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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와 멜란히톤의 성별과 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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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10월호>

장준익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리히 츠빙글리는 1484년 1월 1일 스위스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빌트하우스의 행정관이었기 때문에 츠빙글리는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바젤대학에서 1504년 인문학 학사로 졸업하고 2년 후 석사 학위를 받았다.바젤에서 그는 토마스 비텐바하(1472-1526)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성경이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권위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 그리고 카톨릭의 면죄부가 어떠한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1506년에 츠빙글리는 글라루스의 교구 사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고전, 성경 등을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되었고, 그 지역의 존경받는 사제로 활동하였다. 그 후 글라루스 파견대의 군종 사제로서 1512-1515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그 지역 용병들과 함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는데, 그러한 용병 활동이 죄악임을 확신하고 용병 관례를 비평하였다. 1516년에는 아인지델른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그곳에서 설교자와 학자로서 명성이 더욱 커졌으며, 면죄부 판매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1518년에 츠빙글리는 취리히에 있는 대(大) 민스터 교회의 유급사제로 선출되었는데, 계속해서 용병 제도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설교를 함으로써, 결국 취리히의 시 정부가 용병 제도를 폐지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츠빙글리가 본격적으로 개혁 운동을 시작한 것은 1522년이었다. 그는 사순절 금식이 비성경적임을 주장했고, 일부 시민들이 이에 따라서 사순절 금식을 하지 않았다. 시 정부는 성경은 금식을 의무로서 규정하지 않지만 사순절 금식은 좋은 의식이므로 준수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성경을 증거로 하여 사순절 금식을 비판했고, 더 나아가 성직자들의 독신제도가 비성경적임을 주장했다. 주 정부는 그가 주장한 내용들을 도입했고, 1523년 1월 성경만을 권위로 삼은 공개 토론이 이루어졌다. 츠빙글리는 이 토론을 위한 67개 조항을 준비했는데, 그 조항들에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있다,” “선행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카톨릭의 성자들은 중보자가 아니다,” “연옥은 존재하지 않는다”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심을 선언했다. 토론한 결과 시장이 츠빙글리의 가르침을 인정하게 되었고, 취리히 자치주는 그렇게 해서 실제적으로 츠빙글리의 견해를 채택했다.

1524년에는 성상과 유물이 교회에서 제거되었고, 수도원들이 해체되었으며, 그 재산은 교육과 빈민 구제를 위해 사용됐다. 미사도 1525년에 폐지되고, 예배는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드려졌다. 이러한 변화는 스위스의 다른 지방과 인근 독일지역의 교회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종교 개혁이 진행되자 개신교도에 대한 카톨릭의 탄압이 가중되었는데, 개혁가들은 이에대비한 회의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529년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신칭의, 세례에 관한 문제 등 14개 조항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았지만, 주의 만찬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를 보였다.카톨릭이 주장하는 “화체설”을 배척하는 데는 동의했지만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츠빙글리는 “빵과 포도주가 오직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바르게 주장한 반면, 마틴 루터는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질적으로, 양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임하지는 않지만, 본질적이고 실체적으로 임재한다”는 편재설을 주장했다. 이로써 개신교 진영의 연합이 무산되어 개혁가들의 힘이 분산되었다.


츠빙글리가 로마카톨릭으로부터 성별한 것은 매우 잘 한 일이지만, 그는 칼빈처럼 비성경적인 예정론을 주장함으로써 구원에 관한 큰 오류를 퍼뜨렸다. 또한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유아 세례를 권장하는 오류를 범했는데, 루터가 유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유아 세례를 권장한 반면, 츠빙글리는 유아 세례를 교회의 권위를 향상시키는 수단으로서 권장했다. 또한 그는 정부가 교회를 감독하고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교회를 온전한 성별로 이끌지는 못했다.


필리프 멜란히톤은 1497년 독일 남부 브레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영주의 병기 관리자로 일하며 옮겨 다니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는 할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1세경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망으로 포르츠하임의 친척 요하네스 로이힐린(1455-1522)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로이힐린은 독일 최초의 히브리어 교과서를 저술한 학자였다. 멜란히톤에게 본명인 슈바르체르트 대신 멜란히톤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사람도 로이힐린이었다.

