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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을 믿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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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11월호>
『히스키야의 나머지 행적과 그의 모든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물을 성읍으로 가져왔는지는 유다 왕들의 역대서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왕하 20:20)유다의 히스키야왕 제십사년 봄 예루살렘 남서쪽 성읍인 라키스를 함락시킨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그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도 함락시키기 위해 라키스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장기적인 수성전(守城戰)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히스키야는 성 밖의 물의 근원을 막아 산헤립의 군대가 식수로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성안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기혼샘을 막고 지하수로를 파서 실로암 못까지 연결하는 공사를 지시한다. 『히스키야가 산헤립이 와서 예루살렘을 치고자 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고관들과 용사들과 의논하여 성읍 밖에 있는 물의 근원을 막으려 하니 그들이 그를 돕더라』(대하 32:2,3).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이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전쟁의 마지막 부분이 『그날 밤에 주의 천사가 나가서 앗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더라.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보라, 그들이 모두 죽은 시체더라.』(왕하 19:35)로 끝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은 전쟁의 마지막 부분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에 관한 기록 전체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히스키야 터널”로 명명된 이 지하수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880년 여름이었다. 예루살렘 실로암 마을의 아이들이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 중 한 아이가 물이 흘러나오는 지하 터널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침 터널 입구를 통해서 들어온 빛이 터널 벽을 비추고 있었고, 아이는 그 벽에서 글씨가 새겨진 비문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역사의 진실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순간이었다. “실로암 비문”으로 명명된 이 비문은 총 여섯 줄에 200자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비문에는 「3큐빗(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서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터널이 뚫리자, 동료들은 끌어안고 도끼를 서로 마주쳤다. 물은 샘에서 1,200큐빗(525m) 흘러 내려왔다.」라고 적혀 있었다.
실로암 비문이 발견되고 히스키야 터널의 역사성이 증명된 이후에도 몇 가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첫째는 기혼샘에서 실로암 못까지는 직선거리로 315m인데, 왜 위급한 전쟁의 시기에 S자를 두 개 연결한 듯한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525m나 되는 터널 공사를 했는가였고, 둘째는 히스키야 터널은 525m인데, 이처럼 긴 거리의 터널 공사를 그 기간 내에 실제로 해낼 수 있었는가였다. 셋째는 기혼샘에서 실로암 못까지의 기울기가 0.06%로서 실제 높이가 32cm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조금만 오차가 생겨도 물이 흘러올 수 없었을 텐데, 당시의 측량 기술과 토목 공사 기술로 그런 정교한 공사 계획이 가능했었는가였다.
히스키야 터널에 관한 이러한 의문들 중에서 첫째 의문에 대해서는 지상에 있는 유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그나마 합리적인 답변으로 여겨져 왔으나, 나머지 두 의문점에는 마땅한 답변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1978년 한 지질 조사단에 의해 예루살렘성에 대한 정밀한 지질 조사가 이루어짐으로써, 이 의문들이 해소되었다. 기혼샘과 실로암 못은 바위틈에 의해 원래 자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기혼샘에서 물이 흘러나가는 바위틈을 파 내려간 상류 팀과 실로암 못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바위틈을 파 올라간 하류 팀이 터널 공사를 통해 결국 만나게 된 것이었다.
히스키야 터널 입구
지질 조사단은 기혼샘에서 실로암 못까지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던 바위틈이 4만 년 전에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발굴 현장에서 직접 발굴하거나 역사의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이 결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믿음을 향상시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히스키야가 확신을 가지고 오직 하나의 공사 계획을 통해서 지하수로를 완성하였는지, 아니면 여러 방향의 수로 공사를 실시하여 그중 하나를 성공한 것인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이 전쟁의 전체 흐름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히스키야나 이사야에게 주신 지혜에 따라 히스키야가 이 일을 행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해석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명철을 허락하신다.
