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 분류
지옥에 간 어느 목사의 죽음
컨텐츠 정보
- 1,284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10월호>
사탄은 로마카톨릭의 “유아 세례”를 통해 수많은 죄인을 지옥으로 한꺼번에 쓸어 담았듯이, 조 목사의 “성령 사역”을 통해서도 죄인들을 대량으로 “아주 손쉽게” 지옥에 쓸어 넣었다. 이보다 더 “강력한 미혹”이 있겠는가! 이제는 조 목사도 그들의 뒤를 따라 그곳으로 직행했다. 조 목사는 생전에 “지옥”에 갔다 온 경험을 이렇게 “간증”(?)한 적이 있다. “얼마 전에 저는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몸 안인지 몸 밖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지옥은 마치 우주의 블랙홀 같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별들을 다 빨아 당겨서 삼켜 버리는 지옥인데, 엄청난 자석과 같았습니다. 자석이 끌어당기면 쇠붙이가 별수 없이 끌려가는 것처럼, 지옥은 죄만 있으면 다 끌어당겨요... 사람들이 엄청난 인력에 막 뒹굴고 곤두박질치면서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요... 캄캄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데 저도 회오리바람 같은 그 자석의 힘으로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지옥문에 들어가자마자, 그곳은 시간이 정지된 곳이었습니다. 영원한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고통은 도저히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서 못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2008년 2월 3일 주일 설교 내용).한때 자신의 이름을 “조바울”로 바꾼 적이 있던 그는 바울을 흉내 내려고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고후 12:2)이라는 표현을 도용했으나, 그가 끌려간 곳은 바울처럼 “셋째 하늘의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내가 십사 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 사람이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느니라』(고후 12:2).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위대한 종”(?)이 지옥을 경험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성경에서 생생하게 묘사하는 “지옥의 실상”을 도무지 믿지 않는 가짜 목사라서 그런 경험이 필요했던 것인가? 그가 흉내를 내려 했던 사도 바울이 지옥에 갔다 온 적이 있는가? 과연 바울 이래 성경대로 믿고 실행한 목사들 가운데 누가 그런 경험을 했는가? 마귀 들린 은사주의 목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한편 “지금” 그는 “13년 전”(2008년)에 끌려갔던 바로 그 지옥 안에 “쇠붙이”처럼 붙들려 있다. 이제는 그때처럼 다시 나올 수도 없다. 성경에도 없는 “순복음, 오중복음,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 긍정적인 사고, 희망 신학, 번영 신학”으로 그에게 가짜 확신을 심어 주어 거짓으로 안심하게 만든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구원받지 못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의 “구원 간증”이 이를 입증해 준다. 17세에 “폐결핵”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적이 있던 그는 자신이 구원받았을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밤에 자는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히피’ 같은 머리를 이렇게 내리신 분이 나를 보고 웃으시며, ‘나는 예수야... 네가 나를 잘 믿고 나에게 순종하면 내가 네 폐병을 고쳐 줄 것이다. 한국 사람 중에 오대양 육대주에 나가서 하나님의 사역을 한 사람이 별로 없는데, 나는 너를 보내어 온 천하에 다니게 하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도록 만들 것이니 지금부터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라... 열심히 공부해라. 안 죽을 테니까.’라고 말한 다음 사라져 버렸어요”(CTS, 「내가 매일 기쁘게」, 2014년 방송 자료).
성경 어디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나신 적이 없다. 인류의 죄를 제거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그분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안치하긴 했어도, 예수님께서는 그 세마포를 무덤 한쪽에 놔두시고 부활하셨다(요 20:5-7). 더욱이 예수님의 머리 모양은 “히피족”처럼 어깨까지 늘어뜨린 굽슬굽슬한 긴 머리카락이 아니다. 그것은 로마카톨릭의 화가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묘사할 때 즐겨 그리는 “쟈니”(Johnny)의 모습이다(우측 그림). 사실 이것은 장차 대환란 기간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짧고 새까만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니신 “셈족” 유대인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조 목사가 당시에 정말로 예수님을 만났고, 또 구원받은 것이 맞다면, 곧바로 “주님”이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나의 손을 보고 너의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요 20:28)라고 고백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난 바울도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행 9:6)라고 하면서 “주”라고 고백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하지만 조 목사는 “예수님”을 봤다고 하면서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의 얼굴이 잘 안 보였는지 “예수님이 맞다면 더 잘 보이게 가까이 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거절당했다.
