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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예언과 그리스도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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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3월호>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책은 아무래도 요한계시록일 것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써 있는 대로 믿기만 하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는데도, 그 기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설마 하늘이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이 되고,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바다에서 괴물이 나오고 하는 일들이 일어날까’ 하는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 기록들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다 보니 그 예언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고, 상징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을 할 수밖에 없어 무지한 독자들은 책을 덮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찬가지의 이유로 구약의 예언서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닫혀져 있는 책이다. 사람들은 이사야가 어떻게 했다느니, 예레미야가 어떻게 고난당했다느니, 요나가 어떻게 불순종했다느니 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은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그들이 예언했던 내용들에 대해서는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이해력 부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전적인 불신이 그 이유이다. 에스겔 서 등에 있는 상징적인 언어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는 부분, 예컨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든지 메시야께서 어떻게 나타나신다는 예언들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구약의 예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구약의 예언들은 모두 신약에서 성취되었다는 잘못된 생각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예언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분이 오심으로 모든 예언들은 성취되었고, 이제는 예언을 성취하신 그분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예언들이 그분의 초림 때에 맞춰질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재림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성경의 예언들은 대부분 주님의 재림에 맞춰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신약성경에서 재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이상 구약의 예언들이 재림도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의구심이라도 가져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고 초림과 교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의 예언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예언이란 분명히 미래의 일들에 대한 예언이다. 선지자들이 말한 것들은 그 당시부터의 미래이므로, 짧게는 바빌론 포로부터 길게는 재림과 천년왕국, 또 그 너머 영원 세계에까지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은 때로는 포로 상황을 예언하고 때로는 초림을 예언하고 때로는 재림을 예언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러한 예언의 내용들 중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어떤 예언들인가?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문제의 핵심이며, 이것을 바로 이해해야 성경 전체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약의 예언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왕국이다. 재림과 연관되어서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불리는 대환란과, 이방인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한다는 것과, 재림으로 온 이방에 큰 심판을 가져오신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어 그분의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고, 온 땅의 왕이 되시어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내용의 예언들은 어떻게 선포되는가?
재림에 관한 예언들
예를들어 시편 45:5,6은 재림 때 전쟁에 임하시는 왕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들의 심장을 뚫으니 백성이 왕 아래 엎드러지나이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 무궁하며 주의 왕국의 홀은 의로운 홀이니이다.』 그 후의 주님의 왕국은 의로운 가운데 영원히 번성한다. 이때 주님의 왕국이 “영적 왕국”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은 여기서 제시된 주님의 보좌는 “다윗의 보좌”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7:16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의 입을 통해 다윗에게『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세워지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세워지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시편 24:7,8은『오 너희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 영원한 문들아, 너희는 들어올려질지라. 그리하면 영광의 왕께서 들어오시리라. 이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강하고 능력 있으신 주시며 전쟁에 능력 있으신 주시로다.』고 말하여,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예언이다. 예수님께서는 초림 때에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 있지만, 그때에는 분명히 영광의 왕의 모습도 아니셨고, 전쟁에 능력 있으신 주님의 모습도 아니셨다. 그분은 곧 죄인으로 처형되신 것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재림 때에 무서운 용모로 임하시는 요한계시록 19장의 재림 때 예수님을 묘사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전쟁으로 임하시는 승리의 왕이시라는 사실은 아마겟돈에 대한 예언에서 더 분명해지는데, 재판관기 5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은 카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를 물리친 후에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이러한 예언을 한다.『왕들이 와서 싸웠으니 그때 카나안 왕들이 므깃도의 물가 타아낙에서 싸웠으나 돈을 얻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싸웠으니 그들의 길에서 별들이 시스라와 싸웠도다』(판 5:19,20). 당시의 전쟁은 하늘의 전쟁도 아니었고, 별들이 싸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묘사한 것은 하나의 예언으로서 미래에 있을 전쟁, 즉 하늘의 군사들이 사탄과 싸울 전쟁을 이러한 언어로 예언한 것이다.
이 군대에 대해서 요엘 2:3-5은『불이 그들 앞에서 삼키며 그들 뒤에서는 화염이 불타는도다. 그 땅은 그들 앞에서는 에덴의 동산 같으나 그들 뒤에는 황량한 광야 같으니, 정녕, 어떤 것도 그것들을 피하지 못하리라. 그들의 모양은 말들의 모양 같고 그들은 마치 기병들처럼 달리리로다. 그들이 뛰는 것은 산꼭대기들에 있는 병거들의 소리 같고, 그루터기를 삼키는 불꽃 소리와도 같으며, 전열에 배치된 강한 백성 같으리라.』고 말하며, 재림 시에 에돔은 큰 살육을 당할 것인데 [『주의 칼이 피로 찼으며, 기름짐과 어린 양과 염소의 피와 또 숫양의 콩팥 기름으로 기름졌도다. 이는 주께서 보스라에서 희생을 내시며 이두메 땅에서 큰 살육을 내심이라.』(사 34:6)], 그곳은 불못이 되기까지 할 것이다 [『그곳의 시내들은 역청으로 변하게 될 것이요, 그곳의 흙은 유황으로 변하고, 그곳의 땅은 불타는 역청이 되리라. 그것은 밤낮 꺼지지 않을 것이며, 그 연기들은 영원히 올라가리라. 대대로 그것은 황폐하게 남아, 그곳을 통과하는 자가 영원 무궁토록 아무도 없으리라.』(사 34:9,10)].