많은 고고학자들이 여리코성의 붕괴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지 않는다. 조지 멘델홀은 40여 년간 미시간대학교와 시애틀퍼시픽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친 구약학자인데, 이른바 여리코성의 붕괴에 대하여 “농민 봉기설”을 주장했다. 그는 카나안 도시 국가의 산중 농민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노동 학대와 과도한 공물 헌납 요구를 견디다 못해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여리코성이 붕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리코성의 발굴을 통해 곡식이 가득 든 항아리들이 불에 탄 그대로 발견되어 이러한 주장은 신빙성이 없음이 밝혀졌다. 착취당하던 농민들의 봉기에 의해 여리코성이 붕괴되었다면, 성 안에 있는 곡식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 여성 고고학자 캐스린 케니언은 6년간의 여리코성 발굴을 통해, 여리코성의 붕괴가 성경에서 기록한 기원전 15세기가 아니고 기원전 16세기라고 주장했다. 여리코성의 붕괴 원인도 이스라엘에 의한 것이 아니고, 힉소스 패잔병들이 이집트에서 쫓겨나 북상하면서 여리코를 침공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발굴 자료에 의한 그녀의 주장은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어 “성경고고학의 거대한 실망”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케니언의 주장은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브라얀 우드 교수에 의해 정면으로 반박되었다. “도기 분석법”의 대가인 우드 교수는 여리코성 유적에서 발견된 항아리들이 기원전 15세기의 것임을 확인함으로써, 여리코성의 붕괴가 성경에 기록된 연대와 동일한 시기임을 밝혔다. 멘델홀 교수의 “농민 봉기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리코성에서 곡식이 가득 든 항아리가 불에 탄 그대로 많이 발견됨으로써 힉소스 패잔병들에 의한 붕괴가 아님이 확실해졌다. 힉소스 패잔병들이 약탈하면서 식량이자 화폐 대용품인 곡식을 그대로 두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록이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이지만, 성경의 기록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만 드는 학자들도 믿음이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성경의 사실을 어떻게든 자신들의 머리로 이해되는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지한 학자들의 노력은 오히려 성경의 무오성을 훼손할 뿐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산헤립 군대의 병사 수가 줄어든 것을 “들쥐 떼가 몰려와 무기들을 갉아 먹어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으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급성 전염병”을 그 원인으로 제시했다. 쥐들이 무기들을 갉아 먹으면 병사의 수가 줄어든다는 발상은 불합리할 뿐 아니라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요세푸스는 왜 “주의 천사”라는 단어를 “급성 전염병”이라고 바꿔 읽는가? 그는 무지한 성경 독자들이 “주의 천사”를 성경에 쓰인 그대로 믿을까 봐 성경을 과학적으로 바꿔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스탠퍼드대학교의 지구물리학자 아모즈 누르(Amoz Nur)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의 물이 끊어지고 물 무더기가 되어 쌓인 기적(수 3:13)을 “지진”에 의한 “산사태”로 물길이 막혀서 일어난 현상으로 설명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믿음 없는 자들에게는 상당히 근거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160년부터 1906년까지 아담 지역을 흐르던 강물이 하루나 이틀 정도 끊겼던 기록이 다섯 번이나 남아 있고, 1927년 지진으로 인해 요단강 주변의 진흙이 무너져 내려 아담 지역의 강물이 21시간 동안 끊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지진을 통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불신자들의 해석에 현혹된 것일 뿐이다. 만약 그것이 “지진”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결코 성경대로 『마른 땅』(수 3:17)을 건널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 없는 <국제표준성경백과사전>의 편집자들은 성경을 과학으로 설명해 보고자 노력하는 자들의 말을 성경보다 더 신뢰하여 요단강의 물이 멈춘 것이 “지진”에 의한 “산사태” 때문이었다고 적어 놓았다.
대영박물관 발굴 팀은 여리코성 붕괴에 관해 지질 조사를 한 후에, 당시 규모 6.0의 “지진”이 발생하여 여리코성이 붕괴됐음을 보여 주는 “지질 구조”가 발굴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어떤 연구자들은 여리코성의 붕괴가 함성에 의한 “공명 현상”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참으로 “과학적 설명”을 좋아한다. 조사 결과 여리코 성벽은 바깥쪽으로만 무너져 내렸는데, 그 성벽을 무너뜨린 것이 “공명 현상”이나 “지진”이었다면 어떻게 성벽이 모두 바깥쪽으로만 무너져 내렸겠는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어떻게든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불신자들은 “지진”을 좋아한다. 유적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증거”가 없어서 못 믿겠다고 하다가도, 유적이 발견되면 성경과 다르다고 우기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기적들은 “지질 구조”나 “지진”처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는 것이다. 학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분명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성경과 다른 것”을 생각해 내려는 것이다. “성경을 인정하는 것”은 학자들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 올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성경의 사건들에 대해 성경 이외의 증거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류가 없으며 그 자체로 완전하다. 증명해 줄 증거나 유적 등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온전히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롬 10:17)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믿음”이 과학적인 증거나 유적 발굴을 통해서 생긴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자세히 보라.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과학적인” 사실들을 모으고 연구했지만 올바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은 성경 말씀보다 그들이 조사한 자료들이나, 그들이 발견한 유물들이나, 자기들의 과학적 추론을 성경보다 더 믿기로 이미 결심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평생을 연구하지만 결코 올바른 결론에는 도달할 수 없다.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 3:7).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과학적인 증거”가 불필요하다.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깨닫나니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는 것들로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