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 분류
언약과 시대들 Ⅱ
컨텐츠 정보
- 10,817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1월호>
성경에서 언약들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경륜의 각 기점들이 된다. 그분의 경륜에 따른 시대들은 때로는 개별적인 구원에 있어서, 때로는 민족적인 구분에 있어서 각기 서로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흔히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지는 기본적인 구분은 하나님의 경영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언약들이 두 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곱, 혹은 여덟 개가 있다. 그 실로 다양한 언약들은 어떤 모습을 띠며, 각 언약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를 주관하시는가? 지난 호에서는 에덴의 언약과 아담의 언약과 노아의 언약과 아브라함의 언약을 살펴보았고, 이번 호에서는 모세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과 새 언약을 살펴보자.모세의 언약 - 율법 시대
출애굽은 그들의 민족적 탄생의 기점이 된다. 더 이상 그들은 부족이 아니라 명실공히 한 민족으로서의 위상을 드러낸다. 아직 그들에게는 이방 민족들과 같이 체계적인 왕의 제도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신정통치 하에서 그분의 왕권을 위임받은 지도자가 있었고, 그는 실제로 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신 33:5).
그렇다. “신정국가”이다. 고대의 모든 국가들이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정치형태를 띠고, 또 신적인 탄생이라는 건국신화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처럼 이방인들, 특히 당대의 최고 국가였던 이집트를 무참히 짓밟고 한 민족을 탄생시키시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으로 갖고 있지는 못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탄생시키실 때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군대 대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었다. 출애굽기 5-12장까지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통쾌한 승리를 보라. 그 위대한 파라오의 영광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드디어 출애굽을 하는 12장 마지막 절에서 이같은 기사를 읽는다.『바로 그 날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들의 군대대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셨더라』(출 12:51). 이스라엘은 위대한 왕의 인도함을 받는 “군대”로 탄생한 것이다.
하늘 아래 어떠한 민족도 이같은 방식으로 탄생한 민족은 없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래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민족이고, 그 택하심을 구체화시키시어 모든 민족들과 구분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언약은 이스라엘이 큰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만큼, 그에 합당한 요구사항들이 부가된다. 이 요구사항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식과도 같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율법”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율법”으로 대표되는 이 언약은 다분히 “조건적인 언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언약은 무조건적이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씨가 어떠한 요구사항을 지켜야 할 필요도 없고, 그들이 저주받을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 언약에 들어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아브라함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선택”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용어를 사용하려면 신약성도 개개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모세의 언약은 달랐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이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 이 언약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범죄하면 벌을 받고 복종하면 복을 받게 된다. 그들의 벌은 심지어 그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언약의 기본적인 내용은 “율법”이다. 그리고 이때부터를 “율법 시대”라고 한다. 이 율법은 “십계명”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제사법들, 모든 도덕법들, 음식과 의복에 관한 법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적인 규례에까지 이르게 된다. 특히 이 율법의 형벌은 매우 엄격하여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이 적용되고, 특정한 법을 어기면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율법은 이스라엘 국가를 위한 통치 기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율법은 아무래도 종교적인 의미가 강하다. 이것은 특별히 제사법에 관련해서 그러한데,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 짐승의 피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레위기, 특히 5장을 참조할 것). 만약 이 규례에 따라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는 용서받지 못하고, 자기 죄 가운데서 죽게 된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율법을 통해 다루신다.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길이고, 구원받는 길이었다.
신약과 연관해 볼 때 이 율법은 십자가의 예표가 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속죄제물이시고, 화목제물이시며, 그 피는 모든 동물들의 피가 가리키는 진정한 피다. 하지만 “율법이 십자가의 모형이므로 구약 성도들은 율법을 지킬 때 십자가를 보고 구원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적으로 아무도 십자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법이 그림자이고 모형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림자”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누군가가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실체”를 통해서만 받는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계시도 받지 못했거니와 구체적인 예언도 듣지 못했고, 심지어 율법이 모형이나 그림자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구약의 율법은 신약과 비교해 보니 모형이라는 것이지, 당시 구약 성도들에게도 모형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모든 삶은 그 자체로서는 전혀 가치가 없는 그림자로서의 삶일 뿐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때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실체였다. 만약 구약 시대의 누군가가 “율법으로는 어떠한 육체도 구원받을 수 없어. 의식은 중요한 것이 아냐. 이것은 분명히 앞으로 올 무엇인가에 대한 모형일 뿐이야. 나는 그것을 기다리겠어.”라는 마음으로 율법에서 제시한 제사 의식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았다면 그는 용서받지 못한다. 그들은 분명히 율법에 따른 제사를 드려야만 용서받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 시대의 구원 방법은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은『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롬 3:20)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고 했고,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깨달음이 있다고 했지, 율법을 통해 “구원받지 못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이것을 하라.’ 또는 ‘저것을 하지 말라.’는 조항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누가 그것을 완벽히 지킬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지켜야 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저주를 받게 된다. 하지만 율법에는 또한 “용서”에 해당하는 법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사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의 핵심은 율법에 따라 주어진 제사로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지옥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인데, 이 형벌은 용서를 받으면 면해지는 것이다. 구약 성도들은 율법을 아무리 완벽히 지키려 해도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것을 범한 것이 되므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알게 될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그에게 용서의 길을 마련해 주셨고, 그것이 바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율법은 유대인들과 맺은 언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는 율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적 백성인 교회를 중심으로 다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구약 시대에 이방인들은 율법으로 다스림받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겐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에게는 여전히 양심으로 다스림을 받는 양심 시대가 이어진다(롬 2:12-16).
