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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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11월호>

<한글킹제임스성경>

『벧엘로 와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하고 매일 아침 너희 희생제물을 가져오며 삼 년 후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누룩과 함께 감사의 희생제물을 드리며 자원하는 제물을 선포하고 공표하라. 오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임이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암 4:4,5).


<개역개정판>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4,5).


요즈음에는 인공위성을 통해 “위성항법시스템”(GPS)을 적용한 “길 안내 프로그램”이 거의 일상화되어 있어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장소도 별 어려움 없이 찾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휴대폰”조차 없던 시절에는 길을 찾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전화 통화로 받아 적은 메모 하나에 의존하여 약속 장소를 찾아가는 일이 흔했으며, 길을 아는 사람이 그려 준 약도라도 있으면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은 약도일 경우에는 결국 길을 헤매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간다든지, 아예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를 찾아 다시 통화해서 길을 새로 찾아가는 일이 허다했다. “약도” 역시 지도의 일종으로서 그 유용성의 핵심은 “정확성”에 있다. 정확하지 않은 지도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고, 오히려 길을 애써 찾으려 하는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이다. 설령 정확한 지도를 갖고 있다 해도 지도를 잘못 보고 길을 헤매는 일이 있거니와, 애초부터 잘못된 지도라면 그 문제의 심각성이 얼마나 더하겠는가?


성경은 사람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지도와 같다. 성경도 그 유용성의 핵심이 “정확성”에 있다. 정확하지 않은 지도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정확하지 않은 성경도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정확하지 않은 성경으로 어떻게 정확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도 지도를 잘못 해석하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데, 정확하지 않은 성경 속에서 진리만을 골라내어 정확하게 읽어 낼 수 있겠는가?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도 지도를 잘못 해석하여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어서 진리의 길에 올바로 들어서지 못한 채 삶을 낭비하고 있다. 당신은 올바른 지도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지도를 보고 길을 가려 하는데, 그 지도가 36,000군데 이상 틀리고 목적지 근처의 골목과 건물이 2,200군데 이상 지워져 있다면, 그런 지도를 들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은 보존된 말씀인 <한글킹제임스성경>과 비교하면 36,000군데 이상 틀리고 신약에서만 2,200단어 이상 삭제되어 있다. 과연 이런 성경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진리 근처에라도 갈 수 있겠는가? 당신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1,189장의 편지를 썼는데, 중간에 누가 36,000군데 이상 바꾸고 2,200단어 이상 지워 버렸다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당신이 쓴 편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올바른 편지를 받았는가? 아니면 사탄이 변개한 편지를 받았는가?


앞서 제시한 아모스 4:4,5에서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방식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행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양 착각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너희 마음대로 죄를 짓고, 너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나를 섬겨라.”라고 신랄하게 비아냥거리고 계신다.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좋아하는 “죄”는 『너희는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며, 궁핍한 자들을 짓밟고, 그들의 주인들에게 말하기를 “술을 가져다 우리로 마시게 하라.”고 하는도다.』(암 4:1)에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답시고 “십일조”와 “희생제물”과 “자원하는 제물”을 드린다. 『헛된 예물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게 가증함이요, 새 달들과 안식일들과 집회들을 모으는 것도 내가 견딜 수 없으니 심지어 엄숙한 모임까지도 악한 것이니라』(사 1:13). 과연 그런 자들의 경배와 제물을 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겠는가? 『높은 눈과 교만한 마음과 악인의 쟁기질은 죄니라』(잠 21:4).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십일조”와 “희생제물”과 “자원하는 제물”을 드렸다. 『이것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임이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암 4:5). “자기만족”을 위해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식”을 따르겠는가? 오히려 그는 더 큰 “자기만족”에 이를 수 있게 해 주는 “자기 나름의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바로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러했다. 매년 드려야 할 십일조(레 27:30-33, 신 14:22)를 “3년에 한 번” 드렸고, 누룩 없는 희생제물이(레 2:11) 아니라 “누룩과 함께” 희생제물을 드렸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드렸어야 할 “자원하는 제물”을 “선포하고 공표”하면서, 즉 자랑하고 떠벌리며 드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계속 그렇게 너희 마음대로 하라.”라고 비꼬고 계신다. 그러시면서 그들에게 임할 멸망의 날을 선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함으로 맹세하셨으니, 보라, 그 날들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요, 그가 너희를 갈고리로 너희 후손을 낚시로 끌어가리라』(암 4:2).


