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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카톨릭을 바로 알자 (2. 거짓 평화의 사도,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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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5월호>

거짓 평화의 사도, 요한 바오로 2세
지난 4월 3일 20세기 마지막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었다. 교황이 될 때부터 세계를 놀라게 하더니 죽음으로써 다시 한 번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 전 세계를 돌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단 한 명도 구령하지 못했으며, 그 입에는 “사랑과 평화”를 달고 다녔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수억의 사람들에게 연설했지만 죄와 심판에 대해서는 한 편의 설교도 하지 않았던 사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모두 지옥으로 인도한 거짓 목자, 그가 죽었다.
각국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을 찾았으며, 온갖 좋은 말들로 제각각 그에 대해 평가를 내렸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그는 어떤 교황이었으며, 어떤 일들을 수행했는가? 그가 행한 일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온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에 대해 온갖 좋은 평가들을 내리지만, 아쉽게도 성경은 전혀 반대의 평가를 내린다. 이제 우리는 이 짧은 글을 통해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어떤 인물이며, 얼마나 악한 마귀의 종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평화의 사도?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의 어떤 정치 지도자들보다 더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 종식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그는 공산주의 국가 폴란드 출신으로서, 그가 교황이 된 것 자체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충격으로 여겨졌다. 그가 1979년에 교황의 신분으로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그의 방문에 동요되지 말라고 시민들을 독려했지만, 인구의 거의 90%가 카톨릭 국가인 폴란드에서의 교황의 방문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결국 자유노조를 이끄는 바웬사를 후원함으로써 폴란드에서의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일을 했다. 또 소련의 고르바초프를 만나고 소련이 붕괴되기까지 행한 그의 영향력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레이건보다 더 컸다고 평가될 정도이다.
또 인권 향상을 위한 노력도 그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전 세계를 돌면서, 특히 남미와 아프리카 등을 방문하면서, 가난과 기아, 질병 같은 문제들에 아파하는 모습, 독재 정권 아래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준 일들, 무엇보다 그 시민들 하나하나와 대면하며 그들을 감싸주는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목자라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정치적 종교인임을 보여 주는 행보일 뿐이다. 그가 참 목자라면 공산주의 치하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통해 용기를 주었어야 한다. 가난과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참 생명을 얻게 했어야 한다. 루마니아 감옥에서 고난을 당했던 리차드 움브란트 목사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승리했다. 또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파한 수많은 성도들이 있다. 그들은 목숨을 버려가면서 그들의 신앙을 지켰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가 한 것이라고는 바웬사에게 거액의 정치 자금을 준 것뿐이며, 그 국민들에게는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라고 말한 것뿐이다. 그는 정치인이었을 뿐이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에큐메니칼 연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1999년에는 러시아 정교와 화해를 하고, 루터교와도 화해를 했다. 개신교 지도자들을 만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에큐메니칼 연합은 기독교 종파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1986년에는 로마의 유대교 회당을, 2001년에는 시리아의 이슬람 사원을 방문해 기도하고, 또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도 기도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도 악수를 하였다. 1982년에는 영국 성공회와 화해를 했고, 1985년에는 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연설을 했다. 그가 가는 모든 곳에서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이 그를 환영하며, 교황은 그들과 하나가 된다.
그는 모든 이교도들에게 “형제”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카톨릭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는 “종교 간의 화합”이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 (첫 번째는 “끊임없는 순방을 통해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한 점”이었다.) 이와 같이 “종교 간의 화합”은 그의 27년 통치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업적”이야말로 그를 적그리스도의 예표가 되게 하는 업적이다. 왜냐하면 미래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는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강력한 통치를 하겠지만, 그가 세력을 얻는 방법은 “평화”이다(단 8:25; 11:21,24). 적그리스도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평화롭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평화를 심기 위해 기도를 했다. 그는 미래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한 예표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교도들과 한 형제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마귀적이다. 세상은 그러한 사고를 요구한다. 상대주의적으로 서로의 종교를 인정해야 평화가 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을 닮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셨다. 그가 이교도들과 한 형제라고 말하는 것은, 그 스스로 구원받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말이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의 치마폭에 들어간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나의 백성들아, 그녀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한다(계 18:4).

보수주의적 교황? 참회의 교황?

