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쟁 분류
악령들의 압박에 능동적으로 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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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10월호>
그리스도인은 "거절"이란 말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해야 한다. 간략히 말해서 거절은 수용의 반대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 악령들의 제안을 수용해 왔다면, 그들은 우리 안에서 많은 거점들과 통행권을 확보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그동안 빼앗겨 왔던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다시 회수함으로써 악한 영들은 그런 권한을 잃게 된다. 즉 과거에는 자신의 "의지"가 악한 일들을 수용하는 데 사용되었다면, 이제는 악한 일들을 끊임없이 거절하고 대항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이상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했다면 그것을 적용하는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거절"은 하나님을 향해서든 사탄을 향해서든 그 원리가 동일하다. 우선 인간은 하나님을 거절할 수 있다(렘 13:10). 이스라엘 백성은 어깨를 빼고 귀를 막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기를 거절했다(슼 7:11). 이런 자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조금도 역사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 안에는 그분의 영이 들어가실 수 있지만, 그분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들어가실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의지적으로 악령들을 거절하면, 자신을 향한 악령의 역사를 막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을 때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처럼, 악령들을 거절할 때에도 그렇게 하려는 분명한 마음속 의지를 입으로 선포해야 한다. 원수들과 싸울 때에 다음과 같이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내게 임한 악령들의 모든 권세와 영향력을 거절하노라!" "나는 악령들이 유익을 취할 수 있는 모든 거점과 그 원인들을 거절하노라!"
능동적인 대응이 최선의 방어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미혹의 영들에게 거점을 내주는 것을 지속적으로 거절하다 보면, 그의 영은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되고 원수의 간교한 속임수가 더욱더 폭로되어 마귀가 그동안 얼마나 교활하게 속여 왔는지 절감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마귀에 대한 깊은 적대감도 갖게 된다. 그런 가운데 "주적 개념"이 똑바로 서고 대적을 향한 "투지"가 불타오르게 되면, 우리는 더욱 진지한 자세로 영적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치열한 전투 경험이 축적되면 될수록 영적 전쟁에 대한 실전 지식과 경험, 그리고 대적에 대한 방어 능력은 증가하게 된다.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악령의 거점들도 쉽게 발견하고, 흑암의 권세들에 대한 진리와 승리의 비결도 터득하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는 이러한 진리를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으로부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진리를 실제로 활용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제로 스스로 깨어 기도함으로써 성령님과 동역하지 않으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적으로부터 지켜 주시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가 성령님을 의지하여 능동적으로 원수에게 저항할 때 온전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를 기만해 왔던 악령들의 속임수의 흔적은 우리가 그 미혹의 구덩이에서 구출된 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의 감정과 신경계에 남게 된다. 예전의 견고했던 방벽은 악한 자의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일단 손상이 되고 나면 재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원수의 속임수와 사로잡힘으로부터 벗어난 성도들은 "의지와 선택"이라는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공격적으로 원수에 맞서 대항하는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 이렇게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영 안에서 기도로 분투하라
악령들의 목표는, 성도들의 영을 쇠잔하게 만들어 더 이상 자기들에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마귀는 계속해서 성도들의 영을 압박하는데, 이쯤 되면 성도는 자신이 마치 "감금된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는 "거절하는 의사"를 음성으로 발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기도하려 해도 자신의 기도가 마치 "공허한 말"같이 아무런 효력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현상은 그의 영이 원수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영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스스로 소리를 내어 기도로 분투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는 영의 표현이 혼과 몸을 통해 표출되기 때문이다.
한편 커다란 승리가 오히려 커다란 위기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종종 그리스도인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데, 마귀는 이미 그의 영의 틈을 포착하여 그 상황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릴 만한 기습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승리의 순간에는 더욱더 냉철하게 생각하고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승리로 인해 조금이라도 의기양양해 있게 되면 곧바로 패망의 구덩이에 빠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다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길고도 격렬한 전투를 치러야만 한다.
영의 중압감을 방치하지 말라
기도는 영적 전쟁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분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단순한 간구가 아니고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신(마 28:18) 그리스도의 권위를 원수들을 향해 선언하는 기도이다. 성도는 기도를 위해 싸워야 할 때가 있고, 또 싸우기 위해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 싸울 수 없다면 기도해야 하고, 기도할 수 없다면 싸워야 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영이 중압감을 느낄 때 성도는 그런 압력을 일으키는 모든 원인들을 거절함으로써 그 압력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싸우기 위해서, 또 악령의 역사를 간파해 내는 분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이 아무런 짐도 지지 않은 가벼운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이 지니는 섬세한 감각이 그 영을 누르는 "무게"로 인해 둔감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악령들은 자기들이 그 영을 짓누르게 만들었던 "짐들"을 성도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거나 알더라도 그 짐들을 처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 두게 만들려고 애를 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의 영을 둔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일 아침에 자신의 영이 "중압감"을 느꼈는데도 처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온종일 "승리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중압감을 처리하려면 중압감을 감지한 바로 그 순간에, 즉시로 그리스도의 영 안에 "서서"(엡 6:14) 흑암의 세력들에게 "저항"하고(엡 6:12) "대적"해야(약 4:7) 한다. 이러한 모습은 모두 영의 능동적인 활동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혼이나 몸의 단순한 행동 또는 상태 및 태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서는 것"은 원수의 공격적인 행동을 물리치는 활동이고, "저항하는 것"은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굳게 버티는 것이며, "대적하는 것"은 능동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2:11에서는 큰 용, 즉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한 환란 성도들에 대해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거한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한다. 물론 이것은 교리적으로 환란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구절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도 영적으로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즉 영적 전쟁의 승리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는 성도는, ① 우선 어린양의 보혈의 근거 위에 서야 한다. 이 보혈은 갈보리에서의 사역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② 성도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분을 통해 얻은 확실한 승리와 죄와 사탄에 대한 자신의 결연한 태도를 선포해야 한다. ③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겠다는 태도로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한다.
이처럼 성도는 영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능동적으로 흑암의 세력들을 대적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치열한 전투가 수반된다. 능동적으로 대적하는 자세를 끊임없이 견지하고 악한 영들의 역사를 거절하면서 기도 가운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면 주님과의 연합은 더욱 깊어지고 영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영원한 승리를 소유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는 사실로 인해 주님께 모든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