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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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으로 창조론을 파괴하는 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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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3월호>

진화 패러다임의 시조새 ‘사회진화론’
다윈의 진화론을 범우주적인 법칙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영국의 사회학자요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였다. 사실 스펜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 훨씬 전에 진화론을 사회발전 연구에 적용했으며, 다윈이 사용한 ‘적자생존’이란 용어도 스펜서가 최초 창안자였다고 한다.
스펜서는 사회는 다윈의 진화론이 가르치는 것처럼 단순한 형태의 사회에서 복잡한 형태의 사회로 진화한다는 ‘사회진화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적 진화론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원칙이 적용되어 제국주의와 나치즘(게르만족의 우월성에 근거한 유대인 대학살), 자본주의에서 소수 자본가의 독점, 인종차별주의에 관한 이론적 기저가 되었다. 한마디로 ‘강자 이론’이었다. 오늘날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것은 거부되고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 범우주적인 법칙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스펜서의 주장에 있다. 그에게 진화론은 생물학적 범주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모든 면을 통합할 수 있는 이론이었다. 과학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문화, 철학, 예술, 교육, 종교 등 사회 모든 분야에 이론적 체계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진화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진화 개념으로 파악한 사회생물학, 인간의 심리 현상을 진화 개념으로 파악한 진화심리학을 비롯하여 기타 전통적인 학문 개념에 진화론을 접목한 진화경제학, 진화의학, 진화철학, 진화예술학 등 인문사회학 분야로 학문적 발전을 보였다. 히틀러의 나치즘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된 것도 진화론이었다. 거듭나지 못한 인류의 전체 사고체계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다윈의 진화론은, 지식계의 ‘다윈 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21세기 지식 담론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혀 현대의 모든 학문과 이론 분야를 잠식해 버린 것이다.
오늘날엔 ‘진화’라는 용어에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붙여 ‘진화 패러다임’이라는 신조어가 생성되었다. ‘패러다임’이란, 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Kuhn, 1922-1996)이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1962)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론·관습·사고·관념·가치관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인식 체계 또는 개념 집합체’를 말한다. 따라서 ‘진화 패러다임’은 “<종의 기원>(1859) 이후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총체적인 테두리로서의 진화론적인 인식 체계”라 정의할 수 있다. ‘진화 패러다임’은 현 인류의 학문과 사고와 지식을 가두고 있는 새장인 셈이다.

진화 패러다임의 새장에 갇힌 현대 신학
현대인들이 사회 각 분야의 모든 변화를 설명 가능한 ‘최종 이론’으로 추앙하는 진화론이 전체 기독교계에 미친 영향을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다. 진화론은 신학계에까지 ‘진화’한 것이다. ‘다윈의 시대’라 불리는 작금의 소위 ‘기독교계’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공존을 향해서 선회하고 있다. 세상을 속이며 ‘기독교’를 자처하고 나선 로마카톨릭은 올 3월 중 이탈리아 그레고리안 대학과 미국의 노터데임 대학이 여는 ‘종의 기원이 인류에 미친 영향’ 심포지엄의 후원자로 나섰는가 하면, 지난 2월 10일에는 교황청 문화평의회 의장인 지안프랑코 라바시 대주교를 통해 “다윈의 진화론이 교회 신앙과 양립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진화론이 창조론과 “상호보완의 관계”에 있다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영국성공회 역시 작년 9월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영국성공회는 당신을 오해하여 우리의 최초의 대응이 잘못되었다는 점에 대하여, 또 아직도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을 오해하도록 부추긴 점에 대하여 사과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개신교계는 표면적으로는 진화론을 부정하면서도 유신론적 진화론을 수용하거나 진화론에 관용적인 입장을 보이는 신학자들과 목사들, 교인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2005년 모 통계조사에 의하면, 전체 국민 중 90%가 기독교도라는 미국에서 창조론을 믿는 사람은 42% 정도에 불과하며, 한국은 전체 개신교도 중 70.2%가 창조론을 믿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것은 그 나머지는 진화론을 직·간접적으로 인정한다는 방증인 것이다.
진화론에 관한 현 신학계의 동향은 어떠할까? 최근 <크리스천투데이> 온라인판에서 ‘진화의 기독교’를 다룬 적이 있었다. 신문은 “기독교에 진화 패러다임을 적용함에 있어서, 이것이 진화론의 적용과는 구별돼야 한다.”고 했다. 진화 패러다임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문은 “어찌 보면 기독교의 역사는 진화의 연속”이라면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에 가해진 핍박을 계기로 기독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진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야말로 ‘변이’였던 것이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적은 무리였음에도 시대와 사회의 환경에 깊이 뿌리내려 그 신앙을 이었다.”고 했다. 또 신문은 “지금도 진화 패러다임은 유효하여 시시각각 변모하는 사회 환경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 끊임없이 그 적응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진화론은 더 이상 생물학적 주제가 아니며, 진화와 창조 패러다임의 상호보완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탄생하는 것이 ‘변이’이며,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과정에서 신앙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을 진화론적 ‘적응’이라 보는 것이 성경적인 사고일까? 창조론과 진화론의 상호보완을 역설하는 마지막 때의 친카톨릭적 신문의 입장에서는 진화론과의 그런 융합적인 사고를 성경적인 사고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생물학적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진화론의 ‘철학적 변이’를 가져와 성경에 적용시키는 것은 반성경적인 돌연변이 사고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고린도후서 5:17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했을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무지를 보인 것이다. 그것은 진화론적인 변이가 아니라 영적인 새로운 ‘창조’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신문은 이후 본격적으로 진화 패러다임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했다.
