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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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조용기 목사의 인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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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년 00월호>

인간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조용기 목사의 인간론
인간 문제의 근원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서 지난 6천 년을 허비했다. 각종 종교, 철학, 과학 등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지는 못한 채 옛날의 그 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이 점은 신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근간에 ‘인간 이해’에 관한 심포지엄이 개최된 바 있어 신학계의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2007 영산국제신학 심포지엄’이었다. 임기가 채 일 년도 남지 않은 영산 조용기 목사의 ‘영산신학’에 대한 관심은 한세대학교 영산신학연구소와 순복음 관련자들이 개최하는 각종 세미나들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와중에 교인 75만 명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 은사주의 교회 당회장 목사의 ‘인간 이해,’ 즉 그의 ‘인간론’이 신학계에 한 차례의 풍조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엡 4:14).
조목사에 대한 관심은 한마디로 세계적이다. 이번 심포지엄에 콘트라 슈톡 박사(독일 Bonn대학교), 로버트 P. 멘지즈 박사(전 필리핀 APTS)와 같은 해외 신학자들, 소위 인간론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권위자들’까지 주강사로 동원된 것은 조목사가 대한민국 텃밭에 한정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세계적’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세계가 사탄에게 넘어가 있기 때문이다(마 4:8,9, 고후 4:4). 세계 기독교계의 99%가 조목사를 흠모한다 해도, 다수는 결코 진리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목사의 ‘신학(?)’이 배교한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거기에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아는 바와 같이 현 믿음 없는 배교한 기독교계에서 큰 관심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영적 분별력이 없는 이들은 분간해 낼 수 없는 비성경적인 ‘매력점’이 그에게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며 천명하는 것이다.
조목사가 보았던 인간의 실상 - 고통과 절망, 그리고 죽음
<순복음신문>에 따르면, 이번 심포지엄의 준비위원장인 김판호 소장은 “영산 조용기 목사는 항상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며 “이것이 그의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 접근이므로 영산의 인간론은 그의 목회와 신학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며 심포지엄 주제를 “인간론”으로 선정한 배경을 밝혔다. 솔직히 김소장은 조목사의 인간론에 관해서 핵심 포인트를 매우 적절하게 잘 잡은 케이스였다. 소위 ‘영산신학연구소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리는 발언을 한 것이다. 조목사가 보았던 인간,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한 인간은 김소장의 말대로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고통과 절망에 휩싸인 인간의 실상이 그에게 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고, 복음의 해석과 적용에 “새로운 발상”을 제공했던 것이다.
조목사는 1958년 서울 불광동 대조마을이라는 매우 가난한 동네에 천막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러 다니던 때에 대한 회상을 그의 <4차원의 영성>(교회성장연구소)이라는 책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는 매일같이 술독에 빠져 있는 남편을 짐으로 지고, 또 아들 아홉을 키우며 심장병과 위장병의 고통 속에 “꼬챙이”처럼 말라 버린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가누며 “지금 살고 있는 여기가 지옥인데 천국이 도대체 어디 있냐”고 조목사에게 매우 화를 내었다고 한다. 그녀와의 만남은 당시 전도욕에 차 있던 조목사에게 몹시도 큰 충격이었다. 조목사는 “나에겐 지금 이 생활이 지옥 그 자체입니다. 당신도 한번 보세요. 우리 집이 사는 형편을요. 나는 지금 잘살고 싶지 죽어서 살고 말고는 관심 없어요. 필요없으니 가 봐요!”라며 핏기 없는 입술이 쌀쌀맞게 내쏟는 말들에 “전도하러 갔다가 오히려 그 부인의 말에 전도를 당하고” 만다(p.149-151). 조목사에게 있어 “인간의 실상”은 바로 그렇게 다가왔다. 그에게는 “한 여인이 겪는 생활고”가 인간의 실상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생활고 해결이 복음의 주목적 중 하나인 것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죽은 뒤에 천국이 아니라 지금 천국이 필요하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행복하기 원하시지 않던가?”(p.151) 그후 조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히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 구원의 놀라운 역사로 우리는 그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는 소위 ‘순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6·25의 참화로 극심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민중에게는 고통스런 현실과 동떨어진 내세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것을 나름대로 ‘깨달은’ 조목사는 결국 현실에서 천국을 맛보게 해줘야 복음이 복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후의 극심한 빈곤이라는 매우 한정된 상황에 복음을 끼워 맞추려 했던 것이 결정적인 오류였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조목사는 ‘전인구원론’을 제시한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영혼의 구원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영과 육과 현실을 구원하는 전인구원의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pp.151-152). 조목사는 이것을 순복음(Full Gospel)이라 명명했다. ‘기존의’ 복음은 현실 삶에 대한 구원이 없는 ‘이 빠진’ 복음이었던 반면, 자신의 전인구원 메시지는 빠진 것 없이 ‘완전한’ 복음이라는 것이다. 조목사 자신이야말로 복음을 가장 정확하게 깨달은 장본인이라는 뜻인데, 이 ‘순복음’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순복음’의 잘못 끼워진 단추, 엉켜 버린 실타래는 바로 이 인간론에서부터 차근차근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목사의 인간 이해의 출발점, 즉 인간 존재에 대한 그의 본질적 접근은 “고통과 절망 속에 죽어가는 인간”에 있었다. 바로 이것이 없었다면 오늘의 순복음도, 신유와 축복을 바라는 75만 명의 은사주의 교인들도 존재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조목사는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섣불리 사역에 나섰다가 “인생의 고통과 절망”에 휩싸인 인간의 말에 충격을 받고서 현실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복음이 될 수 없다는 그릇된 생각을 붙잡았던 것이다. 인간 실상에 대한 조목사의 개념이 특정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것은 인간의 “순”실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성경”이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판단을 담고 있다(롬 8:27).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은 의롭고 순전한 판단이다(시 51:4).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정확한 “인간론”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한 인간의 모든 생각은 󰡔헛된 생각들󰡕이며(시 119:113), 『영의 고통』을 낳을 뿐이다(전 1:17).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에 의해서 판단받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하찮은 일이라... 그러나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시니라』(고전 4:3,4). 따라서 우리가 인간 존재에 대해 던질 수 있는 최상의 질문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롬 4:3), 『그러나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느냐?』(갈 4:30)인 것이다.