그렇다면 아모스를 통해서 하신 이 책망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 국한된 책망이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배교한 신학대학 교수들과 목사들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외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며(딤전 2:4), 그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기를 원하신다. 『너희는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생각하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여 진리로 그분을 섬기라』(삼상 12:24). 그러나 오직 “자기만족”에 눈이 먼 배교자들은 교인들로부터 십일조와 헌금은 갈취하면서도, 그들에게 “진리의 지식”은 가르치지 않고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이라는 썩은 음식을 먹이면서 교회 놀이만 즐기고 있다. 『이는 그들이 지식을 싫어하며 주를 두려워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라』(잠 1:29).


개역개정판은 『삼 년 후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를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로 말도 안 되게 변개했을 뿐만 아니라, 『감사의 희생제물』을 「수은제」로, 『자원하는 제물』을 「낙헌제」로 번역했다. 그나마 “수은제”는 국어사전에 “모세가 율법으로 정해 놓은 제사”라는 어설픈 설명이라도 나와 있지만, “낙헌제”는 아예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를 써서 성경을 번역한 자는 누구인가? 아마 “수은제” 역시 개역성경에 나와 있어서 나중에 국어사전에 첨가된 단어일 것이다. 개역성경을 개정했다고 하는 개역개정판도 “수은제”와 “낙헌제”를 고집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개정”했단 말인가?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에는 “빵”으로 번역되어야 할 단어들이 모두 “떡”으로 번역되어 있다. 왜 빵을 떡이라고 번역했는가? 빵과 떡이 같은가? 개역개정판은 왜 개역성경의 떡을 빵으로 개정하지 않았는가? 출애굽기 12:8에는 『또 그들은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을지니 불에 구워서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함께 먹을지니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무교절”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빵을 떡으로 번역하려던 개역성경 및 개역개정판 번역자들은 『누룩 없는 빵』을 “누룩 없는 떡”으로 번역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떡에는 누룩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누룩 없는 떡”이라는 뜻의 한자어 “무교병”(無酵餠)을 창안했다. 그들도 “누룩 없는 떡”이라는 표현이 말도 안 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 6:41)이시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되어 있다. 빵과 떡도 구별하지 못하는 허접한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으로는 절대로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만찬”을 행하셨던 그 밤에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눅 22:19)라고 명령하셨다. 떡이 아니라 빵을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행하려면 제대로 실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 그들은 “주의 만찬”을 할 때도 떡을 먹는가? 그들이 믿는다는 소위 그 성경에 떡이라고 되어 있으니 떡을 먹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떡을 먹지 않고 빵을 먹는다면 무슨 근거로 빵을 먹는 것인가? 그들의 성경에는 빵이 없지 않은가! 하물며 그들은 “주의 만찬”에서 카스텔라나 제과점 빵을 먹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그것은 “누룩이 있는 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떼어 주신 빵은 “누룩 없는 빵”이었다.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으로는 진리를 실행할 수 없다. 진리를 모르는데,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는가?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누룩과 함께 희생제물을 드렸다. 『너희는 누룩을 넣어 만든 어떤 음식제물도 주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불로 드리는 주의 어떤 제물에도 누룩이나 꿀은 불사르지 못함이라.』(레 2:11)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 방식”으로 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려 하는 자들은 “사탄의 성품”(사 14:12-14)을 물려받은 사탄의 자녀들이다.
오늘날 배교한 신학대학 교수들과 목사들은 누룩과 함께 “주의 만찬”을 행한다. 성경에서 누룩은 “죄”와 “거짓 교리”를 의미한다. 이렇듯 그들은 “주의 만찬”에서 누룩 있는 빵을 먹음으로써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죄”를 짓고 있다. 또한 변개된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으로 “거짓 교리들”을 가르치고 실행하는 자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성경은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지도와 같다. 지도는 정확해야 한다.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현대어 성경, 킹제임스 흠정역 같은 거짓 성경으로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썩은 음식을 먹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인 <한글킹제임스성경>으로 진리의 지식을 배우고 실행하라. 바른 말씀인 <한글킹제임스성경>만이 “누룩”을 제거할 수 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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