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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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 목사에게서 나온 앵무새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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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5월호>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 측에서 발간하는 <주일신문>의 "신학마당" 란에는 3월부터 한국신학편집장 김민정 여전도사의 성경 용어, 신학 개념 해설이 연재되고 있다. 그 코너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구약성경의 온갖 용어와 개념들을 다루며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기동 목사 측에서 발간한 신문이기 때문에 그런 교리적인 설명들에 그들의 왜곡된 신학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름대로 "신문"이라고 펴내면서 교리적, 신학적 오류를 퍼뜨리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미 몇 차례 게재된 내용(창세기 1,2장 관련)을 가지고 초두에 그 비성경적인 설명들을 바로잡고 김기동 측 교리와 신학이 성경을 멋대로 왜곡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경고하고자 한다.


1. 김민정 전도사는 창세기 1:1과 요한복음 1:1에서 쓰인 히브리어 동사와 헬라어 동사가 완료 형태니 미완료 과거니 하면서, 천지창조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뜻과 역사, 우주 그 이상의 세계를 조명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자신이 앞으로 알려 줄 것처럼 말했다(<주일신문>, 2008년 3월 9일자, 창세기와 하나님의 의도 1 - "태초에"). 그 처음 글은 비교적 건전하지만, 김전도사는 그 뒤로 "하나님의 의도"는커녕 온통 성경과 어긋난 거짓 교리들로 글을 도배해 놓았다.


2. 김민정 전도사는 창세기 1:2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에서(<개역성경>은 "하나님의 신"이라고 되어 있다) "영"이 히브리어로는 "루아흐"인데, 그 단어는 "바람," "숨," "영"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단어라면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바람"이라고 주장했다. 창세기 1:2에서 그 표현을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보는 것은 구약의 성령 이해와도 맞지 않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영이 공간을 이동하며 움직이신다는 오류를 낳게 된다고 근거를 대었다. 김전도사는 "하나님의 영"을 "하나님의 바람"이라고 하더니, 그렇다고 해서 그 "바람"이 무인격의 존재는 아니라며 그것은 "천사"라고 했다(<주일신문>, 2008년 3월 16일자, 창세기와 하나님의 의도 2 - "천사와 바람"). 왜곡된 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변개하는 김전도사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평가해 보자.
① "루아흐"라는 단어만 나올 때는 "영" 외에도 "바람"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창세기 1:2에 나온 표현, 곧 "루아흐 엘로힘"(하나님의 영)은 성경 어디서도 "천사"로 쓰인 적이 없다. "루아흐 엘로힘"(하나님의 영)은 "성령"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영"과 신약의 "성령"님은 동일하게 사람 안에 계시고(창 41:38, 롬 8:9, 고전 3:16), 사람 안에 충만하시고(출 31:3; 35:31, 행 2:4; 7:55), 사람에게 임하신다(대하 15:1, 행 1:8; 11:15). 천사들은 사람 안에 있거나 사람 안에 충만하지 않다.
② 성령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시지만 성경에서 그분이 어떤 장소에서 일을 수행하려 하실 때 그분은 "이동"하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의 영"은 구약성경에서도 어떤 사람에게 "임하시며"(민 24:2, 삼상 10:10; 11:6; 19:20,23, 대하 15:1; 24:20 등),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내려오셨다"(마 3:16). "임하시고" "내려오시는" 것은 분명히 "이동"에 대한 표현이다.
③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하신 분의 호흡이 내게 생명을 주셨도다』(욥 33:4). "하나님의 영"은 창조주이시다. 창세기 1장은 창조에 대한 기록이며, 창세기 1:2은 6일 창조를 시작하시려는 그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김기동 목사에게서 물려받은) 김전도사의 신학은 피조물인 천사들을 창조주의 위치로 승격시키려는 가짜 신학이다.


