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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시대 (1) 죽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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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10월호>
지난 8월, SBS에서는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2부작 “불멸의 시대”를 방송했는데, 제1부에서는 “기계 인간 - 사이보그와 디지털 트윈”을, 제2부에서는 “냉동 인간”을 다루었다. 1부와 2부 모두 죽음을 거부하고 극복하여 불멸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죽지 않겠다”는 생각은 특권 계층의 특정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생각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넓게 확산되고 있다.제1부 내용은 그 시작부터 죽음에 관해 상당히 도발적이었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21세기 의학팀의 “로버트 매킨타이어”는 “우리는 모두 죽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는 게 당연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딱히 아니라고 답할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비극이에요.”라고 하면서, 이제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비극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래학자이자 냉동 보존 신청자인 “호세 코르데이로”도 “불멸은 가능해질 것이며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는 실제로 ‘죽지 않는 것’을 바랍니다. 죽고 싶지 않으며 죽을 계획도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마치 자신이 죽지 않겠다고 결정만 하면 실제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 양,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말한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사이보그”와 “디지털 트윈”을 소개했는데, 이를 위해 “최초의 사이보그”라는 수식어가 붙은 “닐 하비슨”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닐 하비슨은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색맹”이었지만, 빛의 파동을 감지하는 안테나를 후두부에 장착함으로써 안테나가 감지하는 색의 파동을 소리로 듣는다고 했다. 이를테면 파란색은 “도,” 보라색은 “레” 등의 음으로 들리는 방식인 셈이다. 그는 “사이보그가 되면서 시간의 흐름이 긍정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 기술이 더 좋아지기 때문이죠. 나 스스로가 과학 기술 그 자체라면 나 자신의 일부가 앞으로도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죠.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즉 안테나를 후두부에 장착하여 사이보그가 되면서부터 질병과 노화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방송에서는 가상 현실 공간에서 “또 다른 자신”을 복제하는 “디지털 트윈”이라는 기술도 소개했다. 사실 이 “디지털 트윈”은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에서 주창한 개념으로, 컴퓨터 안에 현실 속 사물의 쌍둥이를 만들어 놓고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예측된 결과를 현실에 반영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을 인간 개개인의 영역까지 확장해서 사람의 음성, 사진, 기억 등의 데이터를 통해 “가상의 나”를 만드는 것에 활용하고 있다. 이에 방송에서는 영국의 로봇 과학자이자 루게릭병 환자인 “피터 스콧”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표정과 목소리를 학습시킨 디지털 트윈 “피터 2.0”을 소개했다. 피터 스콧 역시 “나는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을 거부하는 자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즉 디지털 트윈인 피터 2.0이 자신의 삶을 이어 나갈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한편 국내 사례로는 “아내를 잃은 한 가장”과 “췌장암 4기인 한 청년”을 등장시켜서, “사별한 아내”와 “암 투병을 하는 청년”의 디지털 트윈을 제작하는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다. 방송 말미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의 “유성호 교수”가 나와 이렇게 말했다. “공상 과학에 존재하는 ‘팔다리 교체’ 그리고 랜선이나 클라우드상에 존재하는 과학 기술 발달에 따른 ‘마인드 업로딩’ 등 누군가가 실험하고 이론을 세우면서 도전한 것들이 켜켜이 쌓여 결국에는 어떤 발견이 이뤄지는 것처럼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어요. 미래를 향한 진보 또는 전진이라고나 할까요?” 말하자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언젠가는 인류가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미래를 제시한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몸에 기계 장치를 이식하고 디지털 트윈을 만들면서 자신의 의식을 업로딩하려는 일련의 행위들은, 결국 “트랜스 휴머니즘”으로 귀착된다(본지 통권 316호, p.25, 통권 318호, p.26 참조). 사실 트랜스 휴머니즘의 현실은 방송에서 다루었던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그런 충격적인 현실 대신에 가정의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 루게릭병과 암 투병 중인 환자 이야기 등 “인본주의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감수성”을 가미함으로써 죽음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인간의 감성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반드시 죽게 될 사람들에게 “인간이 죽는다는 현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또한 사람들에게 과학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희망을 심어 주어 알게 모르게 “과학이라는 신”을 맹신하도록 한다.
