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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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칼 운동의 선봉에 선 한목협 대표회장 손인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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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9월호>

복된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오실 때, 주로부터 영원한 존귀와 영예를 얻게 될 사람들이 있고, 이와 달리 영원한 수치 속에 살아가게 될 사람들도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주님을 수치스럽게 대면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적 믿음을 실행하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 주님을 온전히 믿어 본 적도 없으며,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관여한 채 그 일들을 책망하는 일에 게을리했던 사람들은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딤후 2:15, 롬 10:11, 엡 5:11,12).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견뎌내지 못하고 세상과 죄와 비진리와 타협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의 원수들』(빌 3:18)이란 오명이 따라다니게 된다. 데마가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라. 성도들은 간증을 잃어버린 그를 “바울의 동역자”(몬 24)보다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린” 사람(딤후 4:10)으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인정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높임을 받는 사람 역시 “가증스럽다”는 수치스런 꼬리표를 달고 다니게 된다(눅 16:15). 물론 사람들에게서 높임을 받는 모든 경우가 다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신실한 사역자는 신실한 성도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그들의 입술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기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역자가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사람들에게서 높임을 받을 만한 상황에 서게 되었다면 반드시 자신의 현 위치를 돌아보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인정하시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주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수치스런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지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모임이나 단체가 주를 위한다는 명분만 있고 성경적 진리를 믿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 곳은 성도들에게 합당한 자리가 아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이 그런 곳에서 고귀한 직분을 받았다면 그것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직분을 충실히 수행한들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는 온전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겠는가? 비진리를 실행하는 모임에서 얻은 직분과 감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예가 아니라 오히려 수치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98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가 창립된 지 10년 만에 초대 대표회장 옥한흠 목사가 2선으로 물러나고, 손인웅 목사(덕수교회)가 그 뒤를 이어 제2기 수장을 물려받았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 및 한국 교회의 갱신운동과 관련하여 손목사의 위상과 역할에 교계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지만,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받은 감투나 직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수치스런 감투를 이어받은 손목사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점수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것이 수치스런 감투인가? 이는 그가 서 있는 한목협이 에큐메니칼을 위해 일어선 단체이기 때문이다. 한목협은 한국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목적으로 14개 교단[예장(합동), 예장(통합), 예장(고신), 기장, 예장(대신), 예장(합신), 기감, 예성, 기성, 기침, 나사렛, 기하성, 구세군, 성공회]에 속한 목회자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협의체이다. 이들은 오직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소망한다. 1998년 11월 26일 발표한 한목협 창립선언문에서도 밝힌 바, “어떤 이유나 변명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분열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유나 변명에도 불구하고”란 말에 주목하자. 이는 교회라는 간판만 달고 있다면 그 교회가 어떤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주장하고 실행해도 눈을 감아 준다는 말인가? 협의체에 속한 교단들만 보더라도 서로 간 신학적, 교리적 입장의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 차이에 대한 성경적인 규명 없이 “분열”은 나쁜 것이기에 무조건 서로를 수용하고 일치하자는 말인가? 아니면 그 중간 단계의 새로운 신학을 형성하자는 말인가? 하지만 중간 단계의 어떠한 새로운 신학도 성경적 신학이라 할 수 없는데, 이는 그것이 진리와 비진리가 타협한 혼합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에 따르면 비성경적인 실행을 하는 교회들로부터 떠난 신실한 성도들은 분열을 획책한 죄인들이 되고 만다. 그들은 “분열은 마귀의 획책”이라고 말한 어거스틴의 말을 빌려서 성경대로 믿는 믿음 때문에 온전히 성별해 나온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엄중한 권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고 공박하는 자들을 주의하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이 말씀에 비춰 보면 “비성경적 교리를 실행하는 자들로부터 떠난 사람들”이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적 교리에 역행하는 자들”이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신실한 성도는 그들에게서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 성별이다.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며, 이익이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익한 논쟁이 일어나느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딤전 6:5).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별”과 “분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한목협으로 들어가 각종 비성경적인 신학과 교리에 타협하는 것은 “분열”이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바 올바른 “성별”이라 할 수 있겠다.