그 후에 주님은 온 땅의 왕이 되시어 화평으로 다스리실 것인데, 이사야 2:4이『그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시며, 많은 백성을 책망하시리니 그들이 자기 칼들을 두들겨서 보습을 만들며, 자기 창들을 두들겨서 낫을 만들 것이요,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칼을 들어올리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더 이상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고 있듯이, 온 민족들을 심판하신 후에 세상을 평화로 치리하실 것이다.
그때 유대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쫓겨났던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주의 속량받은 자들이 돌아오리니, 그들의 머리 위에 노래와 영원한 기쁨을 가지고 시온으로 오리라』(사 35:10). 예레미야는『그 날들에 유다 집이 이스라엘 집과 함께 행하리니 그들이 함께 북쪽 땅에서 나와 내가 너희의 조상에게 유업으로 주었던 땅으로 오리라.』(렘 3:18)고 예언한다. 이 일은 바빌론 포로 회복에서 있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바빌론 포로의 회복은 유다의 회복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에도 모든 유대인들이 그 땅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북왕국에 속한 열 지파는 누가 누군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이 함께 돌아온다고 말하고, 예레미야 31:31에서도 하나님께서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에스겔 48장은 열두 지파들이 제자리를 찾아, 그들의 약속의 땅에서 각각 유업을 받는 모습이 예언되어 있다. 이 땅의 분배는 여호수아가 분배한 것과 다르다. 이것은 천년왕국 때에 이스라엘이 분배받게 될 땅의 모습이다.
그때 이사야에 따르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할 것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울 것이요,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할 것이다(사 11:6,7). 사람들은 이러한 예언들을 볼 때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게 되며, 흉악하던 죄인이 의롭게 변하는 모습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틀린 해석이며, 예언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취하는 결론일 뿐이다. 우리가 성경의 예언들을 대할 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예언들은 문자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예언의 언어가 비유적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예언이 상징화되어서는 안된다. 예언은 말씀한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초림과 재림의 분리된 적용
그런가 하면 어떤 예언들은 두 개 이상의 사건에 적용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초림과 재림에 동시에 또는 나누어 적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사야 61:1,2이 고전적인 예이다.『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온유한 자에게 기쁜 소식들을 전파하게 하셨으며, 그가 나를 보내시어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싸매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감옥이 열림을 선포하며, 주의 기뻐 받으시는 해를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고』 이 구절은 우리 주님께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인용하시며 자신을 백성 앞에 나타내 보이실 때 인용하셨던 구절이다(눅 4:18-21).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구절 전체를 인용하지 않으시고, 2절의 중간 부분까지, 즉 “주의 기뻐 받으시는 해를 선포하고”까지만 인용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주님은 여기까지 인용하신 후에 “이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이루어졌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사야 61:1,2 중에서 그 당시 이루어진 부분까지만 인용하셨다는 말이 된다. 그럼 그 다음 부분은 왜 인용하지 않으셨는가? 다음 부분은 “우리 하나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며...”라는 부분인데, 이 부분은 명백히 재림 때에 성취될 부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나님이시므로,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다 아셨다. 그래서 당대에 이 부분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계셨다. 재림 때에 주님은 무서운 왕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복수하러 오시겠지만, 초림 때에는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 죽으시러 오셨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부분 인용하신 것이다.
