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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모독하지 말라 (레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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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2월호>
레위기 24장은 23장과 연결되는 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제시한다. 23장에서는 주의 명절들의 규례를 주심으로써, 각 명절들의 의미와 또 그 명절들에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를 알려 주셨다. 이어서 24장의 앞부분에서는 성막에서 섬기는 규례를 설명해 주신다. 그렇다고 성막론을 자세하게 설명할 만큼 많은 규례가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 성막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5장 이하에서 자세히 볼 수 있으며, 제사 자체에 대해서는 레위기 1-7장에서 이미 다루었다. 또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섬기는 모습에 대해서도 8-9장에서 다루었다. 여기 24장에서는 다만 성막 안에서 섬기는 규례의 일부만을 제시해 주실 뿐이다.1. 등불과 빵
등불과 빵은 전체 성막 중 성소 안에 있는 것들이다. 성소 안에는 크게 세 개가 있는데, 제사장이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북쪽)에 빵 차리는 상이 있고, 왼쪽(남쪽)에 촛대가 있으며,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 앞에 금향단이 있다. 상에는 항상 빵이 차려져 있어야 하고, 촛대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어야 하며, 향단에서는 제사장이 들어갈 때 향이 피워진다. 그런데 여기 레위기 24장에서는 등불, 즉 촛대와 빵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등불을 피우기 위한 기름은 “순수한 올리브 기름”이어야 한다. 이 기름은 여러모로 보아 성령을 상징한다. 올리브 기름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붓는 향유의 기본 재료였다(출 30:24). 시편 133:2에 따르면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과 옷깃에 이르기까지 넘쳐 흐르도록 향유가 부어졌다. 이는 성령 충만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특별히 그 기름은 순수해야 했는데, 이는 성령을 상징하는 적절한 묘사일 뿐 아니라, 그 기름부음 받는 대상 역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름으로 밝히는 등불 역시 성령을 상징한다. 이 촛대가 일곱 가지라는 것도 중요한데, 이는 성령을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계 3:1). 촛대는 한 줄기에서 좌우로 세 가지씩 뻗어나가, 모두 일곱 개의 등불로 이루어져 있다(출 25:31,32).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한 영이시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시는 것이다.
무엇보다 촛불이 성령을 상징한다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빵을 차려 놓은 상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빵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데, 말씀을 조명하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밝히 비춰 주시어 깨닫게 하신다.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는 자가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빵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말씀은 여러모로 음식에 비교되는데, 그것은 빵(눅 4:4)뿐 아니라, 젖이나 고기(히 5:12), 꿀(시 119:103), 사과(잠 25:11) 등으로도 비유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의 양식을 먹듯이 매일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이 빵은 기록된 말씀뿐 아니라 성육신한 말씀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나는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48). 죄인들은 누구나 이 빵을 먹어야 한다. 이 빵을 먹는 자는 누구라도 영생을 얻는다(요 6:51,58). 물론 이 빵을 먹는다는 것은 곧 그분을 믿는다는 말이다(요 6:35). 로마카톨릭처럼 일요일 아침마다 그분의 살을 먹는 사육제를 벌이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빵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 빵이 열두 조각으로 차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의미한다. 레위기 24:6,7에 따르면, 열두 개의 빵은 여섯 개씩 두 줄로 놓여져야 하고, 각 줄 위에는 “순수한 유향”을 놓아야 했다. 유향은 향제단(금제단)에서 피워지는 향을 만드는 주재료였다(출 30:34). 뿐만 아니라 유향은 우리 주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받은 예물 중 하나였다(마 2:1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을 상징하는 예물인데(황금은 왕의 사역을, 몰약은 선지자 사역을 상징한다), 그래서 빵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어떤 연관이 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차적으로 유대인의 메시야라는 사실을 보여 주며, 또한 이스라엘은 “제사장들의 왕국”(출 19:6)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여기 제시된 등불과 빵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계속해서 주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레위기 24장 본문에서 이 둘만 언급하고 있는 이유이다. 성막의 다른 모든 것들은 희생제를 드리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번제단은 제물을 태우기 위한 곳이다. 물대야는 제사장들이 속죄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성소 안으로 들어갈 때 손발을 씻는 곳이다. 금제단(향제단) 역시 희생제를 드릴 때 향을 피우기 위한 것이며, 언약궤는 대속죄일에 한 번 대제사장이 맞대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들은 희생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촛불과 빵은 희생제와 관계없이 항상 피워져 있고 또 차려져 있어야 한다.
여기 2절에서 『계속해서 등들에 불을 켤지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이 불이 꺼지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8절에서 『안식일마다 그는 그 빵을 주 앞에 계속해서 차려 놓을지니』(8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그 빵이 계속 거기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음 안식일에 새로운 빵을 갖다 놓을 때 이전 빵을 물리는 것이다(삼상 21:6). 그리고 그 물려진 빵은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먹어야 한다(9절).
