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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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지식”은 <한글킹제임스성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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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1월호>

한승용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교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 2:4,5). 인류에 대해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시려는(벧후 3:9) 하나님께서는, 실로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즉 성도가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것은 그의 구원이 갖는 중요한 “목적”이다.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지식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Truth)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진리를 말하면 참이고, 주님과 관련하여 잘못된 것을 말하면 거짓이다. 스스로를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요 14:6) 하신 분과 관련하여 참을 말해야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진리의 성경』(단 10:21)에서만 얻어 낼 수 있는 영원한 보화이다. 진리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옳은 것만을 증거한다. 자신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감춰 놓으신(골 2:3) 그리스도께서는 그 보화를 영감받은 성경에 담아 놓으셨다(요 5:39, 딤후 3:16). 따라서 성경은 모든 지혜와 지식의 결정체이다. 『진리의 영』(요 15:26)이신 위로자 성령께서는 그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요 16:13), 바로 그 진리의 지식을 통해 우리 안에 위로와 사랑이 또한 넘치게 하신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사랑으로 엮어져서 완전한 이해의 확신이 모든 풍요함에 이르러 하나님과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신비의 지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골 2:2).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을 보이심으로써 우리에게 피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 다가오셨으니(히 2:14, 빌 2:7),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함으로써 그분께 다가가 그분을 알아가야 한다. 『수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는 것같이 오 하나님이여, 내 혼도 그처럼 주를 갈망하나이다. 내 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오니 내가 언제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서겠나이까?』(시 42:1,2)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을 찾는 이 갈망이 누구의 갈망이어야 하겠는가? 당신은 “성경”을 왜 읽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성막의 휘장을 찢으셔서 지성소에 계신 그분 자신께로 나아오게 하셨음에도(히 10:19,20) 그분께 나아가 그분 알기를 거부하는 것은 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계시하셨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해야 한다!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요 1:18). 『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다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참되신 그분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참되신 그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노라.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니라』(요일 5:20).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지식”을 얻으려면 “진리의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읽어야 한다. “말씀”은 지상에서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다. 진리의 서적들은 그 원천의 물을 퍼 올려 조금 담아 놓은 그릇들에 불과하다. “말씀”이 진리의 원천이다. 즉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요 17:17)인 것이다.
우리는 “말씀”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살아 계신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주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계 19:13)이라 부르고 그분에 관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막 7:13)이라 부른다면 “살아 계신 말씀”과 “기록된 말씀”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해석하고 증거하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성경 말씀은 전파될 때 의미가 있다. 따라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딤후 4:2)라는 사도 바울의 엄숙한 명령은 이 “기록된 말씀”이 “전파되는 말씀”이 되어야만 “살아 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요 1:1), 성육신하신 『말씀』(요 1:14),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고후 2:17), “전파되는 말씀”(딤후 4:2)은 “말씀의 총화”이다. “전파되는 말씀”을 통해 “기록된 말씀”이 알려지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 “살아 계신 말씀”이 알려지며, “살아 계신 말씀”께서 초림 때 전파하신 말씀들로 “아버지”께서 알려지셨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말씀들로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요 1:18)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말씀들을 그들에게 전하였으니, 그들은 그 말씀들을 영접하여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분명히 알았으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나이다』(요 17:8).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알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영생”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사람들이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옵니다. 내가 땅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완성하였나이다』(요 17:3,4).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는 너희가 그분을 알고 또 보았느니라.』(요 14:7)라고 하셨다. 초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인간이 말로 자신을 표현하듯, “살아 계신 말씀”은 “살아 계신 하나님,” 곧 “아버지”의 표현이시다. “살아 계신 말씀”께서 “살아 계신 아버지”를 계시하심으로써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일을 완성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계시하신 방법은 아버지의 말씀들을 받아서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는 내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명하셨음이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르는 것이라』(요 12:49,50). “살아 계신 말씀”께서 전달하신 “아버지의 말씀들”을 듣고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한 “인간 예수”가 아니라 우주의 정북 방향 맨 끝에 위치한 셋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결케 하시어 세상에 보내신』(요 10:36)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영생에 이를 수 있다. 그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분을 높여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이어야 한다. 섬김에 있어서 이외에 어떤 다른 의도나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왜” 사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여 드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데, 지난 2천 년 신약교회사에서 그 일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즉 “말씀”이 “변개”되어 버린 것이다! 교회 시대에 이 문제를 가장 먼저 꺼내 든 것이 누구인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써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사도 바울이 위와 같이 “성경 변개” 문제를 꺼내 든 것은 A.D. 58년경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965년” 전의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변개하는 일에 대한 경고를 성경의 세 곳에 심어 두셨는데(신 4:2, 잠 30:5,6, 계 22:18,19), 인간은 그 일을 어김없이 범하고 말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는 일은 “창세기 3:2,3”에서 최초의 인류가 범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가리켜 “말씀에 더하고 빼는 자들”(신 4:2, 잠 30:5,6)이요, 『내 말들을 도둑질하는』 자들이며(렘 23:30), 『하나님의 말씀들을 변질시』키는 자들(렘 23:36)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개되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관심을 가지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동일하게 싫어하는 것이 경건이다. 말씀을 조롱하는 자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경건이다(시 1:1, 렘 15:16,17). 사도 바울이 성경 변개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씀 변개의 문제를 제기한 문맥은, 변개된 성경으로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없고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향기”를 낼 수 없다는 점을 다루고 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또 어느 곳에서나 우리로 하여금 그분에 관한 지식의 향기를 나타내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 이는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나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이기 때문이라... 누가 이런 일들을 원만히 감당하겠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써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4-17).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향기”를 낼 수 없다면 성도의 승리하는 생활은 불가능하다. 그 “진리의 지식”은 승리의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기에 13구절이나 “(없음)”으로 처리되고, 삼위일체(요일 5:7),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딤전 3:16, 눅 23:42, 골 1:15, 사 7:14), 주님의 구속 사역(마 18:11, 요 1:29, 골 1:14), 부활(욥 19:26, 벧전 3:18), 승천(눅 24:51), 재림(요 18:36, 계 11:17, 눅 17:36), 지옥의 심판(막 9:44,46), 사탄(사 14:12, 욥 41:1), 적그리스도(슼 11:17), 영ㆍ혼ㆍ몸(창 2:7, 고전 15:45), 혼의 구원(벧전 1:9), 말씀 보존(시 12:6,7) 등에 관한 구절들이 변개된 개역한글판성경, 개역개정판 등으로는 올바른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신구약에서 36,000군데 이상 변개되고 신약에서만 2,200단어 이상이 삭제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겠는가? 지식이 부족하면 멸망하고 만다(호 4:6). 틀린 성경에서는 바른 지식이 나올 수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관한 한 게으르거나 열매 없는 자』(벧후 1:8)가 되지 않으려면 정확한 성경 지식을 갖추게 해 주는 <한글킹제임스성경>으로 공부해야 한다. “성경을 공부하여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일은 오로지 “변개되지 않은 <한글킹제임스성경>”으로만 가능하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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