3. 김민정 전도사는 창세기 1:27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오직 "신체적인 외형"이 같다는 의미로 해석했다.1) "형상"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우상"을 지칭할 때도 쓰는데 그때는 "물질적, 신체적인 것의 묘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란다. 또 창세기 9:6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을 금하는 내용을 근거로 대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손실되거나 파괴되지 않았다고 했다. 김전도사는 또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롬 5:14)이라고 한 것을(김전도사가 인용한 <개역성경>으로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 근거로 대면서, 인간이 만들어졌기에 예수님께서 인자가 되실 수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은 그처럼 그분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다한 인간을 위해 피를 흘리셔서 구원하셨다고 주장했다(<주일신문>, 2008년 3월 23일자, 창세기와 하나님의 의도 3 - "하나님의 형상"). 이런 엉뚱한 주장은 성경으로 전혀 뒷받침되지 않는다.
① 창세기 9:6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전혀 입증하지 않는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훼손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은 타락 이후에도 인간을 (짐승과 달리) 어느 정도 존중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②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롬 8:29). "하나님의 형상"이 오직 신체적인 외형이고 타락으로 영향받지 않았다면 "미리 아신 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인류가 이미 그 형상과 일치해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 안에서 새롭게 된 새 사람을 입었다(골 3:10). "새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되었으니 "새 사람"이 신체적인 외형인가? 구원받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피부라도 바뀌었다는 의미인가?
③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롬 5:14)이라는 말씀을 적용하는 모습은 실로 가관이다. 아담이 "오실 분의 모형"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길을 예비한 "사명"이나 공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로마서 5장 문맥에서 아담이 "오실 분의 모형"인 이유는 그 한 사람을 통해 온 인류에게 사망이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 한 분을 통해 온 인류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것과 맞대응이 되기 때문에 "모형"이다. 곧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것은 인간의 "범죄," 곧 금지된 나무 열매를 먹은 불순종을 두고 말한 것이다.
④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길을 예비했고, 하나님의 아들은 사명을 다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은 기본도 안된 신학이며, 구원에 있어서 더러운 죄인의 공로를 주장하고 있는 파렴치한 신학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사명을 다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해 주시려고 오셨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은 "죽음"의 세력을 가진 마귀를 멸망시키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기 위함이다(히 2:14-17). 곧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러 인간으로 오셨다. 그리고 "죽음"은 죄로 인해 왔다(롬 5:12). 그러므로 죄로 인해 사망이 오지도 않은 인간 창조의 상황에서부터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야 하는 당위성이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딤전 1:15, 눅 19:10). 그러므로 "죄인"이 있기도 전인 인간 창조의 상황에서부터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야 하는 당위성이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김전도사(및 김기동 목사)의 신학은 성경의 근본을 계속 왜곡하고 있을 뿐이다.


4. 김민정 전도사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창조된 인류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1장에서는 남녀가 "동시"에 창조되었고 2장에서는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으며,2) 또 1장과 2장에서 남자와 여자를 지칭하는 원어 단어부터가 다르다는 것이다(1장은 "자카르"와 "네케바," 2장은 "이쉬"와 "이샤"). 1장의 남녀에게는 "동물들처럼" 생육과 번성이3) 명령으로 주어진 데 반해, 2장의 남녀는 여자가 남자를 돕는 배필이라는 것이다(<주일신문>, 2008년 3월 30일자, 창세기와 하나님의 의도 4 - "남자와 여자"). 또 하나의 새로운 인류를 창조해낸 이 기괴한 주장도 성경적으로 평가해보자.
① 창세기 1장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 시점이 "동시"임을 입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창 1:7)라는 말씀은 여섯째 날에 남자인 사람이 창조된 것이고, 거기에 이어지는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 주시고』(창 1:27,28)라는 말씀은 인간 창조라는 문맥 속에 부가적으로 기록되었을 뿐 그 사건 자체는 여섯째 날에 벌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창세기 2장도 여자가 창조된 것이 남자의 창조보다 꼭 "여러 날 후"임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같은 날의 서로 다른 시간일 가능성도 있다.
② 원어 단어가 다르다고 해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남녀를 서로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은 다른 언어들과 달리 원어만 거짓되이 다루는 것이다. 영어에서 남녀를 "man/ woman" 대신에 "male/female"이라고 말할지라도, 또 한글에서 남녀를 "남자/여자" 대신에 "남성/여성"이라고 말할지라도 그것이 서로 다른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③ 마태복음 19:4에서는 『처음에 사람을 지으신 분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라고 했다. 이것은 창세기 1:27에서 말하는 인간이다. 김전도사의 논리대로라면 남녀를 지으셨다는 것이 "동시"에 언급되었으므로 이 남녀는 그야말로 "동시"에 지어진 남녀이며, 고로 창세기 2장의 인간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 곧 그 남녀를 지으시고 말씀하신 내용은(마 19:5) 창세기 2장의 인간에 대해 주어졌던 내용이다(창 2:24). 곧 창세기 1장과 2장은 동일한 인간 창조를 언급한 것이다.
④ 창세기 1장의 인간에게는 "동물들처럼" 생육과 번성하는 것 그 이상의 본분이 주어졌다. 바로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창 1:28). 이 다스림은 시편 8:4-6에서 다시 언급되고 이것은 다시 히브리서 2:5-9과 고린도전서 15:27,28에서 인용되면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는 것으로 적용된다. 김전도사(및 김기동 목사)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을 "동물적 사명"을 성취하는 분으로 전락시키는 신학이다.


