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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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반기를 드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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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8월호>

세대주의 신학자 허먼 호이트(Herman Hoyt)는 그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에서 말하기를 “이 원리(문자적 해석)를 분명히 진술하자면 성경을 그 문자적이고 통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이것이 성경 전체에 적용된다고 이해하는 원리다. 이는 성경의 역사적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교리적인 내용도 이런 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정보도 마찬가지로 이 패턴을 따르며 예언적인 내용도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성경에 비유적인 언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유적인 언어가 사용되는 대목에서는 비유적인 언어가 그 본문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기 위해 문자적 방법을 적용한 것이라는 뜻이다. 다른 어떤 해석 방법도 그 방법을 전적으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라도 사용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의도된 메시지를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박탈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반면에 “영적인 해석”이란 단어에 숨겨진 어떤 의미로서 보통 사람이 이해하는 뜻이 아닌 다른 뜻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고, 소위 “유명한” 사람들의 가장 “그럴싸한” 해석을 채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이 대표적으로 “영해”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통치하더라』(계 20:4). 무천년주의의 종말론을 택한 개혁주의자들의 경우에 이 “천 년”을 “10 곱하기 10 곱하기 10”으로 해석한다. “10”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숫자이며(이러한 정의는 성경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말이지만), 이것이 세 번 곱해진 숫자이므로, 이 “천 년”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통치하시는 권세가 세 번 완전한 것이 곱해진 의미”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그 말씀이 문자 그대로 천 년이라는 기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해석 체계를 갖게 되면 백 명이면 백 명이 모두 다른 의견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결국은 유명하다는 신학자 뒤에 줄을 서고 그의 의견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해석 체계를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영해”를 당연하게 여긴다. 오히려 성경 자체에서 “영해”한 사례들이 나오는데, 신학자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는 주장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경 자체에서 발견했다고 하는 “영해”의 사례를 찾아보고 그런 주장이 왜 생겨났는지, 왜 터무니없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 자체의 영적인 해석 발견 사례를 들자면, 아모스 9:11,12이 사도행전 15:13-18에 인용된 사례이다. 『그 날에 내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리라. 또 내가 그의 파괴된 것들을 일으켜 옛날처럼 세우리니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이방의 남은 자를 차지하리라. 이 일을 행하는 주가 말하노라』(암 9:11,12).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에서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에 다시 일으키실 유대 왕국과, 그때 이방 나라들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를 언급하는 구절로 본다. 하지만 개혁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5장에서 그 의미를 다르게 “영적으로” 인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잠잠해진 후에 야고보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형제 여러분, 내게 경청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한 백성을 취하시려고 처음에 어떻게 그들을 찾으셨는가를 시므온이 설명하였으니 이것은 선지자들의 말과 일치된 것이라. 기록된 바 ‘이 일 후에 내가 다시 돌아와서 쓰러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울 것이며 또 거기에 파괴된 것들을 다시 세워 일으키리라. 그리하여 남은 자들로 주를 찾게 할 것이며 또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이방인들도 그러하리라.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주가 말하노라. 세상의 시작부터 그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께 알려졌느니라.’고 함과 같으니라』(행 15:13-18).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가 인용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신약의 하나님의 자녀들, 곧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을 위해 인용된 것이다(행 15:7).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서 구약의 아모스 말씀을 사도 야고보가 문자적인 의미의 왕국 회복으로 적용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구절들 역시나 모두 영적으로 그 의미를 해석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그런 것인가?

