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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종합대학교가 되려 하는 신학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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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10월호>
신학대들의 ‘종합대化’ 움직임, 어떻게 봐야 하나”라는 모 기독 언론의 기사를 보았다. 기사의 요약 타이틀은 “발전 위한 변화지만 기독교 정신 저해 우려도”였다. 신학대가 종합대가 되는 일이 “발전”을 위한 변화라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발전을 위한 “변화”인 것일까? 또 기독교 정신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데 왜 그런 우매한 짓을 벌이려고 하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총명한 사람은 악을 미리 보고 자신을 숨기나, 우매한 자는 계속 가다가 벌을 받느니라.』(잠 22:3)고 말씀하신다.기사에 따르면, ‘종합대화(化)’를 시도하는 신학대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종합대의 면모를 갖춘 학교가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예장합동의 총신대를 언급하는 듯하다. 향후 같은 목표로 준비에 들어간 학교들이 있다는데 그들이 종합대로 가는 준비에 들어간 이유는, 현대에는 신학만으로는 대학으로서의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단순 ‘신학대’가 아닌 신학을 중심으로 학문의 폭을 넓혀 다방면의 인재를 양성하는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사는 이에 대해 ‘기대 반 우려 반’의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애초 신학을 기반으로 한 대학이었던 만큼 종합대화를 통해 기독교적 가치관과 비전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지만, 반면 기독교 정신의 변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는 것이다. 이에 기사에 인용된 한 신학대 관계자는 “신학대들도 종합대화를 시도하면서 나타나게 될 부작용들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대원을 따로 운영하는 등 대비를 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화된 시대에 신학 하나만으로는 문제가 있다. 그런 점에서 종합대화는 신학대에 있어 분명한 도전적 영역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학대의 종합대화와 관련된 주장들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신학 하나만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온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위대하신 하나님만을 알아가는 일이 구시대적이라는 얘긴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또 신학을 중심으로 학문의 폭을 넓힌다고 했는데, 그것은 문명화된 세속 학문을 신학에 접붙여 신학의 수액을 빨아먹은 또 다른 변태적인 학문을 양산하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경쟁력(?)을 갖춰 돈을 벌겠다는 것이리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딤전 6:10).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은 문명화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세상은 늘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기 때문이다. 문명화된 세상은 신학대의 종합대화를 위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마귀에게 속한 문명의 옷을 입은 세속 학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며 세상과 경쟁하려는 자들은 준엄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 주는 그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자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아니하리라』(출 20:7).
또 그 신학대 관계자는 신대원을 따로 운영하여 신학대의 세속화와 기독교 정신의 변질을 막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어불성설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을 모르기에 하는 소리이다.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통하여 견고한 요새들을 무너뜨리는 능력이라.) 여러 가지 구상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역하여 스스로 추켜세운 모든 높은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고후 10:4,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역하는 모든 구상과 생각들과의 전쟁이 그리스도인들의 전쟁이다. 그러한 것들을 무너뜨리고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런 학문들을 신학대로 들여와 스스로 오염되려 하고 있다. 적군의 침입로를 스스로 열어 주어 영토를 점령케 하고 피점령자들을 사상적으로 세뇌시키도록 방치했는데, 퇴각하는 아군 초소 같은 신대원 하나 세워 놓았다고 신학대의 가치가 지켜질 수 있겠는가? 종합대 속의 신대원이란 세상 학문들 밭에 서 있는 초라한 깡통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안에는 진리가 없기에 어떤 『공중의 새들』(마 13:32, 마귀들)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 종합대생들에게 신학이란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을 탐구하는 좀 유별난 세상 학문 중 하나로 여겨질 것이며, 더 이상 신학대로서 운영이 안되고 종합대로 운영되기에 그 대학을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는 세상 체계일 수밖에 없다. 신학교로서의 생명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나라에는 애초부터 비성경적인 교단 교리를 가르치는 신학대들이 설립되었기에 신학대다운 신학대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마저 이미 자유주의화된 지 오래다. 그런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겠다고 신학대를 세워 놓고 철학이나 가르치고 인문학이나 강연하다가 이제는 세상 학교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종합대가 되려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 아닌가! 일례로 세계 유명 대학들 가운데는 신학대로 시작한 대학들이 있다. 미국의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듀크, 다트머스, 보스톤, 그리고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종합대화하면서 스스로 불러들인 세상 학문과 자유주의 사상에 엄몰되어 진리의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들 안에 있는 신학부는 이름만 신학부지 성경의 진리와 무관한 자유주의 신학의 요람이다. 