이러한 면은 이사야 9:6,7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음이니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경이로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 그의 정부와 화평의 증가함이 다윗의 보좌와 그의 왕국 위에 바르게 세워지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는 데 끝이 없으리라...』 여기서 “한 아이가 태어났고”라는 예언은 분명히 초림 때에 적용되는 예언이다. 그분의 이름이 놀라운 분이요, 상담자요, 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원하신 아버지라 함도 지금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그분의 이름이다. 그러나 화평의 통치자라 함은 아직 불리워지지 않는다. 이 이름은 영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서 화평으로 다스리신다는 의미의 이름이 아니라, 이 땅을 화평으로 통치하신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지금 그분은 이 땅을 화평으로 다스리시지 않는다. 이 땅은 여전히 죄와 고통만이 점철되어 있는 악한 곳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온 땅을 심판하신 후에는 화평의 통치자가 되시어 다스리실 것이다. 그때 “그의 정부와 화평”은 증가할 것이고, 그것들이 다윗의 보좌 위에 영원히 세워질 것이다. 즉 다윗의 보좌 위에서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 앞에서 온 땅은 전쟁도 그치고 화평하게 된다는 예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언들은 왜 함께 있는 것인가? 초림과 재림의 시간 간격은 꽤 많이 떨어져 있는데 왜 선지자들은 한꺼번에 이 두 사건을 예언했는가? 그것은,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오심은 초림이나 재림이 아니라 단순히 “오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 시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초림과 재림에 관한 많은 사건들이 연속되어 있는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라킨(Clarence Larkin)은 “예언의 산봉우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선지자들은 첩첩이 싸여 있는 산들을 보듯이 예언을 보았는데, 그 산들 사이가 실제로는 커다란 공간이 있지만, 보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산들은 한 산의 여러 봉우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림에 대한 산들이 있고 재림에 대한 산들이 있을 때 선지자들은 그 모든 산들을 한 산의 봉우리들로만 인식하고, 그 사이에 있는 거대한 교회의 골짜기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사건은 별도의 사건일 필요가 없었다. 초림과 재림이 구별 없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 두 사건이 이천 년이라는 긴 공백을 두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메시야이신 주 예수님을 거부한 결과일 뿐이다. 그들이 거부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들에게 주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성도들(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 그분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이지, 만일 유대인들이 초림 때에, 적어도 그분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직후에만 받아들였다 해도 역사는 이처럼 긴 2000년이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유대인들은 거부했고, 그로 인해 교회 시대가 생겼고, 그래서 그분의 오심은 초림과 재림으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구약예언들은 초림과 재림으로 나뉘어서 적용되게 되었는데, 그 예언의 내용으로 볼 때 초림에 대한 예언보다 재림에 대한 예언이 훨씬 많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언의 이중 적용
예언은 이처럼 두 가지 사건으로 나뉘어서 적용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예언들은 나뉘어서 적용된다기보다 이중적으로 적용된다. 즉 같은 예언이 두 가지 사건에 모두 적용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다니엘 11장에 나오는 북쪽 왕과 남쪽 왕에 대한 예언 중 북쪽 왕으로 알려진 자가 성전을 더럽히는 장면이다.『군대가 그의 편에 서서 견고한 성소를 더럽히고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며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우리라』(단 11:31).
많은 사람들이 이 예언을 알렉산더 이후의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적용시킨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악하게 대했고, 성전에다 가증하게도 돼지의 피를 뿌리는 등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소를 매우 가증한 방법으로 더럽혔다. 또 예표적으로는 이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모형이기에 이러한 역사적인 적용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예언이 안티오쿠스에게 한정되어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초림 때에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이 사건을 미래의 사건(예수님 당대로부터 미래)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리니...』(마 24: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다니엘의 예언을 다시 한 번 예언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예언은 안티오쿠스에게 적용된다기보다는 다른 사건에 적용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때, 듣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 그 말씀은 이미 성취된 예언 아닙니까? 그러면 성전이 훼파되는 그러한 일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성전에서 나오면서, 성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말씀드렸을 때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들에 성전과 그 백성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해 주신 것이었다.
결국 성전을 가증스럽게 만들었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안티오쿠스에 의해 성취되었던 그 예언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 또 많은 사람들은 A.D.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파괴되는 것에 적용한다. 이 적용도 전혀 틀렸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어쨌든 그때 성전은 극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마 24:2) 하신 것이었는데, 그 예언 그대로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그렇게 파괴되었다.
하지만 마태복음 24장의 예언은 단순히 A.D. 70년에 한정되어 적용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대환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듯이, 그 전체 문맥은 미래에 있을 대환란 때를 향한 예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전 파괴는 앞으로 다시 한번 더 있을 것이고,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라는 예언은 자연스럽게 대환란 때의 적그리스도에게 적용될 것이다.
자, 이 예언은 삼중으로 적용되었다. 한번은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한번은 A.D.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게, 또 한번은 대환란 때의 적그리도에게이다. 이 중 앞의 두 적용은 역사적인 적용이고, 마지막 적용은 교리적인 적용이다. 그러므로 안티오쿠스나 티투스는 모두 미래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일 뿐, 이 예언을 이 두 사람에게 한정시켜 적용하는 것은 성경 예언의 핵심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설명한 바와 같이 성경의 예언들은 대부분 재림을 다루고 있다. 성경에서 예언을 뽑아 보면 대략 800개 정도의 예언이 있는데, 이들을 이 짧은 글에서 모두 다루기는 무리이다(다만 대표적인 것들만 몇 개 비교해 보았다). 이 800개 중에서 300개 정도는 초림에 관한 예언으로 이미 성취되었고, 500개 정도의 예언은 재림에 관한 예언으로,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런데 300개의 초림에 관해 성취된 예언들은 대부분 단독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재림에 대한 예언의 문맥 속에 함께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재림에 관한 예언들은 초림과 관계없이 단독적인 것이 많다. 또한 초림에 관한 예언들은 짧게 등장하지만, 재림에 관한 예언들은 한 가지 예언이 많은 절들로 이루어져, 큰 예언들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의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성취된 예언들은 모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앞으로 성취될 예언들도 모두 문자적으로 정확히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다 하면서 성경의 예언을 올바로 공부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은 엄중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 예언의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