이와 같은 칭찬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비평하는 말들이 간혹 있는데, 그것은 요한 바오로 2세가 너무 보수적인 교황이라는 것이다. 여성 사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반대한다, 낙태를 반대한다, 동성애를 반대한다, 해방신학을 반대한다 등의 이유로 카톨릭 교회 내의 진보주의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정책을 비평했다. 그래서 새로운 교황이 진보주의에서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새로 임명된 라칭거 추기경(교황명 베네딕토 16세)도 보수주의자여서 카톨릭 내부의 갈등은 더 심해졌다.
카톨릭 내의 개혁 세력들은 이러한 보수주의를 타파하기 원하는데, 위에 제시된 내용만 봐서는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주 잘했기 때문에 개혁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 신임 교황도 같은 노선이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는 옳게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몇 가지 사항들 때문에 그를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사항들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에 이런 것들 가지고는 그를 비판하기도 칭찬하기도 적절치 않다. 단지 카톨릭 내에 진보주의자들이 많다고 하니, 오늘날 로마카톨릭이 얼마나 썩은 집단인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카톨릭 교회가 행해 온 역사적인 과오들을 참회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을 정죄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교회가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반대한 것, 진화론을 반대한 것 등이다. 특히 진화론에 대해서, “다윈의 진화론은 카톨릭 교의에 모순되지 않는다.”며 교황청 사상 처음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했다(1996).
보혈의 능력을 믿지 못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Saviour)로 인정하지 못하더니, 이제는 아예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과학과 신앙이 충돌될 때 과감히 과학을 택한 사람이다. 성경은 논리가 빈약하고 오류투성이의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오 당시에 지동설과 충돌된 것은 성경적 신앙이 아니라 단순히 카톨릭 교리였다. 당시 교회가 성경을 제대로 알았다면, 갈릴레오를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형의 지구 위에 앉으신 분께서 그분이시니...』(사 40:22). B.C. 8세기에 살았던 이사야는 지동설을 믿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성경과 과학은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순이 발생될 때는 성경을 포기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갈릴레오를 박해했던 교회의 역사를 참회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관점으로 다윈의 진화론도 인정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창조주 하나님은 사라지고 만다. 도대체 이 불신자의 어떤 면이 그를 보수주의자로 만드는 것인가?
세상은 그를 교회의 과오를 참회한 자라고 추켜세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앞에서 말한 과학적 “오류” 외에도 중세의 종교재판, 십자군 전쟁, 유대인 학살 등의 잘못에 대해 참회했다. 그러나 이것은 카톨릭 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빌미삼아, 오늘날 강대국들을 향하여 “너희도 그러면 안 돼.”라고 하는 또 다른 메시지일 뿐이다. 자기들은 강성했을 때 세상 왕국들 위에 군림했으면서, 이제 세력이 약해지니까 남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을 참회라는 제스쳐로 말한다. 그럼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인기를 얻어 세력을 가지려는 깊은 의도가 있다. 그에게 정말 참회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더 근본적인 죄들을 참회했어야 한다.

(1) 그는 “교황무오설”을 참회했어야 한다. 교황무오설이 참회되지 않는다면 카톨릭의 죄악성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교리를 철저히 붙들었다. 브라질의 보프 신부가 “로마 교황청이 지배계급처럼 행동한다.”고 비판하자 교황은 그에게 1년간의 “침묵”을 선고했다. 독일의 신학자 한스 큉이 교황무오설을 비판했을 때에도, 교황은 그에게 “침묵”을 명령했다.
(2) 그는 “마리아 숭배”를 참회했어야 했다. 이 교리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카톨릭은 영원히 우상 숭배 집단으로 남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저격당했다가 회복되었을 때, 그것을 전적으로 파티마의 은혜로 여겼다. 그리고 마리아 숭배는 더욱 강화되었다.
(3) 그는 “화채설-미사”를 참회했어야 했다. 이 교리는 가장 사악한 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매주 죽이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 교리를 거절하는 것이다. 이 교리를 붙들고 있는 한 로마카톨릭 종교 안에는 절대로 구원이 없다. 그러나 교황은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세계 성체 대회를 통해 이 교리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4) 그는 “유아 세례” 교리를 참회했어야 했다. 모든 사람들을 태어날 때부터 자기 집단에 집어넣어 세력을 확장시키는 사악한 행동을 참회했어야 한다. 그는 마녀 사냥과 십자군 학살은 참회했으면서도, 유아 세례를 반대한 성경대로 믿는 그룹들을 죽인 일들에 대해서는 참회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지적할 것은 많지만, 결국 그가 했다는 참회는 자기들이 의롭다고 말하기 위해 행한 제스쳐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요한 바오로 2세뿐 아니라 그 어떤 교황이라 할지라도 이런 교리들을 참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 교리들에 헌신한 사람들이며, 이런 교리들이 없어진다면 이미 로마카톨릭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양들의 목자
오늘날 카톨릭 교인들은 요한 바오로 2세의 가장 큰 업적으로, 104차례의 해외 순방을 통해 129개국을 방문한 것을 꼽는다. 그는 이 일에 남달리 열심을 내었다. 말년에 건강이 악회되었을 때에도 휠체어를 타고서까지 여행을 했던 그이다.