신학대가 세상의 『배설물』(빌 3:8)을 들여오자 세상의 배설물 통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성경대로 믿는 교수진이 없다. 그들에게 배우는 신학생들은 성경적 믿음을 지닐 수 없다. 그들이 주님을 성경대로 섬기는 일꾼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종이 그 주인보다 높지 못하니라. 제자가 자기의 선생같이 되고 종이 그 주인같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라』(마 10:24,25). 생각해 보라. 종합대가 된 세계 유명 대학들이 신학으로 알려져 있는가, 세상 학문으로 알려져 있는가? 거기서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목사가 단 한 명이라도 배출된 적이 있는 것인가? 열매를 보고서 그 나무를 알며 거기서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마 7:16)
혹자는 신학을 기반으로 한 대학이 종합대가 되면 기독교적 가치관과 비전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가치관과 비전이란 무엇인가? 참된 기독교적 가치관과 비전은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주님이 가치 있게 여기시는 일에 뜻을 두고 행하는 것이다. 『이는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 그분은 너희로 그분의 선한 기쁘심에 따라 뜻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빌 2:13). 이것은 세상이 아닌 교회에서, 교회를 통해 성경적인 가치관을 실현하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성별된 교회는 세상의 죄와 그 체계와 타협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구원한다. 또 구원받은 그들을 바른 말씀으로 양육하여 마귀들과의 영적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성장시키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실행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대비한다. 그러한 교회가 세운 신학교는 비성경적인 교단 교리를 가르치지도 않고 세상 학교들과 경쟁하지도 않는다. 세상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다시 오심만을 바라보며 진리의 좁은 길에서 최선을 다해 “성경대로” 경주하는 것이다.
이 땅에는 바른 말씀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근거로 성경의 진리만을 가르치는 “킹제임스성경신학교”가 있다. 바른 말씀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신학교는 이 학교뿐이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주님을 두려워하고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고 실행하는 구원받은 성도들이다. 꼭 사역자로 부름받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공부한다(딤후 2:15). 그 신학생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복음 전파자들이다. 그들은 세상에 복음으로만 다가갈 뿐 세상 학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상과 경쟁하지 않는다. 멸망할 세상 대학들과 경쟁하려는 것은 이 타락한 세상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모르는 자들의 맹목적 착각이다(고전 7:31).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쟁, 곧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경주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 제멋대로 벌이는 그들만의 경주인 것이다.
성도의 참된 경주는 『그러므로 이처럼 많은 구름 같은 증인들이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 또한 모든 무거운 것과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자.』(히 12:1)는 말씀으로 정의된다. 그리스도인의 경주는 세상과의 경쟁이 아니다. 세상의 죄를 벗어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원칙대로(고전 9:26) 세상으로부터 성별하여(고후 6:14-16) 주님이 제시하신 “부활의 푯대”를 향해서 달리는 것이다(빌 3:11-14). 주님을 섬기다가 주님의 선한 일을 위해 죽더라도 부활할 것을 바라보며 달리는 경주이며, 교회의 휴거를 향해, 그날 공중에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성경대로 최선을 다해 달리는 경주이다. 경쟁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동료 성도들이다. 누가 주님을 위해 더 잘 달리는가를 경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전파하는 성도가 달려야 할 경주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는(롬 12:2)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자들이 잘못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교회가 휴거될 때 성도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이 “변화”될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세상적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고전 15:51-52).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고 주님이 나타나실 때 주님과 똑같이 “변화”될 소망과 확신을 붙들고 있는 성도는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정결하게 지키는 법이다(요일 3:1-3). 그렇기에 배교한 신학대들에서 꿈틀대는 세속적인 변화의 움직임은 발전을 위한 변화가 아니라 퇴보를 위한 퇴화이다. 개가 토해 낸 것으로 다시 돌아가고 돼지가 씻고 나서 진창 속에 다시 뒹구는 것과 같다 하겠다(벧후 2:22).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16:4)의 세상 학교들과 무엇을 놓고 경쟁하려는가?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약 4:4) 세상과 간음하는 학교에서 어떻게 진리의 일꾼들이 나올 수 있겠는가? 신학교라면 “성경”을 가르쳐서 “성경대로” 주님을 섬기는 능력 있는 일꾼을 배출해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 교회 시대의 배교한 기독교계는 교회들은 넘쳐나도 성경대로 믿고 섬기는 교회가 없다. 교회를 주님의 뜻대로 운영할 수 있는 일꾼들이 배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정확히 알아 주님을 바르게 섬기는 일꾼을 배출할 수 없다면, 그 역할을 못하는 신학대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 곳이 종합대가 된다면 그들의 영적 음행만 심화될 뿐, 하나님께 무익하기는 매한가지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