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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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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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5월호>

성경의 역사는 일곱의 체계로 흘러간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곱이라는 숫자가 하나님의 숫자요, 또한 완전수임을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실 때 일곱이라는 그분의 숫자에 맞게 다루고 계신다.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제 칠일에 쉬셨다. 이것이 기원이 되어 모세에게 주신 율법 하에서는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제정해서 거룩하게 하셨다. 이뿐 아니라 일곱째 해를 안식의 해로 제정하셨으며, 또 일곱 해의 일곱 번을 곱하여 49번째 해가 지난 50년째 해를 “환희의 해”로 선포하기도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있어서 일곱이란 단순히 그분이 창조 사역을 마치고 쉬셨다는 것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곱의 법칙을 통해서 인간들을 다루고 계신 것이다. 굳이 영적인 측면 말고도 자연계에 나타난 현상을 보더라도 일곱의 법칙은 유효하다. 무지개를 통해 보듯이 빛은 일곱 색깔로 되어 있고, 음악도 “도,레,미,파,솔,라,시”라는 일곱 개의 기본 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악은 5음계이며, 일본의 전통 가요도 5음계이고, 현대 음악에서는 12음계를 만든 사람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사람의 몸의 세포도 7년을 주기로 새롭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서 이 “일곱”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분이 다루시는 일곱의 법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 문제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할 것이다.

1. 일곱 체계들

일곱째 날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라 불린다. 물론 그 기원은 창세기 2:1-3에 나오는 하나님의 안식이다. 사람들이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것도 하나님의 이 법칙 때문이다. 이방 나라들도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는 칠 일의 개념이 없었으나, 복음이 전파된 후로는 그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이 법칙에 따라 일하고 쉰다. 이 법칙은 인간 노동의 법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쉬신 것은 단지 “안식”(rest)이었을 뿐, 아직 “안식일”(Sabbath)은 아니었다. 즉 어느 누구에게도 칠 일에 하루를 쉬라는 규례가 주어진 적이 없으며, 창세기에서는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지킨 적이 없다. 안식일은 모세에 의해서 드디어 지켜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제정하신 이후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법이 되었다. 그것은 단지 노동의 법 이상이었으니,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의 “표적”(sign)이었던 것이다. 󰡔또 나는 그들에게 내 안식일들도 주었으니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고 그들로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는 것이라󰡕(겔 20:12). 표적이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알리시는 징조, 또는 언약을 맺으실 때 눈에 보이도록 구체적으로 주시는 언약의
증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표적에는 목적이 있는데, 여기서 안식일이라는 표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성을 확증시켜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철저하게 이스라엘과만 관련된다. 이방인 어느 민족에게도, 심지어 교회에게도 안식일을 표적으로 주지 않으셨다. 교회는 안식일이라는 표적이 없어도 그분과의 관계를 정립시킬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님의 보증에 의해서인 것이다.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주일”(일요일)은 안식일과는 전혀 무관한 별도의 날이다.]

일곱째 주
모든 일곱째 주가 다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일곱째 주가 중요하다. 󰡔너희는 안식일 후 다음날, 너희가 흔드는 제사의 단을 가져온 그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을 마칠지니 너희는 일곱째 안식일 이튿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려서 주께 새로운 음식제사를 드릴지니라󰡕(레 23:15,16). 이 말씀은 오순절을 말하는 구절이다. 15절에서 “안식일 후 다음날”은 초실절인데, 이때부터 일곱 번의 안식일을 센다. 그리고 일곱 번의 싸이클이 돌아 안식 후 첫날이 되어서 50번째 날, 즉 오순절이 된다. 이 날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나온 이름대로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이 날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은 “칠칠절”(출 34:22, 신 16:10,16)이다. 칠칠절이라고 49일째를 말하는 명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명절은 49일을 지난 다음날이다. 만일 49일째가 명절이라면 이 날은 일곱 안식일째의 날이지, 시간적으로는 일곱 안식일이 완전하게 지나지 않은 날이 된다. 즉 “만 49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 49일이 되기 위해서는 50일째가 명절이어야 한다. 결국 오순절은 10의 개념으로 “다섯”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7의 개념으로 “일곱”이 중요한 것이다.
이 명절뿐 아니라 다른 명절들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일곱의 법칙은 뚜렷이 나타난다. 레위기 23장에 제시된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주의 명절”(레 23:4)은 일곱 개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또한 이 명절들 가운데 무교절과 장막절은 칠 일 동안 지켜져야 했다(레 23:6,36)[장막절에는 여덟째 날도 언급하고 있지만, 일곱 날들과 섞어서 “팔 일”이라 말하지 않고, “칠 일”과 별도로 여덟째 날을 제시하고 있다].