5. 김민정 전도사는 창세기 2:7, 곧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는 말씀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을 두고 이미 인격을 갖추고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으로,4) "그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셔서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는 것을 두고 "영"이 들어가서 "영적으로도 사는(말하자면 거듭난)" 존재가 된 것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앞서 주장한 것처럼 창세기 1장의 인류와 2장의 인류가 서로 다르다는 비성경적 주장을 보강하기 위한 방편이다. "영이 없는" 인류와 "영이 있는" 인류로 상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① "영이 없는 인간" 개념은 본래 김전도사에게 가짜 신학을 전수한 김기동 목사가 창안해낸 것이다.5) 그러나 성경은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증언한다. 하나님께서 영을 거두어가시면(곧 영이 없어지면) 육체적으로도 죽게 된다(전 12:7). 창세기 2:7과 밀접하게 연관된 표현을 담고 있는 욥기 27:3-6의 문맥 역시 "내 호흡이 내 안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내 콧구멍에 있는 동안"은 "내가 죽기까지"(욥 27:5), "내가 사는 동안"(욥 27:6)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영"이 있어야 "육체적 생명" 또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약 2:26). "영"이 없이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성경에 없다. 영이 없으면 시체다. 흙으로 만들어진 상태만으로의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죽어 있는 육체"에 불과하다.
② 아담의 범죄 이후에 "영"은 "죽게 된다"(창 2:17). 그래서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다"고 묘사된다(엡 2:1,5). 그러나 "영의 죽음"이라는 것은 "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있는 영이 어떤 기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영이 죽은" 사람들도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몸 안에 "영이 없으면" 육체적으로도 살지 못한다.
③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아직은 육체뿐이었다. 아직 살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후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다. 그래서 인간 속에 "영"이 생겼다. (타락 전에 이 "영"은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할 수 있는, "죽지 않은" 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날 때는 영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흙으로 지어진 육체 속에 "영"이 생겨남과 동시에, 육체뿐이었던 사람은 단지 움직이는 육체의 차원도 아닌 "살아 있는 영원한 개체" 곧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이것이 창세기 2:7의 의미이다. 인간의 3중 구조인 영, 혼, 몸이(살전 5:23) 생겨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개역성경>은 원어도 다 무시하고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아니라 "생령"이 되었다고 변개되어 있다. 김전도사는 변개된 성경을 기준으로, (인간이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는 아니므로) 그것이 "육체적 생명"과 대비되는 인간의 "영적 생명"을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민정 전도사의 교리는 김기동 목사에게서 나왔다. 성경적인지 아닌지 분별할 줄도 모르는 김전도사는 김기동 목사의 거짓 교리를 그저 앵무새처럼 답습하고 말았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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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기동, <베뢰아원강> 2판, p.486, 주30.
2) 위의 책, p.639.
3) 위의 책, p.640, 주295.
4) 위의 책, p.640,690.
5) 위의 책, p.635,712, 주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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