성경의 인간 이해의 출발점은 인간이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롬 3:10).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롬 3:23). 『그들은 모든 불의, 음행, 사악, 탐욕, 악의로 가득 찼으며,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며, 수군거리는 자들이요, 비방하는 자들이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요, 모욕을 주며, 교만하며, 자기 자랑만 하며, 악한 일들을 꾀하는 자들이요, 부모를 거역하며, 몰지각하며, 약속을 저버리며, 무정하며, 화해하지 아니하며, 무자비한 자들이라. 그들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이 마땅히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이 같은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좋게 여기느니라』(롬 1:29-32). 이런 인간에게는 “사망”이 선고되어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롬 5:12). 인간의 이러한 본질이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며(히 9:27), 그 뒤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시 9:17, 막 9:44).
주님은 인간을 인생의 “고통과 좌절과 죽음”으로 다루지 않고, “죄인”과 “죄인의 운명”(사망과 심판) 차원에서 다룬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려 할 때에 그의 죄인 된 상태와 그의 운명(사망과 심판)을 인지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구약의 성막을 통해서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다.
성막을 통해 본 ‘인간의 실상’
우선 죄인은 성막의 하나님께로 다가가면서 뜰 문의 “다섯” 기둥을 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숫자 ‘5’는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죄인은 하나님께 다가가면서 자신이 죄로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각인하게 된다. 뜰의 문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것은 저 안쪽 첫째 성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다섯” 기둥이다. 또다시 그는 자신이 “죽음”에 처해져야 할 존재라는 것을 각인한다. 그리고 시야가 좁혀지면서 보이는 것은 ‘불타는 번제단’이다. 이것은 죄인이 받아야 할 “지옥의 심판”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번제단 불 속에서 불타는 것을 보아야 한다. 죄인은 그의 죄를 대신해 심판을 받는 ‘대속자’를 보는 것이다.
주님께서 성막의 진리를 통해 보여 주시는 것은 주님이 인간을 다루실 때 그를 죽음과 심판에 처해져야 할 “타락한 죄인”으로 다루신다는 것이다. 번제단에서 죄인을 대신해 불타는 어린 양은 죄인들을 대신해 심판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그들을 대신해 심판받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타락한 죄인!”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법이며, 십자가의 복음은 바로 이 “타락한 죄인”을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복음은 결코 “삼중축복”을 약속한 적이 없다! 조목사가 삼중축복의 근거 구절로 제시하는 요한삼서 2절은 ‘복음’이 아니다. 주님은 이 구절을 복음으로 제시하신 적도 없고, 신약교회사의 신실한 성도 중 그 누구도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관시킨 적이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서신서(편지)의 ‘인사말’이다. 편지의 인사말을 복음의 교리로 삼는 이 일은 성경의 아무 구절이나 가져다 자기 입맛에 맞춰 해석해 버리는 배교한 기독교식 성경해석법인 것이다.
죄 문제를 해결한 바울의 ‘행복’
조목사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행복하기 원하시지 않던가?”라고 했다. 그는 ‘행복으로의 초대’라는 신문도 펴낸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도의 행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병을 고침 받고 물질적인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만족”이다. 『너희의 생활방식에 탐욕이 없도록 하고 현재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음이라』(히 13:5).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었다(빌 4:11- 13). 비천해져도, 풍부해져도, 배가 불러도, 배가 고파도, 그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곧 “행복”이요, 복음의 능력이 낳는 결과이다.
요점은, 이토록 “행복”해 하는 바울을 처음 다루실 때 주님은 바울의 “고통과 절망과 죽음”을 통해 접근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주님을 박해하는 바울의 “죄”를 직접 다루시며 접근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가시채를 걷어차는 것이 네게 고통이라』(행 9:4,5). 그리스도의 복음은 주님이 이 타락한 바울의 “죄”를 다루신 후 죄 문제가 해결된 그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이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따른 것이며, 이 복음은 내게 맡겨진 것이라』(딤전 1:11). 그래서 그는 이것을 『나의 복음』이라고 말한다(롬 16:25). 이 복음은 ‘삼중축복’의 순복음과는 완전히 다른 “그리스도의 복음”이다(롬 1:16). 이 복음을 정확히 알고 믿은 바울에게 남겨진 것은 『고난의 교제』였다(빌 3:10). 바울은 이것을 기뻐하고 또 기뻐했다(빌 2:17). 그에게는 고난마저도 ‘행복’이었던 것이다.
결론
조용기 목사는 인간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는 6·25가 끝나고 비탄에 빠져 있던 민중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크나큰 오류를 범한 것이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이들만이 인간이라면, 그는 인간을 무척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려 했다면 타락한 “온 인류”를 다루는 성경으로 달려갔어야 했다. 고통과 절망에 빠져 있는 인간이든, 잘 먹고 잘사는 인간이든, 만사형통하는 인간이든,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그들이 “죄인”임을 지적하고 죽음과 지옥의 심판을 제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성경에서 인간을 다루는 방법인 것이다. “사람이 존귀할지라도 오래 살지 못하니 그가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고”(시 49:12), 또 “사람이 존귀에 처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다”(시 49:20)는 사실을 알려서 그들에게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된 복음인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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