멜란히톤은 15세가 된 1512년에 튀빙겐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고, 21세인 1518년에는 비텐베르크대학의 헬라어 교수가 되었다. 원래는 군주 프리드리히가 로이힐린을 초빙했으나, 로이힐린이 “에라스무스를 제외하고 독일에 멜란히톤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라며 멜란히톤을 추천했고, 군주 프리드리히가 그것을 수용했기 때문이다.멜란히톤이 처음 비텐베르크에 도착했을 때는, 타인의 추천으로 교수가 된 데다 외모마저 왜소하여 실력에 관해 의심과 조롱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3일 후 첫 강의를 하자마자 그의 뛰어난 강의에 당시 비텐베르크의 교수였던 루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다고 한다.


멜란히톤은 1518년에 헬라어 교과서와 <헬라어 문전>을 집필하였고, 1525년에는 <라틴어문전>을 집필했는데, 특히 <라틴어 문전>은 1734년까지 약 200년 동안 51판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루터는 1511년 에르푸르트대학에서 비텐베르크대학으로 옮겨 강의를 하게 되었고, 1512년 신학 박사가 된 후, 1513년부터 성서학을 강의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 궁정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것이 1517년의 일이었으므로, 루터와 멜란히톤은 1518년 이전에 이미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만남 이후 멜란히톤은 루터에게서 신학을 배웠고, 훗날 “나는 루터에게서 복음을 배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520년 10월, 루터는 이단으로 선포되었고 군주 프리드리히의 보호하에 바르트부르크의 성에 숨어서 헬라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이 번역 작업에 멜란히톤이 적극 참여했고 그의 뛰어난 헬라어 실력으로 인해 루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멜란히톤은 헬라어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역시 능통했기에 훗날 루터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때도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521년에 멜란히톤은 신학 교리서인 <신학총론>을 출간했다. 멜란히톤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매우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에도 매우 높은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루터는 멜란히톤에 대해 그가 위의 두 언어뿐만 아니라 신학에 있어서도 자신을 능가한다고 말한 바 있다.


1530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렸던 제국 의회에서 낭독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은 멜란히톤이 작성했다.<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카톨릭이 주장하는 전통이 아닌 성경 말씀에 있다.”라고 공개적으로 공표한 문서이다. 멜란히톤이 문서 작성에 책임을 맡은 이유는 루터가 이미 추방을 당한 신분이었기에 그곳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는 가지 못하고 그 근처에 머물렀다. 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당시 제국 의회에서는 반박되어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이후 개신교 진영의 슈말카텐 동맹과 그 외 다른 신앙고백에도 영향을 미쳤다. 멜란히톤의 뛰어난 실력과 동역자로서의 능력으로 인해, 루터는 그를 “하나님이 보내 주신 가장 소중한 도구”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독일의 비텐베르크시 청사 앞에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어서, 멜란히톤의 위상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멜란히톤이 카톨릭으로부터 성별하고 종교 개혁에 이바지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화합주의자”였고,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조차도 카톨릭을 대적하는 입장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신앙이 카톨릭도 인정하는 신앙의 기반 위에 서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카톨릭을 인정하고, 카톨릭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하며 기록된 문서였다. 즉 멜란히톤은 온전한 성별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카톨릭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하기 위해 평화와 타협을 추구하는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온전한 성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지 못한 것이다.


츠빙글리와 멜란히톤은 루터로 인해 촉발된 종교 개혁에 어느 정도 기여한 인물들이었지만, 우리는 이 두 사람에게서 국가와 카톨릭과의 “타협”이라는 어두운 그늘을 보게 된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원칙을 지키지 못할 때, 또 계시록의 창녀인 카톨릭의 치마폭으로 되돌아가려 할 때, 교회의 진정한 개혁은 이뤄질 수 없다. 즉 과거의 종교 개혁은 미완성이었다. 참된종교 개혁은 교회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를 붙들며 교제권에 있어서 성경적인 성별을 이룰 때 완성됨을 알아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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