더군다나 복음 전파를 위해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지시하시며 “학업”에까지 관심을 보이시는 자상하신 주님을 만났다니! 『보라, 내가 나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 위에 보내노라. 그러나 높은 곳으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 도성에서 기다리라.』(눅 24:49)라고 하셨고,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더욱이 “방언”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던 은사주의 목사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명령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간증하는 것 자체가 너무 우습지 않은가?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한다면서 “영어”라는 “방언”(외국어) 하나 할 수 있는 능력도 못 주시는 분이라니,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라니, 너무 은사주의 목사답지 않은 발상이지 않던가? 도대체 누구를 속이려 하는가?
그렇다면 그가 그날 밤에 만난 존재는 누구인가? 또 한 명의 사기꾼인 신천지의 이만희가 저녁에 만났다고 하는 바로 그 존재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기도 중 큰 별(천사)이 내 머리 위에 임하였고 그 별은 나를 북으로 인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세상을 버릴 목적으로 산을 향했다. 산으로 가는 도중에 ‘희고 빛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고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구나.’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땅에 엎드러졌다... 나는 처음 환상을 체험한 그날 저녁 처음으로 교회를 찾았고 다음 날 높은 산상에서 이 한목숨 다 바쳐 충성을 맹세한다는 혈서를 쓰고 신앙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이만희의 <영핵(靈核) - 참과 거짓에 대한 정의>).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든지, “희고 빛난 사람”이든지 간에 그들이 만난 대상은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하나님)가 아니라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희고 빛난 사람”은 이만희를 사이비 집단(신앙촌의 박태선)을 따라다니게 하더니 또 하나의 사이비 집단(신천지)의 교주가 되게 했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은 조 목사에게 “아, 신라의 달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려온다”라는 노래를 집안이 떠나가도록 크게 부르게 해 놓고 1년 만에 병을 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 목사는 이 이야기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최고위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에서 했는데, 특히 그 강연에서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종교는 평등합니다. 불교는 불교만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싸우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난 행동입니다.”(<뉴스앤조이> 2004년 5월 13일 기사 내용)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한 자들은 거짓 사도들이요, 기만하는 일꾼들이요,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가장하는 자들이라.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니 이는 사탄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사탄의 종들이 의의 종으로 가장한다 하더라도 큰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위대로 될 것이니라』(고후 11:13-15).
한편 조 목사는 성령님께서 자기 안에 계신 증거가 “방언”이라고 말했다. 한번은 중병에 걸린 한 병자가 그에게 “안수 기도”를 받으러 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병자를 낫게 할 수 없다는 의심이 마음속에 들어서 즉시 방언으로 기도했고, 또한 그때 방언이 나오자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는구나.’ 하면서 안심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성령을 모독하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성령이 떠나 버릴 수 있다고까지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사역과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방언”은 절대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그의 “방언”은 그가 “구원받지 못한” 마귀 들린 종이었음을 보여 주는 “표적”이었을 뿐이다. 일례로 어느 주일 예배 설교에서 그는 느닷없이 “하나님께서 지금 방언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네요.”라고 하면서 이렇게 짐승처럼 소리 냈다. “디피야 라사카파카야 라시야바라 야라바캄마키 리키키코 라카치 라시카파따르 이리키리야 아파타카야야 시키키코바야”(50개 글자). 그러면서 즉석에서 이것을 “통역”해 주었는데,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너는 내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느냐? (중략)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며 담대하고 강하라!”(266개 글자)라고 통역한 것이다. 50개 글자를 무려 5배 이상인 266개 글자로 부풀려 버렸다! 이 얼마나 대단한 통역인가? 이런 식의 통역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악령에 사로잡힌 은사주의 방식의 통역일 뿐이다. “언어”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제멋대로 말하고 대충 통역함으로써 수많은 교인들을 속였고, 그의 교인들 역시 너무나 쉽게 잘 속아 넘어갔다.