한편 모세의 언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별도의 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땅”과 연관된 언약이다.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약속하신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항상 주장하셨는데, 모세 때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 땅으로 나아간 것부터가 이 땅에 대한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전쟁으로 그 땅을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땅에 대한 같은 언약이라도 이 언약이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른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는 이 땅이 당연히 유대인들의 것인 반면, 모세의 언약에서는 그들이 범죄하면 그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회개해야만 회복된다. 이것은 이 언약이 조건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단면이다.
특별히 신명기 28-32장에 걸쳐보면 이스라엘이 받을 복과 저주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전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면 그들은 “그 땅에서 번성할 것이요,” 그들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불순종하면 여러 가지 벌을 받게도 되지만 그 종국은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신 28:58-64). 학자들에 따라서 땅에 대한 이 부분을 모세의 언약과 구별해서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스코필드, 라킨 등).
다윗의 언약 - 왕국 시대의 예언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지만, 특별히 “다윗의 언약”이라 부르는 것은 사무엘하 7:12-16에서 제시된다.『네 날들이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잠들 때, 내가 네 몸에서 나올, 곧 네 뒤에 올 네 씨를 세우고, 내가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리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지을 것이요, 나는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세워지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세워지리라』(삼하 7:12,13,16).
아브라함에게서 땅과 민족이 결정되었고, 모세에게서 통치 기틀이 결정되고 땅이 확정되었으니, 다윗에게서는 왕국과 보좌가 결정된다. 이미 다윗의 왕국이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이 언약을 다윗에게 주시는 것은 앞으로 다윗의 씨를 통해 메시야 왕국을 세우시겠다는 예언이다. 일차적으로는 솔로몬이 이 언약을 이어받아 “다윗의 아들”로서 왕국을 안정시키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성전도 지었다. 그리고 성전을 봉헌할 때는 아버지 다윗에게 주신 이 언약을 자기에게 적용시켜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다(대하 6장). 하나님께서도 그 언약을 기억하시어 솔로몬이 죄를 지었어도 사울 때처럼 그 보좌를 빼앗지 않으시고(삼하 7:14, 15), 다윗의 이름으로 세워진 보좌는 견고히 유지하셨다.
하지만 이 예언은 단지 솔로몬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이 예언의 참다운 계승자는 미래에 오실 메시야다. 그야말로 영원히 세워지는 메시야의 보좌에 적용될 예언인 것이다. 솔로몬의 보좌는 다음 대에 갈라졌고, 바빌론 침공 때에는 끊기고야 말았다. 따라서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데, 그때 메시야 왕국은 “다윗의 보좌”로 대표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에 그토록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리신 것은 그분이 바로 이 언약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유대인은 영원히 그 땅에서 번성한다는 약속이 주어졌는데, 다윗의 언약에서는 그 왕국이 영원히 번성한다는 약속이 주어진다.
특이한 것은 이전의 다른 언약들에서는 언약이 주어짐과 함께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한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이 언약에서는 한 시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언약은 미래에 이루어질 예언이지, 모세의 언약 때처럼 당대에 경륜이 바뀌어버리는 언약이 아니다. 다윗이 이 위대한 언약을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모세의 언약 하에 있고, 구약의 다른 사람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했던 한 사람이었다. 다윗이 이때 언약을 받았다고 다윗 때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은 아니고, 이 언약은 미래로 넘어가 왕국 시대를 이끌 예언이 되는 것이다.
