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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경륜과 구원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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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2월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대를 나눈다는 것은 세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각 시대별로 인간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달리 나타난다는 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그 중에 우리는 이번 호에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살펴볼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시대에 따라 구원의 방법이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언약신학자들뿐 아니라 세대주의를 표방한다는 사람들까지도 어려워하는 “질긴 고기” 같은 부분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보면 별 어려울 것도 없는데, 그들은 교회 시대의 관점에서 다른 모든 시대들을 보려고 하니 억지로 꿰어 맞추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언약신학에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으므로 성경의 모든 주제를 구속에 한정시킨다. 그리고 그 구속은 반드시 피에 의한 구속으로서, 그 구속의 효력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동일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 주신 것도 양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고, 아벨이 드린 제사도 피의 제사였고, 율법 하에서 드려진 제물들도 모두 피를 흘렸기에 이 피에 의한 구속의 교리는 성경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구약에 속한 모든 사람들도 오늘날 신약 성도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매우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약에 면밀히 흐르고 있는 “피에 의한 구속”이라는 교리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자”라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피가 누구의 피냐는 것이다. 그 피가 그리스도의 피인지 동물의 피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동물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는 절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린 사람과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십자가의 죽음)를 경험한 사람들이 어찌 같을 수 있다는 말인가?
히브리서 9:17에선『유언은 사람이 죽은 후에야 효력이 있으며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혀 효력이 없느니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유언”이란 “새 언약” 즉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분이 맺어주신 새 언약은 그분이 피를 흘려 주셔야만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여전히 옛 언약(구약)에 속해 있었고, 그때의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리스도의 피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한 상태로 구속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옳지 못하다.
더욱이 구약성경에서 구속에 대한 진리는 예표였을 뿐이고, 감추어진 진리였다. 그들은 단지 모형만을 보았지만, 그것마저도 그것이 모형인지, 또 무엇에 대한 모형인지 그 의미를 알지 못했었다. 따라서 그림자요 예표로 제시된 구속을 주제로 삼기 위해 드러나 있는 왕국이라는 주제를 감추어버리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요, 모든 것을 교회에다만 맞추려는 제한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실제적인 문제로, 구약 시대에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각 시대가 나뉘어진다면, 그 시대별로 구원에 대한 계획도 달라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각 시대별로 구원받는 방법에 대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각 시대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분의 신정통치 왕국의 관점에서, 이 땅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나뉘어진다는 것이다(본 지 93,94호 「언약들과 시대들 Ⅰ,Ⅱ」 참조). 따라서 구원에 대해서는, 나뉘어진 각 시대마다 모두 구원이 다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구원에 대해서 본다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있는데, 첫째가 율법 이전 시대요, 둘째가 율법 시대요, 셋째가 교회 시대요, 넷째가 교회 이후의 시대이다.
1. 율법 이전의 구원
무죄 시대에는 구원이 따로 필요 없었다. 그들에게는 죄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의 개념이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그들은 이미 구원받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이때부터 인간에겐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들은 “죄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교통하던 그들의 영은 죽어버렸고, 그래서 창조 때에 그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져 버렸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히 1:3)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회복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양심 시대와 인간정부 시대와 약속 시대는 “왕국”에 대한 관점으로 하나님의 경륜상 나뉘어지는 시대이지만, 구원에 관해서는 동일한 조건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양심”이다. 어쨌든 아담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 그들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고, 아직 구체적인 율법도 주어지기 전인지라, 그들의 양심에 심겨진 이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행위에 있어서 기준이 되고, 또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도 판단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양심에 따라 선한 일을 해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악한 범죄에 동참했지만, 노아는 그의 의로운 행위로 세상을 닮지 않았었다. 에녹도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했다.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예표였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범죄한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법으로 심판을 하셨겠는가? 바로 그들의 양심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창세기 15:6에 따르면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또 그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노아처럼 의로운 행실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의 전적인 택하심 가운데 은혜를 입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아브라함의 구원을 위한 개인적인 택하심이라기보다는 아브라함의 씨인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택하심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또한 그가 신약 성도들과 같은 방법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거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주어지고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가 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뿐, 신약 성도들처럼 “내 죄로 인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믿은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씨가 번성한다는 것, 그의 씨로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 땅을 그의 씨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피를 믿었다는 말은 없다.