신약성경에는 사도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한 사례가 여러 번 등장한다. 직접적인 인용이 있는가 하면 간접적인 인용도 있는데, 이럴 때는 구약의 여러 선지서들의 내용이 섞이기도 한다. 마가복음 1:2,3이 그 사례이다. 『선지서들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 “보라, 내가 네 면전에 나의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네 앞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들을 곧게 하라.’고 하는도다.” 하였더라.』 얼핏 보면 이 말씀 역시 이사야 40:3만 인용한 것 같지만(『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들을 곧게 하라.』)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말라키 3:1까지 복합적으로 인용되고 있다(『보라, 내가 네 면전에 나의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네 앞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그렇기에 마가복음 1:2에서 『선지서들』이라고 언급하신 것이다. 마귀 들린 성경 변개자들은 마가복음 1:2의 『선지서들』을 “이사야의 글”로 변개하는 오류를 범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가 『선지자들의 말』(행 15:15)을 인용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아모스 그 말씀 자체의 직접 인용이 아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 말씀 자체도 아니다. 야고보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야고보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칠십인역”을 인용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마귀 들린 신학자들은 “칠십인역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야고보의 인용이 아모스 9:11,12의 직접 인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해석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어떤 복수의 선지자들의 말을 간접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아모스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든지, 성취되었다든지 말하지 않고 “일치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말과 일치된 것이라』(행 15:15). 이와 비슷한 예가 성경에 또 등장한다. 『그리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졌으니,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은 삼십 개로 정한 자의 가격,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이 정한 그 가격을 가지고, 주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치렀도다.”라고 하신 것이라』(마 27:9,10). 예레미야서를 아무리 뒤져 보라. 이렇게 기록된 구절이 있는지 찾아보라.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 말씀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한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지 예레미야는 분명히 “말했다.” 이러한 사례는 또 있다. 『아담의 칠 대 손 에녹도 이들에 대하여 예언하여 말하기를 “보라, 주께서 수만 성도들과 함께 오시나니』(유 1:14). 유다서에는 에녹의 말뿐만 아니라 천사장 미카엘의 말도 나온다(유 1:9). 그러나 이런 말들이 모두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인가? 아니다! 성령님께서는 선지자들이 “구두로 말한 것”을 그분께서 필요한 부분만 모아서 신약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것이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존재하지도 않는 칠십인역을 찾아다니는 것인가? 성경의 잃어버린 책들을 찾아다니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완성된 계시의 책인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을 뿐이다. 성경은 완성되었다. 성령님께서 성경으로서 필요한 부분들을 모두 모아 놓으신 것이다. 『너희는 주의 책에서 찾아 읽으라. 이것들 중에는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고, 하나도 자기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바로 나의 입이 명령하였고, 바로 그의 영이 그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는 이미 사도였고(갈 1:19) 그는 『선지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를 “자유 인용”이라고도 하는데, 사도들에게 이런 일들이 허용되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사도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성경 자체에 대해서 수식하는 독특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선지자들의 성경”(마 26:56, 롬 16:26)인 구약성경과 “사도들”이 쓴 신약성경이다. 곧 성경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성경”인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제1저자이시고, 제2저자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다. 성경의 원 저자이신 성령님께서는 그분께서 들어 쓰신 인간 저자들에게 성경의 인용이든 해석이든 영감을 주시어 자유롭게 기록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마치 “사도”인 양 흉내 내어 성경의 말씀들을 마음대로 해석하며 “사도들이 했으니, 나도 한다”는 식이면 얼마나 무모하고 교만한 처사란 말인가! “사도들”로 “자처”하는 자들은 주의해야 한다. 『내가 너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며, 또 네가 어떻게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지만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찾아낸 것과』(계 2:2).

사도 바울 역시 구약을 인용할 때 원문과 다르게 인용한 사례가 있다. 『이 복음 안에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으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것은 하박국 2:4의 인용이다. 『보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그 안에 정직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한 반면, 이를 인용한 로마서에서는 “자기 믿음”이 아닌 “믿음”을 말씀한다. 이런 변화는 왜 생겨나는 것인가? 변개된 성경들처럼 구약의 말씀을 신약의 말씀과 일치시키기 위해 바꾸어야 하는가? 아니면 신약의 말씀을 구약의 말씀과 일치시키기 위해 바꾸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성경 변개를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피터 럭크만 박사는 이 점에 대해 그의 주석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울이 이 구절을 잘못 인용한 것은 성경을 변개하여 장사하는 자들처럼 히브리어 사본들을 “더 명확하게” 혹은 “더 정확하게” 혹은 “더 쉽게” 만들어 팔아먹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인도하셔서 신약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게 하심을 성경적으로 지지하게 하신 것이다. 로마서 1:17의 “믿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며, 이는 이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동일한 메시지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행 20:24). 그러나 구약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특정한 것에 대한 믿음이며, 구약 성도는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해서 행해야 했다(히브리서 11장과 야고보서 2장을 읽어 보라). 구약의 믿음과 신약의 믿음이 서로 다른 것이다.」

지난 2천 년 신약교회사 기간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기를 거부한 자들이 영적인 해석을 붙들고 가르침으로써 교회들을 망쳐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라고 하셨는데,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 마지막 때의 교회들이 그런 자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들은 주님의 문자적인 재림마저 “영해”하며 조롱하고 있다(벧후 3:3,4). 그런 데서 빠져 나와 바른 말씀을 믿고 실행해야 주님의 재림을 대비할 수 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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