그는 왜 이토록 이 일에 열정을 품었는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양떼를 두루 살피는 목자로서의 행보였던가? 아니다. 그의 행보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상당히 많았다. 폴란드, 쿠바, 남미, 이스라엘, 동티모르 등에 대한 방문은 당시 강대국들에게 메시지를 주는 방문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방문 목적은, 그가 방문하는 모든 지역을 자기 제국에 편입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땅에다 입을 맞추는 행동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자기들 표현으로 “이곳은 하느님의 땅”이라는 의미인데, 사실은 “이곳은 내(교황) 땅”이라는 것이다. 교황이 어느 나라를 방문하면, 정치적으로 교황의 행보를 반대하는 몇 외에는 모두가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여기에는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불교나 구분이 없다. 교황은 그들 모두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교환하며 그들에게 인정받는다. 가는 곳마다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마치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다니실 때 군중들이 따라다니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의 제국을 넓혀 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그는 우리 나라를 두 번이나 방문했다. 1984년에는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으로 방문해 103명을 성인으로 지정했고, 1989년에는 세계성체대회를 기념으로 방문했다. 그때마다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다. 그가 우리 나라를 두 번이나 방문했다는 것은, 우리 나라가 그만큼 인정받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천주교인들 외에도 이 사실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가 마귀의 종인 것을 안다면 그것을 기뻐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마귀에게 인정받고 세상에게 인정받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행보들은 그의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가 방문하면 그 지역의 천주교는 “부흥”한다. 바티칸이라는 국가의 원수라고는 하지만, 그의 국민과 군대는 바티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국민과 군대는 전 세계 11억 명에 이르는 카톨릭 신자들과 그 정치가들이다. 그의 신하들은 전 세계 40만 명의 신부와 75만 명의 수녀들이다. 그의 조직은 카톨릭 교회를 포함해, 고아원과 양로원에 이르는 10만여 개의 사회복지시설들, 수만 개의 카톨릭계 학교들, 또 수백 개가 넘는 카톨릭 신문과 방송들이다. 이러한 조직들이 더 잘 갖추어져 간다면, 그의 왕국은 확장되는 것이다.
이들이 교황에게 충성만 한다면 자국의 통치자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교황은 종교의 힘으로 전 세계를 통치하는 것인데, 그 수가 많을수록 그의 힘은 커져간다. 그리고 그 일을 효과적으로 이루는 데 교황의 방문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그는 그의 제국의 대적 세력들, 예컨대 공산주의나 타종교들도 효과적으로 제압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세계의 군주로 군림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해서 교황들은 중세 유럽을 통치했다. 친위대원 몇밖에 갖고 있지 않은 교황이 온 유럽의 왕들을 움직여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그동안은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기에 지배 야욕이 드러나지 못했을 뿐, 이제는 다시 그 큰 세력을 통해 오히려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바로 그러한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특히 개신교회들을 향해 손을 뻗는 행위에 주목해야 하는데, 지난 2000년에는 순교자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개신교, 그리스 정교, 성공회 등에 속한 종교인들까지도 순교자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독일 루터교의 폴 슈나이더 목사 등이 대표적이다. 그가 개신교를 인정하는 것은 그의 잃어버린 왕국의 한 부분을 찾고자 하는 야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종교개혁 이래로 그의 왕국은 얼마나 큰 손해를 봤는가? 그 부분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의 지도자들이 눈먼 소경 같아서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교황이 내미는 손을 덥석 잡아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황이 우리 나라를 방문했을 때 교계를 대표하는 목사들이 쌍수를 들고 그를 맞이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종교개혁자들의 후손이라 자처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조로 모시는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교황을 향해서 “적그리스도”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이제 이 눈먼 안내자들은 자기 무리들을 이끌고 교황의 치마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 이제 요한 바오로 2세는 갔다. 그리고 그를 뒤이어 베네딕토 16세가 왔다. 세계는 또다시 그에게 주목하며, 그가 카톨릭 교회와 세계를 향해 끼칠 영향력들을 점치고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성향을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로마카톨릭을 이끌 것인가 하는 것들이 교계와 세상의 관심사이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역시 또 하나의 적그리스도(a antichrist)로서, 요한계시록 13장의 적그리스도(짐승)을 예표할 인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마지막 교황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길을 훨씬 더 가까이 마련할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 역시 세상의 추앙을 받을 것이며, 분별력없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역대의 교황들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화의 사도, 참회하는 자, 양들의 목자... 그러나 우리는 인자한 미소 뒤에 숨겨진 마귀를 분명히 본다. 그는 마귀의 사도였고, 위선자였으며, 우상 목자였다. 그 정치적인 술수로 카톨릭 왕국의 잃어버린 많은 부분을 찾았고, 그 세력을 충분히 확보한 사람, 이제 그는 그의 영원한 주인 마귀의 품으로 돌아가, 그를 기다리는 영원한 불 속으로 돌아갔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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