일곱째 달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쓰는 달력에 따르면, 그들의 1월은 우리의 3-4월이 된다. 그들이 첫째 달을 삼는 기준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 달이었다. 그 달의 14일에 출애굽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 달을 첫째 달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명절은 그 첫째 달에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있고, 셋째 달에 칠칠절이 있고, 일곱째 달에 나팔절과 속죄일과 장막절이 있다. “주의 명절”에 따르면 그 명절들은 첫째 달에서 일곱째 달 사이에 있다.

일곱째 해
일곱째 해는 보통 “안식년”이라 부른다. 안식년에 대한 기본 개념은 땅에 대한 안식이다(레 25:4). 육 년 동안 땅을 갈아 먹다가 제 칠 년에는 땅을 한 번 쉬어야 한다. 이것은 자연 법칙과도 연관되는데, 실제로 이와 같이 땅을 쉬어주면 그 땅은 그 사이에 더 기름지게 되어 그 다음 해에 많은 수확을 내게 된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가운데 생계 문제가 닥쳤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일곱째 해에도 땅을 간다. 그러나 사람들이 쉬지 않고 땅을 가는 가운데 땅은 점점 더 망가져 수확을 적게 내고, 그래서 사람들은 비료를 개발하지만, 비료를 쓸수록 땅은 더 망가져 간다.

신명기 15장에 보면 이 안식년에는 땅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안식이 되는데, 그것은 이웃에게 빌려준 것을 면제해 주고, 히브리인 중 종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풀어주어야 한다(신 15:1-15).

일곱째 해의 일곱 해(환희의 해)
일곱째 해도 안식의 해지만, 일곱째 해를 일곱 번 지낸 후 다음 해(50째 해)도 매우 중요한 안식의 해이다(레 25,27장). 먼저 일곱 해가 일곱 번 지난 49년째 해의 일곱째 달 10일, 즉 그 해의 대 속죄일에 환희의 나팔을 불고, 그 다음 해인 50번째 해에 자유를 공포한다(레 25:8-10). 이 안식과 자유가 어찌나 컸던지 이 해의 이름은 “환희의 해”라고 불린다. 이 해에는 채무자도 자유를 얻고, 종도 자유를 얻고, 땅도 안식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제정하신 것인 바, 그들이 그 땅, 즉 안식의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들이었다.
오늘날 이 개념을 도입해 아무 해에나 기준없이 “희년”(개역성경에 따른 이름)이라 명명하여 뭔가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카톨릭에서는 A.D.2000년을 “예수 탄생 2000년, 대 희년”으로 선포했고, 우리 나라에서도 독립 5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98년에는 기독교계에서 희년으로 선포한 적이 있으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2. 일곱째 천 년, 대 안식(the Great Rest)

일곱째 천 년은 앞서 말한 모든 “일곱”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로써, 말하자면 모든 일곱들의 원형인 셈이다. 창세기 1:3 이후 펼쳐지는 하나님의 창조 이후로 지구는 칠천 년간 존재할 것인데, 그 중 마지막 천 년은 안식의 천 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계시록 20장에 따라 “천년왕국”이라고 불리는 그 기간이다.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행위와 7일째 되는 날의 안식은 바로 이것의 모형이었다. 창조 주간의 하루하루가 “저녁과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자적인 24시간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표상 그 하루하루는 각각 인류 역사의 천 년씩을 예표한다. 창조 주간의 사역 중 최초의 생명은 넷째 날 이후에 창조되는데(창 1:20), 인류 역사의 4천 년 후에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리고 일곱째 날의 안식이 일곱 번째 천 년의 안식을 예표하게 된다. 따라서 인류 역사의 칠천 년은 구약 4천 년과 신약 2천 년과 왕국 1천 년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물론 신약 2천 년이라 해서 정확히 2000년 1월 1일이나 12월 31일에 교회 시대가 끝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달력이 틀릴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조금 더 기다리실 수도 있다(벧후 3:9). 그러나 여러 가지 예표들과 예언에 따르면 그 날은 얼마 멀지 않았다.
이 “일곱 번째 천 년”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성경의 모든 예언의 궁극적인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가운데 표적으로 주신 안식일도 “안식”이라는 관점에서 천년왕국을 예표한다. 과거 출애굽 당시 여호수아의 인도로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간 것이 하나의 안식이듯이, 대환란을 거쳐서 다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땅에 들어갈 때 그것도 하나의 안식이다(히 4:1). 이 안식 속에서 땅은 쉼을 얻는다.

