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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은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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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10월호>

한승용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교수



칼빈은 종교 개혁 이후로 우상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몹시도 싫어하시는데, 『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움』(눅 16:15)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진면모는 그를 추앙하는 자들의 입에 있지 않고 그의 말과 행적에 있다. 지난 500년간 칼빈에 대한 평가는 몹시도 과장되었으며, 이제 그 망상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예기치 못한 “회심”


칼빈의 회심은 “예기치 못한 회심”이라는 말로만 설명되고 있다. 아무도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모른다. 다만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 기록된 글귀로 어둠 속을 더듬듯 추측할 뿐이다. “하나님은 내 나이에 비해 매우 고집스러웠던 나의 영혼을 예기치 못한 회심을 통해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갖도록 정복하셨다”(<칼빈의 생애와 신학>, 부흥과 개혁사, p.48). 여기서 칼빈은 그의 “회심”을 통해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배우는 자의 자세”가 혼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전에는 가르치려 들거나 배움을 거부했는데 “예기치 못하게” 태도를 바꿔 겸손히 배우기 시작했다는 뜻인가? 헤르만 셀더르하위스는 위와 같은 칼빈의 회심을 “불신 상태에서 믿음으로 전환한 것이라기보다는, 교리를 더욱 순수하게 정화시킴으로써 교회를 변화시킨 것”으로 봐야 한다고 해석했다(<칼빈>, KOREA.COM, p.31). “배우는 자의 자세”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셀더르하위스의 해석은 정확하기가 그지없다.

칼빈의 <시편 주석> 서문이 그의 회심을 성경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칼빈의 회심 자료는 사실상 전무하다. 반대로 신약교회사를 장식했던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가 언제 어떻게 회심했는가를 증거했다. 따라서 로마카톨릭에 항거하여 교회를 개혁했다는 이가 예수님을 언제 어떻게 믿고 구원받았는지를 전혀 간증하지 않았다면 칼빈의 구원은 의심해 볼 만하다. 한 사람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일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 그 일생일대의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든 간증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사람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여기겠는가? 사도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난 사도행전 9장 사건을 사도행전 22장에서 동료 히브리인들에게 증거했고, 26장에서는 아그립파왕에게 증거했다(행 22:6-8; 26:13-15).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가 만난 분에 관해 이야기하는 법이다. 안드레가 형제 시몬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요 1:41)라고 했던 것처럼,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또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사람을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요 1:45)라고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가 만난 주님에 관해 반드시 이야기하는 법이다. 칼빈이 “마음으로부터 복음에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면”(롬 6:17,18), 자기 마음에 가득한 것을(마 12:34) 왜 입으로 말하지 않았겠는가?(롬 10:10)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하는 것은 마귀들도 하는 일이다(막 3:11). 자신의 구원에 관한 칼빈의 침묵은 그의 실체에 관해 심각한 의문을 일으킬 뿐이다.

“배우는 자”의 스승 “어거스틴”


자신을 “배우는 자”로 제시한 칼빈이 그의 5대 강령을 배운 것은 “어거스틴”에게서였다. 어거스틴을 “가장 순수하고 원시적인 교회의 선생”으로 여기고 그에게서 배웠으니, 칼빈주의의 기원은 “어거스틴”이다. 자신이 집필한 <기독교강요>에서 어거스틴을 매우 자주 인용할 정도로 칼빈은 어거스틴을 자신의 이단적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으로 삼았다. 종교 개혁 당시 로마카톨릭과 재침례교도들 사이에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칼빈은 그 둘 사이에서 어거스틴의 교리와 권위에 호소하면서 오늘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 불리는 이단 교리를 정리했다.


칼빈이 추종한 어거스틴은 로마카톨릭 교리를 형성한 사람이기도 했다. 로마카톨릭에서 발견되는 거의 모든 오류는 어거스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어거스틴은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카톨릭의 창시자였다. 로마카톨릭에서 가르치는 유아 세례, 림보, 연옥, 세례 구원, 화체설 등을 만든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 칼빈이 채택한 어거스틴 교리의 요점은 “예정론”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누군가를 구원으로 예정하고 다른 누군가를 지옥으로 유기했다는 그 사악한 교리는 어거스틴이 칼빈보다 천 년 전에 가르친 것이었다. 이 예정론은 아무리 “하나님의 의”를 강조한다 해도 “복음”이 될 수가 없다. 어거스틴은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견인” 교리들도 창시했다. 칼빈이 회심과 관련하여 언급한 “배우는 자의 자세”가 엉뚱하게도 어거스틴의 이단 교리를 교회 내로 가져오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러한 칼빈은 “거짓 교사”였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교회에도 거짓 교사들이 있어 왔다. 어거스틴의 저주받을 이단 교리를 교회로 들여온 칼빈은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지난 500년간 자신의 이단 교리를 추종하는 이들의 급격한 파멸을 가져온 장본인이었다(벧후 2:1).

