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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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죽는 순간 부활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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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8월호>

필자는 한국기독교학술원 주제로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 이론에 대한 대토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최태영 박사(영남신대 명예교수)는 “성도들에게 정확한 부활 교리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날 부활’과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 사이의 논쟁을 통해 의심스러운 부분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론회 의제인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이란, 그리스도인이 죽는 순간 현재의 몸과 관계없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한다는 주장이다. 다소 해괴한 이것은 20세기 중반 로마카톨릭 학자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그 뒤 국내에서 그것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되었고, 이번 토론회는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최 박사는 “죽는 순간 부활한다”는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라며 고린도후서, 마태복음, 누가복음 등을 제시했다. 다음 발제자로 나선 이신건 박사(생명신학연구소장)는 부활 신앙의 형성 과정을 설명한 후 부활 시점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갔는데, 마지막 날의 부활에 가면 지금까지 부활에 관해 희미하게 알던 것을 온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면서 마무리했다.


그중 최 교수는 마태복음 22:23-33을 성도가 죽는 순간 부활한다는 주장의 근거 구절 중 하나로 내세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었는데 그들의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들의 하나님이라면 이는 그들이 이미 부활하여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 문맥 가운데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요』(마 22:32)라는 말씀은 31절의 『죽은 자들의[of the dead] 부활』이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다. 이에 반해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2)라는 말씀은 30절의 『부활 때』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다. 여기서 부활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먼저 부활은 자신의 몸을 다시 입는 것이다(23-28절, 욥 19:26). 그리고 부활에는 “순서”가 있다. 성경은 이것을 『첫 번째 부활』과 “마지막 부활”로 나누어 설명한다(계 20:5,6).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죽은 자들로부터의”(from the dead)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눅 20:35) 성경은 이들을 “부활의 자녀들”(눅 20:36), “의인”(눅 14:14, 행 24:15), “산 자”(딤후 4:1, 벧전 4:5) 등으로 부르고 있다.


반면 “죽은 자들의”(of the dead) 부활은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 천년왕국이 끝날 때까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다가 천년왕국이 끝날 때 부활하는 것으로 흔히 “마지막 부활”이라고 불린다. 한국 교계는 무천년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있을 이 총체적인 부활만을 가르치는데 이는 틀린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일곱 부활”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편 이 마지막 부활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부활로,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씀은 바로 이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산 자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죽었을 때 곧바로 부활하여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시기상 미래에 있을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할 자들이 “산 자”로 불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할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얘기이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22:23-33의 말씀으로 성도가 죽을 때 곧바로 부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문맥을 전혀 읽지 못한 채, 부활의 몸이 어떤 몸이며, 부활의 때와 시기가 있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무지한 가운데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최교수는 또한 고린도후서 5:1-8의 말씀으로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즉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곧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에 해당하는 부활한 몸을 입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때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입게 되거나(2절),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 옷입혀지고자 한다는(4절) 말씀을 죽음 이후 곧바로 부활의 몸을 입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육신의 몸이 부활한 것을 가리키지 않고 혼이 입게 될 천상의 몸, 즉 장차 몸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입고 있을 혼적인(soulish) 몸에 관한 말씀이다. 성도가 죽은 후에 곧바로 부활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또한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죽는 순간 부활한다는 주장을 입증해 준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지옥”을 믿지 않는 자들이 지옥의 실상을 한낱 “비유”로 여기는 것이지,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지옥에 간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지하 세계의 낙원)으로 간 나사로에 관해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요청하기를 나사로를 자기 아비 집에 보내어 형제들에게 증거함으로써 그 고통의 장소인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했다. 여기서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는데 나사로를 보내어 달라고 말했던 점과, 바로 그 나사로(혼)가 아브라함의 품에 살아 있다는 점을 볼 때, 최 교수는 나사로가 이미 부활해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한 것이다. 부활은 자신의 몸을 다시 입는 것을 말하는데, 나사로의 몸은 이미 장사되어 땅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나사로는 결코 지하 세계의 낙원에 부활한 몸을 입고 들어간 것이 아니다(눅 16:22). 또한 낙원에 간 나사로는 어떤 규명할 수 없는 영혼이 아닌 그의 혼이 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사로와 함께 지하 세계의 낙원에 있던 “구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함께 부활했기에(마 27:52) 그 이전에 지하 세계의 낙원에 있던 나사로는 더더욱 몸이 부활한 상태로 있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최교수를 비롯하여 한국 교회의 자칭 성경 교사들은 “첫 번째 부활”(계 20:6)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모르고 있다. 첫 번째 부활은 “구약성도들의 부활”(마 27:52)과 대환란이 시작되기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있을 “신약 성도들의 부활”(고전 15:50-58, 살전 4:16,17)과 주님께서 대환란 끝에 지상 재림하시기 전에 있을 “환란 성도들의 부활”(계 7:9; 11:12; 14:1)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도 바울은 이를 『그러나 각자 자기의 서열[부활의 서열]대로 되리니 그리스도가 첫열매들[구약 성도들의 부활]이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신약 성도들의 부활]. 그후에는 끝이 오리니[환란 성도들의 부활]』(고전 15:23,24)라는 말씀으로 설명했다.


부활에 관한 성경적 교리를 모른 채 성도가 죽는 순간 부활한다고 주장하거나 마지막 부활만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했던 후메내오와 필레토 같은 자들이다(딤후 2:17,18). 사도 바울의 시대에 있었던 자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그들의 거짓말을 종창처럼 퍼뜨리며 사람들의 믿음을 뒤엎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썩을 몸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시켜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곧 그 영광스러운 날을 고대하고 소망하며 산다. 만일 성도가 죽는 순간 부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아닌 우리가 죽어 장사될 날을 소망하는 꼴이 된다. 부활에 관해 정확한 성경적 교리를 정립해야 한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산 소망』(벧전 1:3)을 결코 빼앗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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