손목사는 『교계의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라는 그의 글에서 양극화를 극복하는 방법에 관해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카톨릭교회가 지은 죄는 복음을 약화시킨 것이라면 개신교회가 지은 죄는 주의 몸인 교회를 찢어놓은 것이다. 진리를 위해서 교회를 찢었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진리를 지키는 것이 교회를 찢는 것보다 우월한 가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교회를 찢지 않고도 얼마든지 개혁하고 진리를 지킬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성별이 무엇인지, 그 어떤 부분에서도 올바른 분별력을 갖고 있지 않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마귀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는다. 『200여 개 교단으로 찢어진 한국 교회를 하나로 묶어내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하나의 교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 손목사가 이끄는 한목협이 장차 어디로 향해 갈지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에게 강력하게 역사하는 미혹의 영은 결국 그와 함께하는 자들을 “하나의 교회” 곧 로마카톨릭으로 귀속시키고 말 것이다.
손목사는 이러한 교회일치운동을 제2의 종교개혁으로 규명하고 있다. 곧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교도와 혼합된 카톨릭의 속성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바 “다양성”이라는 속성은 “유일한” 진리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러한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수불가결한 덕목이 있는데, 곧 “사랑”이다. 다시 말해 주장하는 교리가 달라도 “사랑”만 있으면 서로 연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로의 신학적 입장에 다소 차이가 있어도 “사랑”만 있으면 서로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손목사는 루터가 강조했던 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것으로 인해 “참된 교회”(?)인 로마카톨릭과의 분열을 초래하는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믿음과 사랑으로 구원 받는다”는 한층 더 “성숙한”(?) 구호를 내세워 루터의 종교개혁을 무색케 만들어 버렸다. 사랑을 겸비했다면 로마카톨릭과의 일치 속에서, 곧 하나의 교회, 하나의 몸 안에서 그가 주장하는 제2의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고전 13:6),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고후 13:8). 또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한다(엡 4:15). 불의를 행하고 비진리를 실행하는 어떤 기독교 교단이나 연합체 및 단체와도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함께 일치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바르게 보존된 <한글킹제임스성경>에 눈을 뜨지 못한 채, 변개된 <개역개정판>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는 그로서는 그만한 분별력을 갖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종교개혁과 같은 위대한 사역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틴 루터처럼 바른 성경에 자신의 믿음의 기초를 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들어쓰시는 것이다.
그러나 손목사와 같은 사역자들에게는 진리보다는 자신의 인간적 생각만이 앞서게 되어 있다. 진리를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만인 것이다. 성경적 진리에 기초를 두지 않은 사랑은 더 이상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의 인간적인 사랑은 이 마지막 때에 해야 할 교회의 과제마저 왜곡시키고 말았다. 『21세기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생명의 위기입니다...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신앙과 신학의 지평을 넓혀 역사, 문화, 지역 사회를 살리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1)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생명을 죽이는 악령의 세력과 죽임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세력과 병들고 죽어가는 사회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복음과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창조세계 전체 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도록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2) 그의 인간적인 사랑에 기초를 둔 “생명목회적 사명”은 마지막 때에 교회들이 해야 할 사명과는 거리가 멀다. 지옥으로 향하여 가는 혼들을 복음으로 이겨오는 위대한 사역은 외면하는 이들이 실로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일들을 이 땅에다 실현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 이 땅에 지상왕국을 세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목협에 소속된 목사들 가운데 과연 거리에서 설교하고 구령하는 이들은 몇 명이나 되는가? 과연 강단에서 지옥을 설교하고 교인들에게 죄에 대한 찔림을 주는 설교를 하는 목사들이 몇 명이나 되는가? 이런 면에서 볼 때, 손목사를 비롯하여 이 나라 교계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신의 임무도 수행하지 못하는 수치스런 감투를 달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감투가 수치스러운 감투가 아님을 입증하길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행보가 자신의 삶에 온전히 드러나고 있는지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곧 그가 나타나실 때와 그의 왕국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견책하고 책망하며 권고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로 돌리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며, 전도자의 일을 하고 네 직무를 완수하라』(딤후 4:1-5). BB
주석)---------------
1) <기독교연합신문> 2007.8.5. 제932호, 1면.
2) 손인웅, 『생명 살리기 운동에 대한 생명목회적 이해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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