다시 말해 빵과 촛불은 성소 안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는 것들이다. 물론 향단의 향 또한 계속 향기를 발한다. 제사장들은 등을 정리하러 들어갈 때마다 아침, 저녁으로 향을 피워야 했다(출 30:7,8). 하지만 향기는 사그라져도 빵은 없어지지 않고 불은 꺼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사물이 상징하는 바는 우리가 예배드리거나 주 앞에 직접 나가는 시간 외에도 항상, 어느 때라도 주님의 임재 앞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온 삶을 통하여 그분께 영광드려야 한다. 레위기의 후반부가 백성들의 성결한 삶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레위기 전반부는 하나님을 향한 법, 경배와 연관된 규례 등을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백성들 상호 간의 규례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별된 행동 규범을 다루고 있다(본지 187호, 「레위기 연구 7」 참조). 따라서 우리는 등불과 빵에 대한 본문의 언급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항상 성별되어 있는 성도들의 삶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온 삶을 통해서 말씀과 성령과 동행해야 한다.
2. 하나님을 모독하지 말라
10절부터는 주제가 조금 바뀌어, 하나님을 모독한 한 사람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가장 악한 범죄라 할 수 있다. 우상 숭배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범죄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성령을 모독하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 하셨다(마 12:31,32).
여기에는 한 사례가 제시된다. 레위기는 전체적으로 구체적인 계명들을 주시는 책이지만, 두 경우에 있어서 사례가 제시된다. 첫 번째 경우는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가 주께 잘못된 불을 드린 것이고(레 10장), 두 번째 경우는 여기, 한 혼혈인이 주의 이름을 모독한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께 대한 범죄였다. 첫 번째 경우도 하나님의 명령을 우습게 여겼으니 그 또한 모독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주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단의 불이란 경배와 연관된 것인데, 하나님의 두려우신 임재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소홀히 여겼다는 것은 주를 무시한 것이다. 그것도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겨야 하는 제사장으로서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매우 큰 것이다.
이 두 번째 경우는 한 혼혈인에 의해 자행되었다(24:10). 혼혈인은 항상 문제의 소지가 된다. 혼혈인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이집트를 빠져 나올 때 하나님의 백성의 편이 되어 함께 따라나온 사람이다. 즉 반은 이집트인이고 반은 히브리인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행해진 하나님의 능력들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이냐 잔류냐 하는 중요한 결정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따라 출애굽을 선택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해 구원받은 이방인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원래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이 없던 자들이다. 그들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스스로를 묶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셨지만, 그들의 문제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종종 갈등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집트라는 세상의 “문화”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광야 생활”은 그들에게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 생활 중 종종 불평을 하게 된다.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선동하기도 한다. 광야로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 고생만 시키는 하나님이 싫었던 것이다. 아마 이 경우에 있어서도 이 혼혈인은 광야의 하나님을 나일 강의 신들과 비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해준 게 뭐가 있냐고 모독하고 저주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혼혈인은 하나님을 저주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혼혈인이라는 이유로는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으셨으나,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책망하셨다. 즉 그를 돌로 쳐 죽이라 하신 것이다(24:14).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하나의 분명한 규례를 확정지어 주셨는데, 즉 누구라도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히브리인이나 혼혈인뿐 아니라, 타국인도 마찬가지다(24:16).
타국인(strangers)이란 외국인을 말하는데, 그냥 외국인이 아니라 ‘어떤 민족 가운데 들어와 사는 다른 민족 사람’을 타국인이라 한다. 단순히 “이방인”이라는 개념과는 조금 다른데,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아닌 모든 민족을 이방인이라 한다면, 타국인이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사는 이방인을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이방 땅에 사는 유대인이 있으면 그 유대인이 오히려 그 땅에서 타국인이 된다. 이스라엘도 이집트 땅에서 “타국인”이었다고 언급된다(레 19:34). 또한 신약에서 그리스도인들도 타국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하는 이 세상은 우리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벧전 2:11). 거꾸로 에베소서 2:12,19에서는 우리가 과거에는 타국인이었으나 이제는 타국인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족”의 관점에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그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타국인이다.
이처럼 타국인과 이방인에 대한 구별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외국 땅에 있는 이방인들은 어떤 우상 숭배를 한다 해도 그것을 일일이 다 책망하지는 않으신다. (물론 그러한 죄들이 가득 찼을 때 민족적인 심판을 내리기는 하신다.) 하지만 이스라엘 경내에서는 누구라도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통치 질서 안에 들어와야 한다. 누군가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악한 행동을 한다면, 그 죄는 이스라엘을 급속도로 오염시킬 것이고, 급기야는 “땅이 그들을 토해 낼” 정도까지 될 것이기 때문이다(18:28). 반면 이스라엘 안에 있는 타국인들은 보호와 친절의 대상이 된다. 레위기 19:33,34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사랑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방인 자체, 특히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인들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다. 그들은 심판의 대상이다.
