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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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를 왜곡시킨 어리석은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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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6월호>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비르겐 몰트만 박사가(독일 튀빙겐대 명예교수) 국내 민중신학자들과 함께 자신의 신학 사상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의 신학 사상은 희망의 신학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희망이란 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희망을 의미한다. 다분히 정치적이고, 세상적이며, 후천년주의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그의 신학은 성경적 진리에 근거를 두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어떤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주지 못하는, 오히려 복된 소망이신(딛 2:1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거부하는 인본주의 철학에 불과하다. 사실 그의 신학에는 헤겔, 칸트 등의 철학사상이 상당부분 녹아 있어, 성경에서도 경고했던 바(골 2:8),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당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런 그가 한국에 와서 한 일은 무엇인가? 지난 5월 12일, 몰트만 박사는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그의 이름은 정의입니다: 악의 희생자와 가해자를 위한 하나님의 정의“란 제목으로 강연회를 했는데,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강연회였다. 즉 하나님의 정의(正義)에 관하여 성경적 진리를 철저히 왜곡시킨 강연회였던 것이다.

우선 그는 하나님의 정의를 가리켜 해방하는 정의라고 역설했다. 그가 말하는 해방은 이런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제1세계) 라틴아메리카에서(제3세계)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신학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도 억압하는 자의 해방신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방이 억압받는 쪽이나 억압하는 쪽 모두의 인간 됨을 위한 해방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류가 억압과 학대와 착취라는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단 말인가?” 
즉 이제는 과거와 달리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뿐만 아니라, 억압하는 자들의 해방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피해자들을 억압했던 가해자들을 죄의 권세와 죄책의 짐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 박사는 억압했던 자들을 해방시켜야 할 죄와 죄의 권세의 범위를 너무 편협하게 잡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억압했던 사람들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가했던 그 죄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학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들의 해방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가 말하는 해방신학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는 것과는 무관하다(롬 6:18). 그것은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죄인들을 해방시키는 것과도 무관하다(롬 8:2). 더군다나 피조물 자체도 그 썩어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는 해방과도 아무 관련이 없다(롬 8:21).
그가 말하는 해방은 다분히 인본주의적이다. 그도 말했듯이, 모두의 인간 됨을 위한 해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해방하시고자 하실 때, 그것은 단순히 인간 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성경은 장차 이 결과로 이루어질 진정한 해방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되면 그때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음부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능력은 율법이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4-57). 몰트만 박사의 철학으로는 결코 진정한 해방을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몰트만 박사는 또 하나님의 정의를 권리를 찾아 주는 정의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권리는 인권을 가리킨다. 인권회복은 민중의 고난의 역사와 함께하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민중신학의 핵심사상이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 자신이 민중이었고, 또한 그 구원의 길을 실천한 메시야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의 길이 아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런 길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에서 나온 저주받은 길일 뿐이다.
억압받는 민중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라는 논리가 바로 몰트만 박사의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이 흩어져 있는 그분의 백성들을 보고 연민을 느끼신 적은 있어도, 그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설교하시거나 사역을 하신 적은 없으시다. 단순히 예수님을 민중들과 고난을 함께한 그들의 영웅으로 묘사하는 것만큼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도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의를 이루셨지만, 한 번도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기 위해 의를 이루신 적은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오히려 율법을 온전히 이루심으로써(마 5:17) 의를 이루셨고, 또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시고자 율법의 끝이 되셨던 것이다(롬 10:4).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정의를 구원하고 치유하는 정의라고 설명했다. 즉 하나님의 정의는 구원하는 정의이며, 악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정의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 치유에 있어서 가해자도 함께 고려한다.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도 악의 희생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에 구원받고 치유받아야 할 그 대상으로 함께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구원은 은혜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인들을 지옥에서 건져내는 구원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복음을 통해 사회를 치유하고 사회를 구원하는 개념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정의 또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개념의 정의에 불과하다. 그러한 정의는 장차 이 땅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굳게 세우실 하나님의 정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정부와 화평의 증가함이 다윗의 보좌와 그의 왕국 위에 바르게 세워지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는 데 끝이 없으리라. 만군의 주의 열성이 이것을 실행하시리라』(사 9:7).
또한 그가 말하는 치유는 말라키 선지자의 예언을 염두하고 한 말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그의 날개에 치유를 가지고 솟아오르리니』(말 4:2). 이 구절을 근거로 그는 하나님을 정의의 태양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태양에 대해 너무 집착한 나머지, 정의의 개념이 바빌론 태양신의 개념에서 온 것이라고 잘못 주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는 철학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비롯된 주장일 뿐이다. 정의는 하나님의 속성이지, 바빌론 이교도 종교에서 비롯된 개념이 아니다. 『주의 보좌의 처소는 정의와 공의며, 자비와 진리가 주의 얼굴 앞에 가리이다』(시 89:14). 『정의의 처소이신 주, 그들 조상의 소망이신 주』(렘 50:7). 공의의 하나님은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시다.
또 몰트만 박사는 하나님의 정의의 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 정의의 목표는 영혼 구원, 혹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정의가 거하는 새로운 땅이다.” 즉 억압당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억압하는 자들도 함께 치유함으로써 모든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고,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며, 결국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겠다는 논리다. 이것은 그의 희망의 신학이 추구하는 핵심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 하나님의 정의를 통해 인간의 힘으로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것, 사회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 다시 말해 왕 없이 인간들의 힘으로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본주의적인 후천년주의적 철학은 조용기 목사의 말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조목사가 2005년 새해를 맞아 자신의 교회는 “2005년을 적극적인 사회 구원의 해로 정했다”라고 이야기한 것에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제껏 십자가 신학을 편협하게 해석했지만,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포용하는 순복음이 되려고 한다.”고 고백한 조목사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포용할 수도 없고 포용해서도 안 되는 세상에 매우 관대한 자세를 표한 조목사의 생각은, 세상을 위해서는 기도도 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요 17:9). 누가 세상을 포용하라고 했던가?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이자 그 목표란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정의를 이 땅에 세우시되 사회를 구원한다든지 세상을 포용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세우시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과 사탄의 왕국들을 그분의 심판으로 멸하신 이후, 회복된 땅에서 그분의 정의와 공의를 굳게 세우실 것이다.

사실 몰트만 박사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하여 성경으로부터 올바른 진리를 배우지 못했다. 그는 “인본주의적인 철학이 제시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이 땅이 존속하는 한 희망의 신학”은 존속해야 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빛이 우리에게 희망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성경적 진리를 왜곡하는 한 희망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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