로마서 8장에 따르면 현재에는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들은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땅은 긴긴 육천 년의 황폐함에서 해방될 것이며, 전쟁의 파괴로부터도 해방될 것이다.

천년왕국은 예언의 완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천년왕국 이후에는 잠시 동안 풀려나는 마귀의 반역으로 인해 하늘과 땅이 불로 심판받을 것이며(계 20:7-11), 그 후에는 영원세계가 펼쳐질 것이다(계 21:1). 이 외에도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든지(겔 38장), 백보좌심판이라든지(계 20장) 하는 것들도 모두 성취되어야 하고, 이 모든 것들은 천년왕국 이후에 성취되는 예언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왕국이 예언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후에 펼쳐지는 영원한 세계가 천년왕국의 연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약 성경의 대부분의 예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기서 천년왕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함은 그 천 년이라는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왕국에서 이루어지는 메시야 왕의 통치를 말한다. 사실 구약의 예언에는 천 년이라는 기간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 왕국이 구체적으로 천 년이라는 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야 등장하는 계시였다.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천 년을 찾는다면 하나님의 창조 주간의 칠 일이라든지, 일곱 번째 날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모형으로 삼아 알 수 있는 것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통치다. 구약적인 개념으로 그분의 통치는 천 년에 한정되지 않고 영원무궁하다(삼하 7:16, 단 2: 44). 신약적인 개념으로 봐도 천년왕국과 영원세계가 나뉘어지는 것은 우주가 불로 소멸되고 새로운 하늘과 땅이 펼쳐지는 것일 뿐, 그분의 통치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천년왕국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고, 영원세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것이다.
혹여 천년왕국 끝에 마귀가 반역하는 모습을 보고 천년왕국도 실패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잘못된 개념이다. 비록 아담의 성품을 가진 인간성의 관점으로 보거나 땅의 관점으로 보면, 결국 멸망할 것이기에 실패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의 의로운 통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능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원한 통치의 한 시점에서 악을 완전히 제거하시는 기점일 뿐이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왕국을 가리켜 “새롭게 되는 때,” “만물이 회복될 때”라고 말한다(행 3:19,21).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년왕국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발맞춰 예수님께서도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직전, 즉 이 시대의 끝을 “세상의 끝”이라 말씀하셨다(마 13:39, 49; 24:3). 이 역시 하늘과 땅이 불로 소멸되는 끝이 아니라 대환란의 끝을 말한다.

왜 천년왕국은 천 년밖에 안되고, 영원세계는 끝없이 긴 영원한 기간인데, 그 영원한 기간에 대해서는 예언이 거의 없는가? 왜 구약의 대부분의 예언들은 그분의 재림과 더불어 펼쳐지는 천년왕국에 맞추어져 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모든 인간들의 헛된 통치를 끝내시고 자신의 의롭고 영원한 통치를 이루시는 시점이기 때문이며, 이때 시작된 통치는 전혀 그치거나 바뀜이 없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년 왕국과 영원세계는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있어서도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저녁과 아침이 되니... 날이더라.”라는 표현이 있는데(창 1:5,8,13,19,23,31), 일곱째 날에 대해서는 “저녁과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이 없다. 실제로 저녁과 아침이 없었겠는가? 분명히 당시에 해가 지고 뜨는 저녁과 아침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실 때 이 표현을 빼 놓으신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일곱째 날과 여덟째 날은 연결되어 있는 날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일곱 번째 날인 천년왕국과 여덟 번째 날인 영원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예표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섯째 날의 끝에 살고 있고, 영원한 일곱째 날을 바라보고 있다. 그 날은 이제 곧 임할 것이다. 6일간의 노동 후에 7일째에 안식을 누리듯이, 우리도 이제 긴긴 세상의 수고를 뒤로 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임할 것이며, 우리는 그날 그분과 함께 이 모든 축복들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날을 기다리며 소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어떠한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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