사람들은 “모형”을 말하곤 하지만, 모형으로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모형은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때도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을 만한 근거는 여전히 그들의 양심이었다. (만약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당시 아브라함을 제외한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갔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2. 율법 시대의 구원
그 다음은 율법 시대다. 율법 시대에도 양심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행위에 따라 판단을 받게 되지만, 이때 이들에게 행위의 기반이 되는 것은 양심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제시된 법령인 율법이다. 율법은 신정통치 왕국인 이스라엘의 통치 기틀이 되는 법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개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율례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에 명시된 규례들을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율법 시대의 구원의 핵심은 여타의 법적인 규례들이라기보다는 제사에 관한 법이었다. 사실 율법은 이들이 지키기에 매우 어려운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율법에 의하면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것은 신약에서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 의인이라고 인정받다가도 다시 범죄하면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율법의 행위들보다 “용서”였다. 이러한 관점은 신약에서도 동일하다. 신약의 죄인들은 어떠한 죄를 지어도 “용서”되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들을 용서케 해주는 것이 누구의 피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구약 시대에는 그것이 동물의 피였다. 동물의 피도 비록 제한적이지만 분명 구속력은 있었다. 그들은 반드시 동물의 피를 흘려야만 용서를 받았다. (“예표” 운운하지 말라. 예표는 어디까지나 예표이고 그림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 피는 제한적이므로 죄를 지을 때마다 뿌려져야 했다.
그래서 구약의 구원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성령님께서 임하실 수도 있고 떠나실 수도 있듯이 구원도 그러했다. (신약에서는 성령님께서 한 번 임하시면 절대 떠나지 않으신다.)
즉 이때의 사람들은 동물의 피로 용서를 받아 구원을 받되, 그 구원이 신약 시대처럼 온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구원을 받기는 받아도 우리와는 다른 위치를 점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구원받았을 때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앞으로 그분의 신부가 된다. 하지만 율법에 속한 구약 성도들은 그렇지 못하다. 율법에 속하여 그 마지막을 장식했던 침례인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신랑의 친구”라고 했다. 그들은 친구이지 신부가 아닌 것이다.
이 율법 시대는 십자가 사건까지 간다. 민족들을 다루시는 경륜에 있어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고 이방인의 때가 도래하기도 했지만, 구원에 관해서는 여전히 율법 시대이고, 새 언약의 피가 뿌려질 때까지 율법은 계속 옛 언약(구약)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율법은 어디까지 유대인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는 여전히 “양심 시대”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고, 또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니만큼, 신약 성도들은 율법과 무관한 생활을 한다. 안식일도, 할례도, 십계명도, 동물제사도, 음식이나 의복이나 기타 여러 가지 규례들도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3. 교회 시대의 구원
교회 시대의 구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가운데, 오직 믿음만이 이 시대의 죄인들이 구원받는 방법이다. 이때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나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어떠한 죄인도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 행위를 의지하면 안된다. 어떠한 의식도 의지할 수 없다. 그가 구원받으려면 오직 그분의 피를 신뢰해야만 한다. 이 피는 완전한 피고, 영원한 피인 하나님의 보배로운 피이다. 죄를 씻을 곳은 오직 그분의 피밖에 없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롬 7장).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선행으로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죄인인 상태에서 구원받았으므로, 더 이상 어떤 악한 행위를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는 요소는 되지 못한다(엡 2:8,9). 하늘 위나 아래나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으니, 이를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 한다. 이 보장은 오직 신약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아담 이후로 죽었던 영이 살아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적으로 회복하며, 미래에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또 그분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아내에게만 베푸는 특별한 지위인 것이다.