결국 방송은 엄밀히 말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을 노예로 속박된 채”(히 2:15)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죽기 싫다면서 날뛰고 헤매는 무지한 군상들의 불쌍한 모습만 여실히 보여 주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있는 단순한 비극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가 죽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선언한다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더욱이 진보하는 과학 기술에 힘입어 인간이 사이보그가 되거나 디지털 트윈을 만든다고 해도 결코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히 9:27).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을 인간이 자기의 노력으로 거스를 수 없다. 다만 오늘날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신”을 앞세워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을 거슬러 보겠다고 무의미한 도전을 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구성된 존재인지도 모르기에, 오직 “몸,” 곧 “육체”의 죽음에만 연연해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인간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진 존재다(살전 5:23). “인간의 삼중성”은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나타났다. 즉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아담의 “몸”을 만드셨고, 그의 콧구멍에 생명의 호흡, 곧 “영”을 불어넣으셨더니 아담에게 살아 있는 “혼”이 생겨난 것이다(창 2:7).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했던 날에 곧바로 죽은 것은 다름 아닌 아담의 “영”이었다. 그 결과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창 1:26)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형상대로(창 5:3), 곧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다. 인간의 이러한 상태는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살리셨으니』(엡 2:1)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마 8:22)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영”이 죽은 자들로 “몸”이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이렇듯 “죽음”은 한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해 세상으로 들어왔다. 『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롬 5:12). 그 죄성을 물려받은 인간은 죄악 중에서 태어났고, 또 그 죄로 인해 반드시 죽게 된다. 『보소서, 내가 죄악 중에서 조성되었고 죄 중에서 내 어머니가 나를 배었나이다』(시 51:5).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다시 말해 “영”이 죽은 채로 태어난 인간은 “몸” 또한 죽게 되는 것이다. 영이 죽어 버린 “몸”은 썩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변했으며(고전 15:42,43), 죽은 후에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 벌레로 뒤덮이고 만다(욥 21:26). 이로 인해 “아담”은 930년의 연수를 채우고 죽었다(창 5: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수를 계속 줄이셔서 노아의 대홍수 이후로는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인 백 년도 채 되지 않는 생애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에게는 “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을 가진 “인간의 혼”은 사람의 본질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구원받지 않은 혼은 반드시 “둘째 사망”이라는 죽음에 직면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백보좌 심판”에 서게 될 모든 죄인에게 최종 선고를 내리실 때 그 혼이 불못으로 던져지는 것이 바로 “둘째 사망”인 것이다(계 20:11-15). 심각한 문제는 “혼”은 몸처럼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혼의 죽음”은 소멸이 아니며, 영원한 불못으로 던져져 밤낮 쉬지 못하고 고통받으면서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영원을 그곳에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계 14:11).
소위 현대의 지성인들은 그저 “몸(육체)의 죽음”에만 연연한 나머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온 세상보다도 귀한 “혼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채 “육체의 죽음을 거부하는 자들”의 요구조차 문자 그대로 들어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마냥 기뻐하고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이는 그것이 육체에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일은 대환란 기간에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일어날 것인즉(계 9:1-11), 말과 같은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여인들의 머리카락과 사자의 이빨을 갖고 있으며, 전갈과 같은 꼬리를 가진 “초자연적인 메뚜기들”이 등장하면서 그 일을 수행할 것이다. 『또 그들에게 명령이 내려지기를 그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오직 다섯 달 동안 고통만 주라고 하는데, 그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의 고통과 같은 것이라. 그 날들에는 사람들이 죽음을 구하여도 찾지 못할 것이요 또 죽으려고 애를 써도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라』(계 9:5,6). 이 시대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자들”의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히려 그날에는 많은 이들이 죽으려고 발버둥을 치겠지만, 이번에는 죽음이 그들을 피해 가 버린다.
한편 방송에서는 “지금의 시대는 죽음이 일상이 된 시대”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끊이지 않는 각종 사건 사고와 코로나19 바이러스, 더 빈번해지는 자연재해 등이 한몫하고 있다. 하지만 유사 이래로 죽음이 일상이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는가! 그런데도 오늘날에는 도리어 “일상이 된 죽음”을 거부하려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과학이 발전하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과학”에 헛된 소망을 두고 있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대단히 잘못 찾은 것이다. 그야말로 종교가 되어 버린 과학을 맹신할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야 한다. 자신의 모든 죄를 제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영생을 보장받을 기회가 죽기 전까지는 주어져 있다. 절대로 그 소중한 기회를 뒤로 미루지 말라! 이는 『사람이 존귀에 처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들과』(시 49:20) 같을 뿐이고, 『사람이 존귀할지라도 오래 살지 못하니 그가 멸망하는 짐승들과』(시 49:12) 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아주 고집스럽게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한 채, 과학을 신으로 떠받치고 맹신하며 영원한 멸망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이런 자들에게는 더 극심한 형벌만이 예비되어 있을 뿐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발 아래 짓밟고 또 자신을 거룩케 한 그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 은혜의 영을 모욕하는 자가 얼마나 더 심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지 생각하라』(히 10:29).
성경은 “죽음”에 대해 혼이 몸에서 떠나는 것이라고(창 35:18)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다. 그렇다면 몸에서 떠난 혼은 어디에 있게 되는가? 『그러나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참으로 사람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는가?』(욥 14:10) 이에 대해 분명하게 답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필경 지옥으로 가고 있는 사람이다. 육신의 죽음에만 연연한 나머지 자신의 “혼의 문제”를 경시하지 말라.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라. 그러면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고,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음부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외칠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대신 과학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들은 결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감성에 따른 결정이나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 온 세상보다 귀한 자신의 혼을 “둘째 사망”에 내어 주지 말아야 한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자신이 져야 한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과학인가?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