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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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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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10월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생애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목표”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인생은 “열매를 맺는” 풍성한 삶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 10:10).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을 받음으로써 누리는 풍성한 삶은 아무런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한데, 첫째,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배우지 못하면 쓰임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둘째, 부지런히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하는 경우에도 쓰임을 받을 수 없다. 『네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기억하게 한다면 너는 네가 따르던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리라... 오히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딤전 4:6,7).
그렇다면 이러한 “성경 공부”와 “경건의 훈련”을 방해하는 주된 요인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못 살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도 못하게 만든다.

“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헌신할 수 없다. 수년 전 호주의 생물학자이자 생태학자인 “데이비드 구달”이 104세의 나이에 스위스 바젤의 한 의료 기관에서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안락사”로 숨을 거둔 적이 있다. 스위스에 도착하기 전, 가족과 만나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마지막 순간에 “더 이상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겨 기쁘고 의료진에게 감사한다.”라고 말하면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아무런 삶의 의미도 없이 하루하루 사는 현실을 견디지 못했다. 그야말로 “삶의 목적”이 없었던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목표”가 설정된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강권하는 사랑을 통해 남은 생애를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인생의 목표를 재편성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느니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4,15).


게으른 사람은 인생의 목적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헌신할 수 없다. 헌신을 위한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하는데, 게으름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식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이 식어 버린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게으른 교회였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계 3:15,16).


하지만 나름대로는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도 “열심히”(?) 사는 교회였다. 왜냐하면 『나는 부자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 a)라고 말할 정도로 무언가 열심히 해서 갖출 것은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가치가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너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b)라는 평가를 받았다. 말하자면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한없이 게으른 삶을 산 것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게으름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식게 되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등(딤후 3:2-4) “왜곡된 사랑”에 빠져, 결국 주 하나님을 떠나고 만다.

게으른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내적인 증거” 중 하나가 “믿음의 기도”인데, 이러한 기도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을 때만 할 수 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엡 6:1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이는 너희의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기 때문이니라』(벧전 5:8). 말하자면 깨어 있는 가운데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께 도움을 아뢰는 것이 기도인 것이다. 이렇듯 마음을 모아 집중하지 않고서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인데, 게으른 사람은 마음을 집중하기를 싫어하기에 절대로 그런 기도를 할 수 없다.


또한 성도에게는 “끈질긴 기도”가 요구된다. 단 한 번의 기도로 응답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인내의 과정을 거치면서 응답을 받는다. 마귀에게 고통받는 딸을 둔 수로페니키아 종족의 한 여인이 도움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제자들은 그녀를 무시했고, 심지어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이방의 개”라고까지 말씀하셨다(마 15:26). 그런데도 그 여인은 끈질기게 간청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대상으로만 사역하시던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고 딸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었다(마 15:28). 실로 응답을 받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은 “부지런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가르치셨을 때 “끈질기게 간청하는 친구의 비유”(눅 11:5-8)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 18:1-8)를 언급하시며 “끈질긴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기도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명령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이다. 물론 하루 24시간 내내 기도하라는 말은 아니다. 어떤 간청이 있다면 그 간청에 대해 분명한 응답을 얻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 기도했는데(고후 12:7-9), 여기에서 “세 번”은 주님으로부터 그 기도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한 응답을 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의미이다.


“조지 뮬러”가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사람들 가운데 다섯 명의 친구가 있었다. 첫 번째 친구는 기도한 지 몇 달 후에 구원받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친구는 기도한 지 10년 후에 구원받았으며, 네 번째 친구는 기도한 지 25년이 지나서야 구원받았다. 마지막 한 친구는 조지 뮬러가 죽은 후에 구원받았는데, 그는 그 친구의 구원을 위해 죽을 때까지 52년간 기도했던 것이다. 끈기 있게 기도한 조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도를 올바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어느 기간에만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응답을 얻을 때까지 끈기 있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특히 마귀의 직접적인 방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단 10:12,13)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성도의 기도가 과연 진정성 있는 기도인지 시험하시기 위해 응답을 늦추기도 하시는데, 이때 필요한 것도 바로 “끈기 있는 기도”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결코 그런 끈기 있는 기도를 할 수 없다.

게으른 사람은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초림 당시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거두는 것과 이익을 남기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하셨다. 일례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눅 8:11-15)가 있는데, 이 비유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인”은 고난, 시험, 환난, 박해를 올바로 극복하지 못한 것과 세상의 염려, 부와 쾌락, 재물의 미혹, 다른 일들에 대한 욕심 등이다. 반면에 “열매를 맺는 사람”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사람으로서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 인내하는 사람이다.


게으른 자는 “몽상가”다. 그저 생각만 하고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는 너무나 게을러서 아무런 열매가 없다.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에서도, 장사하여 이익을 남긴 종들에 대해서는 칭찬하시는 반면, 장사하지 않아 이익을 남기지 못한 종에 대해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혹평하신다. 정작 어떤 “도덕적인 죄”를 지어서 악한 것이 아니라, 자기 뜻을 고집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을 때 악하고 게으르다는 평가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게으른 것”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빈둥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님의 뜻과 무관한 일을 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 종이 그렇게 악하다는 평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분별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삶인지,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게으름이다. 그 게으르고 악한 종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에 관해서는 참된 가치를 몰라 무관심했던 반면, 세상일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관심을 두고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6-21)를 통해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하여는 보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 앞에 부요하지 못한 자는 다 이러하니라』(눅 12:21). 세상의 기준에서는 부지런하게 열심히 살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삶으로 끝날 수 있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나고 결산의 때가 다가올 것이다. 그날에 그리스도인들은 게으른 삶을 살았던 이유를 주님 앞에서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 게으른 인생은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다. 게으른 사람은 거둘 것이 없다. 『각 사람의 일한 것이 나타나게 되리니 그 날이 그것을 밝힐 것이라. 이는 그것이 불로써 드러나고 또 그 불은 각 사람의 일한 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고전 3:13).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성도는 “게으른 삶”을 살 수 없다. 이는 성경에서 게으르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일에는 게으르지 말고 영 안에서 열심을 내며 주를 섬기라』(롬 12:11). 주님을 섬기려면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동시에 영 안에서 열심을 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훈련되지 않으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게을러질 수 있기에 성경은 게으름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얼마나 정확히 행하고 있는지 주의하라. 미련한 사람같이 행하지 말고 현명한 사람같이 행하여 시간을 사서 얻으라. 이는 그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니라. 이로 인하여 너희는 어리석게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 5:15-17).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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