“교회의 징계”에 대한 병적인 집착


필자가 칼빈의 생애와 관련된 자료들을 읽어 나갈 때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교회의 징계(권징)”와 “교회의 치리” 같은 용어들이었다. 칼빈은 그가 “통치”하던 제네바시에서 교회가 정부를 대신해서 징계의 권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네바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도시로 만들기를 원했는데, 그가 사용한 방법들은 그를 “폭군”으로 비치게 했다.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연합을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1541년부터 1546년까지 제네바에서는 58명의 사람이 처형되었으며 76명의 사람이 제네바로부터 축출되었다. 제네바는 제반 주요 안건에 대해서 늘 칼빈과 상의하였고 대부분 칼빈의 조언대로 따랐다. 이때부터 시작된 제네바에서의 신문 검열(press censorship)은 19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공중예배에 참석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감시원들을 시켜 그 사람들이 예배 보러 가는지 살피기까지 했다. 설교를 듣는데 웃었다고 해서 세 사람이 3일 동안 징역을 살기도 했다. 사형도 수시로 내려졌으며, 어떤 소녀는 자기 부모를 때렸다고 해서 참형을 당했고, 어떤 사람은 무당이라고 해서 화형에 처해졌다.”(<극단적 칼빈주의의 이해>, 말씀보존학회, p.44,45). “전방위로 사람을 감시하고 이웃의 죄를 고발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였던 제네바 같은 도시에서 사는 것은 끔찍했을 것이다”(<칼빈>, p.181). 이와 같은 칼빈은 교회의 조직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교회에 징계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한다(Ibid, p.184). 칼빈의 삶에 활력을 준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봉사를 위한 “교리”와 “징계”였다고 하니(<칼빈의 생애와 신학>, p.255),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 폭력과 공격성을 사용하는 “가학성 인격 장애”와 타인의 믿음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교리적 폭정(暴政)” 외에 그의 사역을 설명할 용어가 없다.

칼빈은 1541년 초부터 종교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에서 온갖 잘못된 것들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러한 “폭정”은 1555년 이후 더 빈번히 시행되어 1555년경에 연간 약 80건이던 치리가 1556년에는 두 배로 늘어났고, 1557년부터 1561년까지는 매년 세 배로 증가했다. 이는 종교적 영역에서 칼빈이 투쟁했던 로마카톨릭주의로의 복귀와 다름없었다(<칼빈의 생애와 신학>, p.143). 도덕적 영역에서도 신중히 감시되어, 간음, 매춘, 간통, 동성애를 엄하게 처벌하고, 춤, 외설적 노래, 마술, 주먹다짐, 술주정, 또 살인을 동반한 부도덕도 마찬가지로 처벌되었다(Ibid, p.144). 학자들은 칼빈을 논할 때 그의 “위엄”을 이야기하지만, 그는 자기 주변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반듯하지 않으면 직접 바로잡고 싶어 안달난 “폭력적 율법주의자”였다. 구약 시대의 신정국가를 제네바에서 추구했던 칼빈은, 카톨릭 교황을 흉내 낸 “개신교의 교황”으로서 그 도시를 물리적인 “징계”를 통해 죄 없는 “임시적인 새 예루살렘”(<칼빈>, p.184)으로 만들려는 “병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지상의 도시를 영원 세계의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계 21:2)처럼 만들라는 명령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죽이고 싶었던 친구” 세르베투스


칼빈에게 “개신교의 교황”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은 그의 친구 “세르베투스”였다. 세르베투스는 유아 세례를 반대했고, 삼위일체에 관해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즉 “머리 셋 달린 케르베루스(그리스 신화의 괴물)”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학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께 어떤 악의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칼빈은 이런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오면 “여기서 살아 나가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칼빈의 생애와 신학>, p.169). 제네바에 찾아온 세르베투스를 칼빈은 시 정부에 신고했고, 세르베투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기를 바랐다(<극단적 칼빈주의의 이해>, p.49). 칼빈은 화형 대신 참수형을 요청했는데, 이는 세르베투스를 종교적 범법자가 아닌 “사회질서를 위반한” 범법자로 처형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세르베투스는 결국 화형을 선고받아 불타 죽었다. 칼빈은 그 후 9년이 지난 후에도 자기 행위를 뉘우치기는커녕 정당화했다. “나의 권고로 우리의 의회가 여러 교회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세르베투스)의 저주할 만한 신성모독에 응징을 가했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죄가 되는가?”(Ibid, p.50)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증거가 없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은 “카톨릭 신학자”의 “이단 교리”를 교회로 가져와서는, 급기야 한 도시를 구약의 신정국가처럼 만들려고 “교황을 흉내 내어” 시민들을 가혹한 징계로 치리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과 교리가 다른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면서도 그 일을 정당화했다. 필자는 그런 칼빈을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가 없다. 종교 개혁은 카톨릭에 항거하여 분리되어 나온 사건이었을 뿐이다, 자신과 교리가 다르고 종교적 행위가 마음에 안 든다 해서 처벌하고 살해했던 칼빈은 되레 “카톨릭적”이었고, “개혁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닌 “종교적 이리”였다. 그와 같은 칼빈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 그 어떤 속죄의 수단이나 그 어떤 보상을 통해서도 치유될 수 없는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한 결과다!(<칼빈의 생애와 신학>, p.50)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할 때 그런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기에,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 되는 영을 받았으므로 그에 따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성도가 아니었기에(롬 8:14, 15), 칼빈은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행적으로 신약교회사에 큰 오점을 남긴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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