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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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이단”이라는 명예로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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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4월호>

신학 논단
“나사렛 이단”이라는 명예로운 이름
한승용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교수

무지한 교인들이 신천지 같은 곳에 빠져드는 이유는 그들에게 가면 “성경”을 배울 수 있다는 미끼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은 자기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쳐 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살아왔지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또 평생을 다녔어도 형식적인 종교 행위는 늘어도 성경을 가르쳐서 영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목사가 없기에 신천지의 늪에 쉽게 빠져드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신천지가 이단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으며, 다만 가 봤더니 그동안 궁금했던 성경을 속 시원히 알려 주더라는, 그래서 그곳이 진짜라는 말만 늘어놓기 일쑤다.

필자가 이단이라는 말뜻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은 오래전 어느 공원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다. 그때 만난 이가 “이단은 시작이 같지만 끝이 다르죠?”라고 했을 때, 순간 그가 이단(異端)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풀어서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았다. “다를 이(異)”에 “끝 단(端)”을 합성하여 만든 이단은 글자 그대로 “시작은 같아 보여도 끝이 다른” 교리의 분파를 가리킨다.

신천지로 보자면, 그들도 “교회다, 성경을 가르친다, 예수님을 믿는다, 재림을 믿는다.”라고 하지만, 그들 속에 발을 들여놓으면 교주 이만희의 거짓 교리가 홍수처럼 밀려와 불쌍한 혼들을 덮쳐 지옥에 쓸어 넣는다. 미혹된 교인들은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를 구해야 하지만(잠 6:5),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배운 성경 지식이 전무하기에 스스로 헤어날 능력이 없다. 진리의 지식이 있었다면 애초에 빠져들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어떤 이들은 한술 더 떠서 심지어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들이 되어(마 23:15) 더 열성적인 이단이 된다. 이러한 실족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다만 그런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한국 교회의 “거짓 교사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뿐이다.

이단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이단이 있다. 즉 “이단이 아닌데 ‘이단’이라고 불리는 성도들”과 문자 그대로 “이단”인 자들이 있다. 이를 하나로 정리하면, “진짜 이단”이 “이단이 아닌 그리스도인”을 이단으로 낙인찍어 사회적으로나 기독교계에서 생매장을 시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단”(영어 heresy로서)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발견되는 곳은 사도행전 24:14인데, 성령님께서는 그 후 신약교회사에서 일어날 어처구니없는 “이단 사냥”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 영감받은 말씀으로 예고해 주셨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오니 즉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서 내가 내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서들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으며』(행 24:14).

이 말은 변사 터툴로를 앞세운 유대인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사도 바울을 총독 펠릭스에게 고소했을 때 바울이 펠릭스에게 했던 변론이다. 그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믿고 전파한 진리를 “이단”이라고 부르며 정죄한 것인데, 그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대상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가장 신실하게 섬겼던 바울이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성경적인 믿음과 실행을 이단이라 한 것이었고, 이것이 성경에서 최초로 이단(heresy)이라는 단어가 쓰인 용례였다. “첫 언급의 법칙”에 따라 보자면, 그 최초의 용례는 “이단”이라는 단어의 이후 성격을 규정한다. 즉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을 이단이라고 했다면, 이후 교회의 역사는 그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며 박해하는 일들로 점철될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른 말씀과 바른 진리가 이단시되는 것이 신약 교회사의 주요 흐름인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는 행위로 하늘나라에 가려고 애쓰며 자기 의를 내세우는 이단들의 눈에 항상 “이단”으로 비쳐 왔다. “이단”은 진짜 이단을 박해하지 않지만 진짜 이단은 “이단”을 박해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성경대로 믿는 왈덴시안, 폴리시안, 마니키안,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등은 카톨릭 이단을 박해하지 않았지만, 진짜 이단인 로마카톨릭은 그들이 “이단”이라 부른 성도들을 잔인하게 박해했다. 이단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첫 번째 인물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바로 그분께서 “이단”이셨음을 사도행전 24:5에서 밝혀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자가 되어 세상에 있는 온 유대인 사이에 소요를 일으킨 자로서 나사렛 이단의 두목이며』(행 24:5). 이 역시 변사 터툴로의 고소인데, 그는 사도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두목이라고 고소했다. 『나사렛 예수』(행 2:22)는 이스라엘에 보냄을 받은 ‘지상의’ 선지자이신 예수님께 붙여진 유대식 명칭으로(『나사렛의 선지자 예수』, 마 21:11),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그 “나사렛 이단”의 두목이라며 정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선지자로 계시면서 행하신 일들은 진리이신 분께서(요 14:6) 자기 백성인 유대인에게 왕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메시아 왕으로서 표적을 행하시고(마 4:23)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늘 기쁘시게(요 8:29) 해 드린 것밖에 없었지만, 당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주님과 바울을 정죄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로마 제국의 비호하에 누리던 자신들의 종교적 입지와 이익을 유지하기 원했던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이 전파한 것에는 그 무엇 하나 반박할 수도 없었으면서, 다만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이단”의 올무를 주님과 바울에게 씌워 버린 것이다.