오성현 교수(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는 “이미 진화론이 사회적 가치관과 결합하고 있다”며 “진화론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창조론 대 진화론이 아닌, 윤리적, 종교적, 사회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자연의 질서 또한 흐트러졌음을 말한다”며 “구원을 통해 우리는 만물과 함께 새롭게 되는 ‘새창조’를 맞게 될 것이다. 이 새창조는 옛창조의 변화와 변형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진화 패러다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오교수는 진화론에 대한 신학적 논의의 기준을 ‘사회적 가치관’에 두었다. 그리고 사회적 가치관과 결합한 진화론을 토대로 성경을 이야기한다. 오교수는 성경적 가치관 안에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요 16:7-11)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자세를 취했다.
오교수가 ‘옛창조’에서 ‘새창조’로의 변화와 변형을 이야기했을 때,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만물이 회복될 때』(행 3:21)를 말하는 것인지, 그로부터 천 년이 지난 후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사 65:17)하시는 때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한국 신학계의 무천년주의적 현실로 볼 때, ‘옛창조’에서 ‘새창조’로의 변화와 변형은 이 두 진리의 지식과는 무관해 보인다. 단 흐트러진 자연 질서의 회복을 언급하는 것을 보아 뭔가 비슷한 것을 말하려 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순수한 가정이지만, 만일 오교수가 이 지식들을 안다면 어떻게 말하였을까? ‘교회가 휴거된 후 7년 대환란이 끝나고 주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시어 만물을 회복시키는 천년왕국이 도래하면 자연계가 인류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는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는데(사 11:6-9), 여기서 진화 패러다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오교수는 “모든 이행과 변화는 생명이나 존재가 가진 힘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가능하다. 그 주권에 의해 우리는 다윈이 상상도 못했던 변화를 맛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오교수가 말한 ‘다윈이 상상도 못했던 변화’란 생물학적 진화에 머물렀던 다윈이 상상도 못했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흐트러진 자연 질서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한 자연 만물의 회복은 타락 이전의 원래 상태로의 회복이기에 개체변이와 같은 진화가 아니라 ‘원상회복’이다. 여기에는 진화 패러다임이 끼어들 부분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오교수는 세상의 영(고전 2:12)이 관장하는 진화론적 철학으로 성경을 판단하고, 성경에 예언된 피조세계의 ‘변화’와 ‘변형’을 진화론적 ‘변이’로 착각했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관점에서 진리를 가르치려다 오류에 빠진 것이다(고전 2:14). 바로 이런 그릇된 영적 상태에서 ‘진화 패러다임과 창조 패러다임의 상호보완’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성경은 이런 철학적 해석을 가리켜서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딤전 6:20)이라고 말씀하며, 『그것들이 더욱 불경건함으로 나아갈 뿐』(딤후 2:16)이므로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한다. 성경 속의 변화와 변형을 성경을 대적하는 진화론의 패러다임에 가둬 두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일이다. 진화 패러다임과 창조 패러다임의 상호보완을 역설하는 신학자들은 진리의 성경을 세상 인식체계와 적절히 타협시켜 가르치는 가증한 죄를 범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진리와 비진리, 교회와 세상을 구분할 줄 모르는 세속화된 기독교를 보여 준다.
신문은 오교수 외에 한 명의 신학자를 더 소개했다. 백석대학교 기독교철학과의 최한빈 교수이다. 최교수는 “생명체가 진화됐다는 이유로 창조설을 부인하거나 진화의 목적을 말하는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분명히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최교수는 생명체의 진화를 인정하고 있다. 진화는 인정하되 창조설을 부인하면 안 된다는 것인즉, 그가 창조된 피조세계의 진화를 인정한다는 사실은 그의 이어진 주장에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진화론의 사회적 영향 및 그 확산에 대해 개신교는 반대하고 저지할 것이 없다. 진화 패러다임, 즉 어떤 생명체든 고정돼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은 기독교세계관에 비춰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창조된 생명체의 진화를 말씀하고 있지 않다. B.C. 3900년경 아벨이 치던 양(창 4:2)은 거의 6,000년이 지난 지금도 양이다. B.C. 2400년경 노아의 방주에 탔던 까마귀(창 8:7)와 비둘기(창 8:8) 모두 근 4,400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개체를 유지하고 있다. 그 짐승들은 왜 진화하지 않은 것인가? 진화론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의 자연계는 창조된 후 진화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해 왔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의 진화를 말씀하신 적이 없다. “물고기”가 진화하여 발을 가지고 육지 동물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파충류가 진화하여 “새”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식하여 바다의 물들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창 1:22)고 하셨다. 아벨이 치던 양은 미래에 임할 천년왕국 때에도 양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사 11:6). 그 왕국에는 양은 물론, 이리, 표범, 염소, 사자, 소, 곰, 뱀 등이 현재와 동일한 개체를 유지하며 타락 이전인 창세기 1장의 상태로 회복되어 있을 것이다. 진화란 없다. 최교수는 성경을 믿는 신학자인가, 진화론을 믿는 신학자인가? 성경을 믿는 척하면서 진화론을 꺼내드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믿지 않는 무신론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배교한 기독교계에서 진화 패러다임과 창조 패러다임의 상호보완이 역설되는 것을 목도한다. 진화론의 철학적 사고를 이용한 참으로 절묘한 타협이다. 다윈 탄생 200주년에 기막힌 생일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찰스 다윈은 창조론과 진화론을 평행선에 비유했다. 그는 창조론을 확신하지 못한 만큼이나 진화론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위 성경을 가르친다는 신학자들은 다윈보다 한술 더 떠서 진화론을 ‘진화’시켜 성경을 ‘진화 패러다임’에 끼워 맞추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이는 반성경적인 유치한 말장난의 치명적인 결과이며, 도무지 성경과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는 기독교이다. 신학자라고 해서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2).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것이다(딤전 2:4).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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