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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의 기회”라는 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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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3월호>
『나무가 남쪽으로나 북쪽으로 넘어지면 그 나무가 넘어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전 11:3). 수많은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한 번은 더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망상”은 사탄이 고안해 낸 더할 나위 없이 사악한 미혹 중 하나이다. 지옥 없이 하늘나라만 존재한다면, 감옥들이 즐비하고 범죄가 들끓는, 게다가 유행병까지 만연하는 “범죄 도시”에서 사는 편이 차라리 낫다! 찰스 웨슬리와 네로가, 조지 휫필드와 니체가, 순교자들과 살인자들이 영광스러운 곳에서 나란히 영원을 보낸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그런 썩어 빠진 하늘나라에서 돌아서겠다. 경건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자선과 암살이, 희생과 추태가 한곳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각각의 두 부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영원무궁토록 서로 분리되어야 함이 마땅하다!우선 인간은 “고통”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완악한 사람도 다음 세상에서 큰 불행을 겪는다면 그 재앙의 고통 덕분에 죄에서 돌이키지 않을까요?”라고 일말의 여지를 두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악하게 살다가 갑자기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 오지 않았던가! 과연 그들이 그런 고통을 통해 변화되었는가? 대부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통은 그다지 큰 영향력이 없다. 당장 교도소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라. “누범률”(累犯率)이 매우 높고, 5회 이상 수감되는 경우도 상당하다. 그런데도 다음 세상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되기를 꿈꾼단 말인가?
인간이 다음 세상에서 개선될 가능성은 지상 생애에서보다 훨씬 더 희박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죄를 모르는 아기에서부터 삶을 시작하는 반면, 다음 세상에서는 한평생 죄로 단련된 모든 악습을 고스란히 안고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낡아 빠진 배에서 가져온 재활용 목재보다는 새 목재로 만들어야 배가 튼튼하지 않겠는가? 순수한 모습으로 시작했어도 결국 경건치 못한 상태로 변질되었는데, 어찌 죄악으로 찌든 모습에서 시작하면서도 거룩한 그룹과 같은 존재로 격상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각가가 섬세한 조각상을 만들려고 할 때, “최고급 백색 대리석”과 “반세기 세월을 지나는 동안 낡아 퇴색하고 폭풍으로 인해 군데군데 금이 간 바윗덩이” 중에서 어느 재료를 더 선호하겠는가? 중요한 기록을 위해서라면 “여기저기 낙서와 얼룩이 있는 찢어진 종이”보다 “깨끗한 종이”를 선택하지 않겠는가? 비교적 온전하게 시작한 이생의 결과도 이렇게 나쁜데, 그 철저한 실패 속에서 시작하는 다음 세상에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가?
그래도 누군가는 이런 의견을 제기한다. “다음 세상에서 기회를 한 번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곳 지상 생애는 너무 짧고 기회도 충분치 않잖아요.” 물론 짧긴 하다! “요람”과 “무덤”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요람의 나무가 관의 나무와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가 왜 필요했는지 생각해 보라! 바로 “긴 수명” 때문이었다. 첫 번째 백 년보다는 두 번째 백 년이,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세 번째보다는 그다음이... 그런 식으로 지구는 악화되다가 결국 대홍수로 수개월 동안 완전히 씻기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이 다시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었다. “긴 수명”이 인간의 완악함을 고치지 못한 것이다.
로마의 정치인이자 작가였던 세네카의 글에 의하면, “네로”는 통치 첫 5년 동안은 관용과 친절의 귀감이 될 정도의 황제였지만, 그 이후로 극악한 짓을 저지르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끝냈다고 한다. 대홍수 이전에 평균 800년 이상의 수명이 사람들을 개혁하는 데 유용하지 못했음을 보면, 기회가 더 주어지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타락상만 더 심화시킬 뿐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한다. “다음 세상에서는 나쁜 환경이 줄어들고, 고상하고 숭고한 영향력이 우세해지지 않을까요?” 하지만 용서받은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계신 기쁨이 넘치는 하늘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복음을 전하는 데 진력하는 성도들과 성경에 따라 의롭게 살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없고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만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체가 도덕적으로 파산하여 자생력을 잃었는데, 어디에서 구원으로 이끄는 영향력이 나오겠는가? 상자가 “병든 사과”로 가득한 상황에서, 어떤 상한 사과가 다른 사과들을 싱싱하게 바꿀 수 있겠는가? 자신의 죗값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옆에 있는 영적 채무자의 빚을 갚아 줄 수 있겠는가?
한때 트라키아의 필립 왕은 “포네로폴리스”라는 도시에 악인들을 가둬 놓았다. 설령 그곳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한들, 그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가 있었겠는지 생각해 보라. 죄로 찌든 다음 세상에서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그야말로 망상이다! 현 세상도 이토록 죄가 만연하거늘, 죄가 충만한 상태에서 출발하는 다음 세상은 지금보다 천 배나 더 악화되어 있을 게 틀림없다.
다음 세상에서 만회할 기회가 있다면, 현 사회는 급속히 악해져서 인류는 곧 괴멸되고 말 것이다. 현재 짓고 있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든 결과가 좋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그나마 문명사회에서 야만적인 사회로, 야만적인 사회에서 흉포한 사회로, 흉포한 사회에서 완전한 멸망으로의 돌진을 막는 것이다.