본문에서 혼혈인을 강조한 것은 세상 지향적인 사람이 성도들 가운데 있을 때 생기게 되는 위험성을 잘 경고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문제다. 혹은 성도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육신과 성령의 영적 전쟁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때 성도는 “육신을 억제하여 복종”시켜야 한다(고전 9:27). 마찬가지로 율법에서도 타국인들을 복종시켜야 했다. 즉 타국인들도 율법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죽이는 이 상황이 구약 신정국가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 시대에 적용하면 큰일난다. 오늘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모두 처단해 버리고 싶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정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오해한 자들이 로마카톨릭이고 또 개혁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 교회를 구약 유대인 신정국가와 동일시했다. 카톨릭은 자기들이 믿고 행하는 바가 성경적이지도 않으면서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교회의 이름으로 벌하고 죽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보다는 나았으며, 그들은 성경적 믿음을 다소 실행하려 했다. 하지만 자기들이 성경적이라고 믿는 바와 반대되는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는 세상 행정관들을 동원하여 가차없이 칼을 들이댔다. 칼빈은 제네바를, 쯔빙글리는 취리히를 신정국가로 만들려 했는데, 그 모델은 구약 이스라엘이었다. 크고 작은 죄인들이 도덕법이 아니라 종교법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며, 그들과 교리적으로 달리했던 수많은 재침례교도들 역시 목숨을 잃었다. 개혁자들은 성경을 들이대며 수많은 사람들을 처단했지만, 그 대상이 종교적으로 옳든 그르든 그들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구약의 경륜에 속한,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에게만 허락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약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칼이 아니라 말씀으로 다가가야 한다. 믿음을 달리한다고 칼을 들이대는 것은 모슬렘이나 하는 짓이다.
3. 율법의 엄격함
17절부터는 율법의 엄격한 모습, 즉 인과응보라는 율법의 속성이 잘 드러나는 구절들이다. 주로 살인과 상해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법칙은 행한 대로 갚아 주라는 것이다.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17절). 이것은 사실 창세기 9장에서 확정된 법이다. 율법은 이를 다시 한번 강조했을 뿐이다. 따라서 사형이 구약의 법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폐지되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폐지하신 적이 없다. 단지 하나님의 법을 반대하는 세상 국가들이 폐지할 뿐이다. 살인자를 사형에 처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을 죽였기 때문이다(창 9:6). 사형폐지론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고귀한” 생명을 어떻게 사형에 처하냐고 반문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고귀한” 생명을 죽였기 때문에 사형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형폐지론자들은 아무리 사형을 해도 살인은 줄어들지 않고 범죄자들은 교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언제부터 형벌이 “교화”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는가? 성경에서 형벌은 “복수”의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창세기 4:10에서는 카인에게 죽임당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다고 말씀하신다. 그 피가 사랑이나 용서를 부르짖었겠는가? 그 피는 복수를 부르짖은 것이다. 레위기 26:25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대적한 죄인들에게 “복수”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민수기에서 도피성읍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 피의 “복수자”로부터 피하도록 마련된 곳이다(민 35:12).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복수를 개인적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롬 12:19).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복수를 실행하게 하시는데, 그 중 하나가 국가를 통해 형벌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행정관들이 “하나님의 일꾼”인 이유이다. 『그는 너에게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일꾼이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면 두려워하라. 이는 그가 헛되이 칼을 가지고 다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행하는 보응자니라』(롬 13:4).
이어서 18절은 짐승을 죽인 자는 짐승으로 변상해야 한다 말씀하고, 19,20절은 상해를 입힌 자는 동일하게 상해를 입혀야 한다고 말씀한다. 이 또한 살인과 동일한 관점으로 지켜져야 하나, 다만 다른 것은 살인과 달리 이런 규례들은 율법하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사형은 율법 이전에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복수나 보상이라는 관점은 지켜져야 하되, 반드시 이와 같은 방법 그대로 오늘날 지켜질 필요는 없다. 신체형으로 주는 형벌은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복수와 보상은 이루어져야 한다. 손해받은 자가 스스로 용서할 수는 있지만 국가나 사회가 임의대로 용서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국가는 이 법을 행하라고 주어진 세상 기구이지 용서하라고 주어진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법들을 도덕법이라 한다. 도덕법들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도 지켜야 하는 법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속에 양심으로 심어 놓은 법이다.
하지만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용서할 수 있다면, 용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22).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용서하시고 세상 모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의 진노가 비록 십자가 위의 그 어린양에게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 결과로 우리 모두는 용서를 받았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엄격한 율법보다도 은혜의 법이 우선된다. 우리에게 용서와 자유를 허락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자.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