4. 교회 이후의 구원
그러다 그리스도의 몸이 휴거되면서 교회 시대가 닫히게 된다. 왕국 시대가 펼쳐지기 전에 잠깐 동안 펼쳐질 과도기 같은 이 대환란 시대에는 매우 독특한 구원의 방법이 제시된다. 교회 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은혜로만 구원받는 기회는 없어졌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가 갑자기 무효화될 수도 없다. 그 피는 영원히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환란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추가해서 모세의 율법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교회에 대한 경륜이 사라지고 다시 유대인에 대한 경륜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언약신학자들은 십자가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완전히 관계를 단절하시고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그분의 통치를, 그것도 영적인 통치만을 이루신다고 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무시한 처사로, 구약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언약들을 교회에게로 빼앗아 오고자 하는 불경스러운 의도일 뿐이다. 그들에게 문자적인 예언은 철저히 무시된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인들이 회복된다고 말씀하고 있고(롬 11장), 그때는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진 다음이다. 유대인들은 대환란 기간 동안 다시 심판받고, 연단받고, 정화되어 불경건한 것들이 다 제거된 후, 그들을 위해 예비된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대환란 때는 이방인들이 연합하여 유대인들과 대치되는 정국을 맞이할 것이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그러셨듯이, 유대인들의 하나님이 되시어 그들을 도우실 것이다. 즉 유대인들을 위한 경륜이 펼쳐질 것인데,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독특하게 주어진 율법이 다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환란 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더불어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계 12:17). [대환란 이후에 펼쳐질 왕국 시대에는 행위가 더 강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기본적으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인데, 이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와 눈에 보이도록 통치하실 것이다. 누가 감히 그분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들은 산상설교에서 명시된 것과 같이, 율법을 지키듯 왕국 시대의 법령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손이 잘리고 눈이 뽑히고 불못에 던져지는 처벌을 당해야 할 것이다. 마 5:29,30]
또한 대환란 때의 구원은 불완전해서 구원받고 난 후 범죄하면 그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이때가 구약보다 더 엄격한 것은, 구약에는 그래도 다시 동물의 피를 흘리면 되었지만, 이때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진 다음이므로 다시 동물의 피는 흘릴 수 없고,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피도 다시 흘려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한 번 구원을 잃어버리면 다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히 6:4-6).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특히 히브리서나 야고보서 등에서 누군가가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구절들을 대할 때 당황해 하거나 억지로 풀지 말 것은, 그러한 구절들은 교회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교리라고 이해하면 된다. 반드시 성경은 기록된 대로 믿어야 한다.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말하면 그렇게 믿어야 하고, 끝까지 견뎌야 한다고 말하면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오히려 성경을 불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서 등에서 보듯이 성도들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경이 모순이 아닌 이상, 그러한 구절들은 다른 시대에, 다른 경륜 속에서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또한 환란 때에 믿음과 행위로 이처럼 힘들게라도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으로 나타내시는 그분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덜 사랑하셔서 더 힘든 상황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없이 모두 휴거되어 올라갔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멸절하시고 모두 지옥에 보내셔도 된다. 그들은 어쨌든 그리스도의 피를 거절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즉결심판에 넘기지 않으시고 유예기간을 주시며,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허락하신 것이다. 단지 그들을 교회 시대와 동일하게 대우하실 수 없으신 것뿐이다. 이러한 식의 은혜는 성경 전체에 깔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대로 죽여 버리실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 그들을 모두 홍수나 불로 멸망시켜 버리실 수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했을 때 그들을 모두 멸망시켜 버리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죄인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자리에서 죽이실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번제물의 피를 가져 올 때까지 참아주셨다. 이것이 그분의 은혜이다. 신약 시대의 은혜와는 사뭇 다르지만, 이와같은 그분의 은혜는 환란 시대까지 이어질 것이다.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은혜까지도 저버리게 되면 다시는 기회가 없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