당신이 현재 재판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라. 그런데 “두 번”으로 열리는 재판 중에서 첫 번째 재판은 비중이 크지 않고 두 번째 재판에서 모든 결정이 내려진다고 했을 때, 당신은 둘 중 어떤 재판을 위해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고 증인을 섭외하며 비용을 투자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는가? 인류에게 기회가 두 번이 있고 그중에서 두 번째 기회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한다면, 결국 영원을 위한 준비는 장례식 이후에나 시작될 것이고, 현재 달리고 있는 세상이라는 기차는 한 번만 덜컹거려도 곧바로 “불경건”을 향해 탈선할 것이다.
이 정도는 알아서였을까,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성경 전체를 거부했으면서도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영 석연치 않았던 모양인지 그의 친구가 그에게 “나는 지옥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찾아냈다네.”라는 글을 써 보내자 이렇게 답변했다. “축하하네. 하지만 나는 자네처럼 운이 좋지가 않나 보네.”
이 세상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기회를 거절해 왔다면 어째서 다음 세상에서 기회가 더 주어져야 한단 말인가? 당신이 잔치를 열고 많은 친구를 초대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유독 한 친구가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면서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20년 동안 20번이나 초대를 했는데도 매번 불쾌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한 후에 다시 친구들을 초대하면서는 그 친구를 초대 대상에서 아예 제외했다고 해 보자. 과연 비난을 받아야 하는 쪽은 누구인가? 당연히 그 친구이다! 지금까지 초대를 거절하고 당신을 모욕해 온 그가 또 한 번 초대받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과연 옳겠는가?
당신이 함부르크행 배를 타고 독일로 여행 간다고 가정할 때, 그 배의 출발 일정에 관한 공지를 신문에서 2주 동안 보았으면서도, 당일에 15분 늦게 항구에 도착해서는 “돌아와요! 나에게 다시 기회를 줘요!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불공평하다고요! 돌아와서 항구에 배를 대고 내가 탈 수 있게 해 달란 말이오!”라고 난동을 부린다면 아마도 미친 사람으로 간주되어 경찰서에 신고당할 것이다.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당신의 눈앞에 정박해 있던 “복음의 배”가 “이제 곧 출항할 것이니 서둘러 배에 타시오!”라고 온유하게 승선을 권해 온 상황에서, 그동안 탐탁스럽지 않게 생각했던 당신을 태우지 않고 떠나 버렸을 때, 그 배를 탓하고 불평하는 게 상식적인 행동이겠는가?
죄악과 슬픔으로 어두워진 세상을 십자가의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을 때 투항하라. 빛이 꺼지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어떤 도시를 포위할 때마다 불을 크게 밝혀 놓고 그 불이 꺼지기 전에 항복하면 모두 무사할 테지만 일단 불이 꺼지고 나면 재앙을 각오하라고 경고했다. 현재와 영원의 안전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과 생명과 삶 등 모두를 내어 드리는 것이다. 지금 주님께서는 복음의 빛을 밝히시고 죄인들을 초청하고 계신다. 죄악과 슬픔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십자가의 빛”이 밝히고 있다. 그 위대한 빛이 환하게 비출 때 투항하라. 그 빛이 꺼지면 하나님과 화해할 기회가 완전히 없어진다!
어느 주일에 청년 하나가 급히 말을 몰고 가다가 길가에 있는 한 신실한 집사를 지나치면서 조롱 섞인 말로 이렇게 말했다. “지옥이 여기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어디 한번 말씀해 보시죠!” 그러고 나서 그는 바로 다음 모퉁이에서 말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지옥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집사가 대답해 줄 새도 없이 그 스스로 직접 발견하고 만 것이다. 말하자면 지옥은 가까이에, “아주 가까이에” 있다! 당신도 지옥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많은 아이를 학살한 헤롯이 그 아이들과 함께 “생명수의 강가”에서 함께 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나는 그런 하늘나라를 열망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검은 두 날개를 펴고 피 묻은 발톱으로 달려드는 심판이 당신의 혼을 해칠 수 없다!
바로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다시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의 죄의 본성과 죄들을 보여 주실 때, 절대 다음 기회로 미루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심판”이 검은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피 묻은 발톱으로 당신의 혼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당신의 혼을 해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혼은 자비로우신 구속주의 팔 안에 안전하게 안겨 있을 테니 말이다!
이제 곧 인생의 시침과 분침이 겹치는 12시가 되면 당신의 삶도 끝날 것이다. 죄와 사탄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허비한 많은 시간이 참으로 실망스럽지 않은가? 그런 인생 끝에 “1등급 시체”를 하나님께 선물해 드리는 꼴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나는 죽음의 침상에서 비탄에 잠겨 다음과 같이 흐느끼는 사람들을 여러 명 봤다. “저는 인생을 낭비했어요. 좋은 머리와 사회적 지위 그리고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영원한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세상의 것들에만 만족하며 헛되게 살았어요. 이제 마지막 몇 시간을 남겨 둔 상황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주님의 자비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아... 아... 주님께 돌릴 영광을 가득 싣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나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나를 환호하며 맞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실로 나는 다 부서져 가는 배처럼 하늘의 항구로 들어가고 있도다...”
자, 표류하는 당신에게 튼튼한 생명 줄을 다시 한번 던진다! 그 밧줄은 당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단단히 묶여 있다. 하늘나라에 가려면 믿음으로 그 줄을 꽉 붙잡으라! 절대 놓치지 말라!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