실제로 그가 방언을 받았을 때의 상황을 보면 그의 안에 들어간 것은 “악령”이었음이 더욱 분명해지는데, 그는 “삼각산”에 올라가 금식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옵소서.”라고 떼를 쓰다가 방언을 받았다고 했다. “마침내 지쳐서 내가 진공 상태처럼 아주 ‘빈 마음’이 되었을 때, 성령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느꼈고 기도의 영을 받았으며 ‘방언으로 자유로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을 받았을 때 그의 마음은 비어 있었다! 마치 “더러운 영”이 두루 다니다가 쉴 곳을 찾지 못하자 마음이 “비어 있던” 그 사람 안으로 더 악한 다른 일곱 영을 데리고 들어간 것처럼(마 12:43-45) 말이다. 연세중앙교회의 윤석전 목사 역시 하나님께 떼를 쓰며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았는데, 그는 방언을 받은 간증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막 그러고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 나는 버린 새낍니까? 제게 방언 은사를 주시옵소서.’ 하고 막 따발총을... 소리 질러 가면서... 사정없이 불러 댔지... 아, 그랬더니 아랫배가 살살 아퍼... 살살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혀... 아, 그랬더니 뒤창자가 끊어지고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어... 아, 그러더니 온 창자가 다 전후좌우로 꿰기 시작혀... 그러더니 그냥 아, 눈이 빠질 것 같혀... 그러더니 그냥 온몸이 전부 다 쥐어뜯도록 하기 시작혀... 혓바닥이 퉤퉤퉤퉤 하기 시작하는데. 진짜 이게 뭔 짓인가 모르겠다 싶어... 나는 방언 은사 받을 때 그렇게 죽을 뻔했어요...” 과연 이런 것들이 “성령의 역사”이겠는가!
『거짓 은사를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누구나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잠 25:14). 조 목사는 지평선을 뒤덮은 수많은 구름처럼 무슨 능력 있는 “신유자”인 양 행세하다가 죽어서 지옥으로 갔다. 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비”를 내려 본 적이 없다! 이는 그가 “사도들의 표적들과 이적들”(고후 12:12)을 나타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능력 있는 종”이었다면 코로나19가 창궐한 오늘날 단 한 명의 확진자라도 고쳐야 하지 않았겠는가? 『고을마다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가는 곳마다 병을 고쳐』(눅 9:6) 준 “사도들”처럼, 말기 암 환자들이나 중증 외상 환자들을 찾아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성령님의 특별한 기름부으심을 받았다고 떠들어 댔던 그는 도대체 무엇을 하다가 간 것인가? 어떤 독을 마셔도 결코 해를 입지 않는다고 했으니(막 16:18), 코로나 정도야 그에게는 우스운 일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바이러스 하나 치유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돈만 밝히는 “전문 사기꾼”이었기 때문이다.
새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는 “조용기 목사는 나의 ‘아이돌’이고 ‘꿈’이었다.”라고 말했다. 은퇴 당시 교회로부터 선교비 600억 원, 퇴직금 200억 원을 받아 챙겼고, 여느 재벌 그룹 총수 못지않게 순복음교회 산하에 있는 국민일보, 한세대학교를 비롯한 각종 기관을 아내와 세 아들이 운영하게 했으며, 교회 돈 131억 원을 배임한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확정받은 자를 “아이돌”로 여기다니, 과연 소 목사는 제정신인가? 『그 악한 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멸망하는 자들 안에 있는 모든 불의의 속임수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살후 2:9,10). 도대체 얼마나 더 속아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