데,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제도권(교단) 교회 목사들은 “죽음”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제대로 정확히 잘 알지 못한다. 놀라지 마시라.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성경을 배우지 않는다. 성경 그 자체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고 고매한 성경학자들의 소견에 따른 학문만을 배운다. 나도 몰랐다. 그래서 어렴풋이 “성경에 대해서 교인인 나보다 목사들은 성경을 더 알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일단 당신의 담임목사에게 진지하게 “목사님, 인간은 왜 죽지요?”라고 물어보라. 그런 질문이 이상하고 어색한가?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보겠는가? 철학자에게? 의사에게? 부모님에게? 죽음은 영적 문제가 아닌가? 그때 당신의 담임목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른 말을 하지 않고 “형제님,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롬 4:3) 있는지 같이 살펴봅시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이 글을 읽을 필요도 없다. 당신은 아마 그 교회에서 성경대로 말하는 죽음의 원인과 정의, 죽음 후의 문제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듣고 이미 구원받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성경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접근하는 목사가 한국에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목사 자신의 죽음의 문제조차 해결보지 못한 자들이 있다.」
바른 말씀과 참된 복음을 알고서 거짓 목사들에게 회의감을 느낀 성도가 어디 그 자매뿐이겠는가? 죽음의 문제를 다룰 줄 모르는 자들의 실체를 알고 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우리 성경침례교회로 성별해 오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인생에서 다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죽음의 문제를 소홀히 여기는 자들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는가? 자기 한 사람의 배를 채우기 위해 설교 아닌 설교로 교인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자들은 목사가 아니라 삯꾼들이다. 양들도 자기 양들이 아니므로 그들이 죽든지 말든지, 사후에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몫만 챙기기에 급급하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양들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려 두고 도망치느니라. 그리하여 이리가 양들을 채 가고 흩어지게 하느니라. 삯꾼이 도망치는 것은 그가 삯꾼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느니라』(요 10:12,13).
죽음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온 인류에게 불어닥친 문제가 되었다(롬 5:12). 아프리카 초원의 짐승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롬 8:22,23). 인간이나 짐승이나 죽음은 아무 때나 오고, 누구에게나 온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도 오고, 알라를 찾는 자들에게도 온다. 교황, 사제들, 수녀들에게도 오고, 절간의 중들에게도 오며, 배교한 교회들의 목사들과 그들의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에게도 온다. 그들 가운데 자기가 몇 날 며칠 몇 시에 죽을지 알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혼을 네게서 앗아 가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얼마 전 튀르키예에서 발생한 지진에서 사망한 사람이 47,000명을 넘었다. 그들은 현지 시간 “2023년 2월 6일 오전 4시 17분 36초”에 죽음이 찾아올 것을 알지 못한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무너지는 건물과 함께 아래로 꺼져 내려간 자들 가운데는 그 시간 즉사한 자들도 있었지만, 잔해에 깔린 채 죽음을 기다리던 자들도 있었다. 목숨이 붙어 있던 그들이 자기 생명이 몇 분 몇 초 뒤에 꺼질지 알고 있었겠는가? 그들 가운데 타하 에르뎀이라는 17세 고교생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신의 휴대폰에 유언을 남겼다. 그는 규모 7.8의 지진에 그가 잠들어 있던 아파트가 무너져 내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수천 톤의 콘크리트 덩어리와 구겨진 철근들 아래 깔려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타하는 여진으로 계속 몸을 누르며 조여 오는 잔해 속에서 휴대폰의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영상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친구들이여. 죽음은 가장 예상치 못한 때에 온다.” 생각해 보라. 이런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급기야 계속되는 여진으로 몸이 눌릴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현실로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암으로 사망선고를 받는 순간, 그것도 모자라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진통제를 맞으며 숨을 헐떡거려야만 자기가 죽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필자는 본 글의 제목을 「그들은 왜 “목사”가 되었는가?」로 하려 했는데 좀 더 강한 제목으로 「죽음의 문제에 일자무식한 삯꾼들」로 바꿨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간의 영이 죽었고(창 2:17, 엡 2:1), 몸도 더불어 죽게 되었으며(창 5:5), 몸이 죽으면 그것을 떠나는 혼이(창 35:18) 하늘나라로 가는지(딤후 4:18) 지옥에 가는지도(눅 16:23) 모르는 자칭 목사들이 이 나라 80,000개의 교회들에 가득하다. 죽음의 문제를 모르는 자들에게 지상 생애뿐만 아니라 불멸하는 혼의 운명을 맡긴 자들은 최악의 수로 도박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패는 백 퍼센트 “지옥”으로 귀결되고, 그곳에서 담임목사였던 자들의 혼을 만난다면 그들에 대한 원망이 지옥의 끝없이 확장되는(사 5:14) 천장을 찌를 듯할 것이다.
그들은 왜 “목사”가 되었는가? 그들 가운데는 목사라는 타이틀만 쥐고서 자기 사업을 하는 자들도 있고, 목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데도(딤전 3:2) 주방에서 뛰쳐나온 철없는 여인네들도 있다. 노숙자들에게 맨날 밥만 퍼주고 그들의 사후 심판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목사가 있는가 하면, 주말이면 광화문에서 반공 집회를 열고, 틈만 나면 고소를 당해 세상 언론의 관심 속에서 법정을 밥 먹듯이 드나드는 목사도 있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서 연예인을 하다가 목사가 되어 선교랍시고 여전히 연예인 짓을 하는 목사와, 꽉 끼는 청바지에 배꼽과 허리뿐 아니라 겨드랑이까지 노출된 스포츠 브래지어를 걸친 여자 교인들과 웃통을 홀딱 벗고 찍은 사진을 “바디프로필”이랍시고 교회 블로그에 올린 목사도 있다. 이런 푼수들이 왜 “목사”가 되었는가! 그들이 인간의 죽음과 사후의 생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런 헛된 짓을 골라가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심이 온통 이 멸망할 세상에 있기에 복음이 없는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 “목사”라는 자들에게 속아 멸망함을 알아야 한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가족이(엡 2:19) 되지 못하면 마귀의 가족으로 남아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없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