흔히 세대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윗의 예를 들곤 한다. 즉 율법에 따르면 다윗은 범죄한 후 죽어야 했는데 죽지 않았으니, 신약 시대와 동일한 은혜가 구약 시대에도 주어졌다는 것이며, 따라서 구약의 구원 방법도 신약의 구원 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다윗이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일을 미리 행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다윗도 여타의 구약 성도들처럼 용서의 법을 적용받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윗은 도피시절 제사장들 외에는 금지된 성막의 차려놓은 빵을 먹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징계하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도 신약에서 이 예를 드시면서 자신의 행위가 정당함을 말씀하셨다(마 12장). 이것은 다윗이 받은 특별한 “확실한 자비”에 속하는 것으로서, 율법에 속한 상황에서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다윗이 그랬다고 구약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일이 허용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예외가 있다고 해서 규칙 자체가 무시될 수는 없다.
또한 다윗은 범죄했을 때 누구보다 깊은 “상한 영”으로 참회를 했다(시 51:17). 아무리 구약의 율법이 엄격해도 죄를 짓자 마자 즉결심판을 한 것은 아니다. 다윗은 심판을 받기 전에 참회를 했고, 그 후에 희생제를 드리겠다고 했다(시 51:19).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위에 대해 적절한 보응을 하셨다. 또 다윗의 말년에 백성을 계수하는 죄를 범한 후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을 때에, 다윗은 분명히 희생제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삼하 24:18-25).
새 언약
새 언약은 사실 두 가지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실 새 언약(New Covenant)이고, 또 하나는 교회와 맺으신 새 언약(New Testament)이다. [영어에서 이 둘은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testament도 언약의 일종이며, 실제로 교회와 맺는 언약도 covenant로 사용될 때가 있다.] 신학적으로 이 두 “새 언약”들은 분명히 서로 다르지만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 둘이 모두 한 옛 언약에 대한 새로운 언약이 되기 때문이다. 그 옛 언약은 모세의 언약이다.
1. 유대인과 맺는 새 언약 - 왕국 시대
이 언약은 예레미야 31:31에서『주가 말하노라. 보라 그 날들이 오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니』라고 말한 것처럼 오직 유대인들과 맺으실 언약이다. 그것도 아직 맺어지지 않고, 앞으로 맺으실 언약이다. 다윗의 언약은 이미 맺어진 상태에서 아직 그 시대가 미래에 온다는 예언이지만, 새 언약은 언약 자체를 미래에 맺을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 언약은『내가 이집트 땅에서 손으로 그들을 인도하였던 날에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32절)라고 말한 것처럼 모세의 언약과 대조되는 언약이다. 모세의 언약, 즉 옛 언약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그들은 그 언약을 파기했다. 그래서 새 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을 돌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시고, 그들의 죄들을 용서하신다. 그때는 주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이웃과 형제에게 “주를 알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34절). 즉 주님에 대한 전파가 그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교회 시대에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주님에 대한 전파가 더 지속적으로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언약은 메시야 왕국이 임할 때에 맺어질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 반역하여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있지만, 그들은 대환란 때에 심판을 받고 민족적인 회심을 할 텐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새 언약을 맺으시어 그들을 위로하시고 회복하실 것이다(사 40:1,2). 그때 유대인들은 그분의 왕국에서 위대하게 될 것이다.
2. 교회와 맺으시는 새 언약 - 교회 시대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은 교리적으로는 왕국 시대에 적용될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교회에 적용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언약의 내용 중에는 그분의 법을 마음 속에 기록한다는 것과 그들의 죄악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 안에는 마음 판에 그분의 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입혀진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언약을 영적으로 적용하지 않더라도, 교회에 해당하는 분명한 새 언약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만찬자리에서 포도주로 예시하신 것인데, 이에 대해서『이는 이것이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마 26:28)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언약은 “그분의 피로 맺으신 새 언약”인 것이다.
이 언약이 새 언약인 것도 이전의 모세의 언약과 대조하여 새 언약이라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특별히 모세의 언약 중 동물의 피와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관점에서 새 언약이다. 구약에서는 용서를 받기 위해 수많은 동물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그것도 죄를 반복해서 지으면 반복해서 피가 흘려져야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피흘리심으로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 동물들의 피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하고 완전하다. 따라서 신약의 구속은 구약보다 더욱 확실하고 안전하다. 이것이 구약에는 성령께서 임하셨다가 떠나가실 수도 있고, 구원을 받아도 잃어버릴 수가 있지만,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임하신 후 절대로 떠나지 않으시고,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이유이다.
이 언약은 피로 맺은 새 언약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야 효력이 발휘되었다(히 9:15). 따라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는 아직 구약적인 부분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존중하지만, 그분의 죽음 이후에는 새 언약에 따른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것은 바울 서신들에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 언약이 “신약”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현재 신약 시대를 이끌고 있는 언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