사실 이단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쓰인 것은 사도행전 24:14이 아니라 위의 5절이다. 5절에 쓰인 영어 단어는 14절(heresy)과 달리 “sect”(기존의 틀을 깨는 “분파”로서의 이단)인데, 헬라어로 보면 5절의 “sect”와 14절의 “heresy”가 모두 “하이레시스”(αἵρεσις)라는 한 단어에서 번역되었기 때문에, <킹제임스성경>을 비난하는 자들은 그 성경의 번역에 일관성이 없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러나 영감으로 기록된 원문을 섭리적으로 보존하여 영어로 전달해 주신 성령님께서는 오늘날의 세계 공용어인 영어의 “heresy”라는 단어를 두 구절 중 사도행전 24:14에 사용하심으로써, 향후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당하게 될 부당한 이단 정죄의 성격을 규정해 주셨다. 진짜 이단들에게 “이단”으로 정죄되어 박해를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킹제임스성경>은 이러한 점에서도 영감받은 독보적인 성경이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실행을 위한 최종권위임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단”은 이처럼 진리를 선포하고 실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故 이송오 목사가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을 때, 한국 교회가 그와 그의 성경침례교회, 심지어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마저도 “이단”이라고 정죄한 것은 지난 130여 년간 성경 장사꾼인 대한성서공회와 결탁하여 누려온 종교적 기득권이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그들의 수익, 곧 “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이단 성경”이라고 했는데 성경이 이단이란 말인가? 그들은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이단 성경”이라 하며 자기 교인들에게 금서로 취급했지만, 이제는 바른 성경이 지속적으로 보급되어 그 저변이 널리 확대되자 “킹제임스성경이 가장 권위 있는 성경인 건 맞지만 다른 번역본들도 동일한 성경이므로 그것들도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보라, 그들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자기들도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읽어 보니, 36,000군데나 변개되고 신약에서만 2,200단어가 삭제되고 13구절이나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개역성경과 확연히 다르므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이단이라고 했다가 이단에서 풀어 준다는 말인가? 그들 목사들과 학자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교단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단 말인가? 그들에게 과연 “성경을 박해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세워졌나이다』(시 119:89).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음이니이다』(시 138:2).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한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보다(빌 2:9,10) 더 높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송축과 찬양 위에 높임을 받으』셔야 하는데(느 9:5) 그 이름보다 더 높은 것이 『주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바른 성경의 진정한 가치와 능력을 모르는 자들이 이런 “질긴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아직 젖니도 나오지 않은 영적 어린아기들이 성경의 이 위대한 진리들을 단 한 가지라도 소화시킬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들은 “가장 권위 있는 성경”이란 말로 <킹제임스성경>을 위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킹제임스성경>이 가장 권위가 있고 다른 성경들은 그 다음 권위라는 말이기에 자기 교인들에게 “상충되는 두 권위”를 제시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짓을 조장하는 것이 누구인가? 바로 “마귀”이다. 마귀는 자신을 찔러 무찌를 수 있는(사 27:1) 유일한 칼인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을 성도들의 손에서, 그들의 마음에서 빼앗아가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리고 있는데도, 마귀에게 붙들린 자들이 자기가 마귀의 생각을 전달하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각기 자기 이웃으로부터 내 말들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대적하노라』(렘 23:30).

“이단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은 이단에 관해서 사도행전 24:5,14 외에 다른 구절들에서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 『너희 가운데는 이단들도 있어야만 하리니 그래야만이 너희 가운데 인정받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 11:19). 사도 바울이 언급한 이단들은 “너희 가운데,” 곧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이단들을 말한다. 교회 안에 비성경적인 이단 교리를 퍼뜨리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교회라고 해서 다 정상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비성경적인 교단 교리로 세뇌당한 자들로 채워진 교회라면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는 분명 이단인 것이다.

둘째,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질투와 분노와 투쟁과 분열과 이단들과』(갈 5:20). 본 구절은 『갈라디아의 교회들』(갈 1:2)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서신의 일부로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율법 아래서 행위 구원을 추구하는(갈 5:3,4,5,18) 어리석은 갈라디아의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육신의 일들』(갈 5:19)을 언급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그중 『이단들』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거부하고 율법으로 돌아가 할례를 구원의 수단으로 받아들인 자들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으로 들어갔다가 행위 구원으로 나오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이나 행위로 구원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알미니안주의 교회들은 “현대판 갈라디아 교회들”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 짓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21절)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셋째, 『이단 종파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거절하라』(딛 3:10).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단 교리로 구축된 종파를 만들어 교회를 세운 자들을 만나면 한두 번 바른 교리로 훈계한 후 거절해야 한다. 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에 귀를 닫고 비성경적인 교단 교리에서 돌이킬 줄 모르는 자들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위의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사역 방침이었고, 목사인 디도가 반드시 따라야 할 사역 원칙이었다.

넷째, 『그러나 백성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며, 급격한 파멸을 스스로 불러들이느니라』(벧후 2:1). 이 구절은 앞서 언급한 고린도전서 11:19에서처럼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들을 다루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을 『저주받을 이단들』이라고 날카로운 어조로 정죄했고, 사도 바울 역시 십자가에서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부인하고 행위 구원의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이단들을 그들이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으리라.』(갈 1:8,9)라고 격앙된 어조로 저주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인 척하는 자들이 복음을 변개하여 성도들을 교란시키는 것을(7절) 바울은 좌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 안에 비밀리에 들어온 저주받을 이단들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한다고 했는데,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까지도 사 주신 “보편적인 속죄”의 피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주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으로 예정된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서만 피를 흘려 주셨다는 “제한적 속죄”를 가르치고 있는데, 바로 이런 자들이 기독교계에 비밀리에 들어와 정통 행세를 하는 “저주받을 이단들”인 것이다.

지난 2천 년 교회사는 진짜 이단들이 세력을 쥐고 활보한 역사였다. 진짜 이단에게 “이단”이라고 박해받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행 5:41). 왜냐하면 우리는 “나사렛 이단”이신 예수님과 바울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욕을 당할 때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위에서 안식하신다. 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가! 그들의 편에서는 그분께서 비방을 당하시나, 우리의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벧전 4:14). 할렐루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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