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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총회의 최대 이슈, 여성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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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10월호>

9월 총회의 최대 이슈, 여성안수



9,10월이면 각 교단별로 총회가 열린다. 이번 총회들의 최대 이슈는 ‘교단통합’과 ‘여성안수’가 될 거라는 게 각 기독언론사들의 전망이다. 갈라지고 찢겨진 교단을 다시 깁기 위한 작업은 ‘바늘’에 찔리는 고통 속에서도 연합의 쾨쾨한 골방에서 진행되고, 여성안수 문제 또한 ‘女론’에 이끌리며, 타교단의 입장을 관망하는 지루한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교단통합은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전 세계적 추세이다. 배교한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 즉 멸망의 문을 여는 그 열쇠들을 로마카톨릭의 열쇠고리에 꿰기 위한 이 통합 작업은, 한국 교회가 반드시 거쳐가야 할 일인 것이다. 교리의 갈라진 틈은 다원화를 내세워 땜질하면 되고, 그래도 비난이 고개를 쳐들 때는 『사랑으로 그들과 결합』(왕상 11:2)하면 된다. ‘다원화와 사랑’은 통합을 위한 명분이요, 만병통치약인 것이다. 교단통합의 이삭은 이미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베어 불에 던질 추수꾼의 낫 가는 소리가 예전보다 훨씬 더 가깝게 들리고 있는 것이다(마 13:30).
여성안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주홍빛 짐승 위에 앉은 창녀’가 세상 권세를 꿰차고 앉아 더러운 잔을 들이키듯이(계 17:1-7), 그녀와 함께 취한 기독교 내에서도 ‘여자’가 ‘평신도’ 위에 군림하여 권위를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니콜라파의 행위”가 주님의 미움을 사면서도 뻔뻔스럽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연합신문>은 8월 28일자 제2면에 “교단통합 긍정적... 여성안수 높은 벽”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합동정통에 소속된 젊은 목회자들이 이종승 목사를 운영위원장으로 한 ‘방배포럼’을 8월 22일 방배동 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에서 창립 2주년 기념으로 개최했다. 주제는 ‘교단통합-여성안수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이번 포럼에서 교단통합 문제는 서로간의 입장차를 재점검하는 데 그쳤으나, 여성안수 문제에 있어서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였다. 여성안수를 허용할 수 없는 이들의 의견과 그에 대한 신학적 반론이 긴장감 속에 오갔던 것이다.
승동교회의 장응주 목사는 “단순히 여자이기에 목사가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한 편견이다. 하지만 성경에 근거하면 제사장과 열두 사도 중에 여성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여성안수를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천안대 김경진 교수는 “성경에는 유니아라는 여사도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후속시대에 여선지자가 등장한 것이다.”라며 성경을 다양하게 해석해 줄 것을 주장했다. 반대 패널인 영은대교회의 서태원 목사는 90차 총회 총대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여성안수의 반대는 하나님의 절대명령”이라며 레위기와 고린도전서를 근거로 반대논리를 펼쳤지만, 김교수는 “레위기 명령은 오늘날 모두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성경을 적용하는 것은 불공정한 방법이다.”고 반박했다. 또한 이날 주제 발제를 위해 참여한 신중수 강도사와 윤충임 강도사(모두 여교역자들이다.)는 “목회현장에서 안수가 없어 완성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시대의 변화에 맞는 처신을 총회에 부탁했다.

장응주 목사의 주장처럼, 여성안수를 무턱대고 반대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인간적인 편견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을 고지식하게 관철하려 하는 그릇된 대화방식이며, 아무 근거 없는 주장은 누가 보더라도 호소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장목사는 제사장과 열두 사도의 예를 들어 여성안수를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경영원칙의 관점에서 주장한 것으로 올바른 주장이다. 그러나 김경진 교수가 ‘유니아’라는 여‘사도’를 예로 들어(롬 16:7) 예수님 후속시대의 여선지자를 운운하며 여자 목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선지자와 목사도 구분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 준 예이다.
필자는 여선지자에 대해 성경이 그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안나(눅 2:36), 드보라(판 4:4), 훌다(왕하 22:14), 미리암(출 15:20), 노아댜(느 6:14)를 “여선지자”라고 분명히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들 여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예언하고 백성을 재판했기 때문에, 사역 면에서 남선지자들과 차이가 없었다.
신약에서는 고린도전서에서 선지자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며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여러 가지 방언들이라』(12:28). 여기서 교회는 앞의 27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몸 안에 “선지자”가 있는데, 이 선지자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과는 관계가 없지만, 이로써 고린도교회 시대의 교회 회중들 안에도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고전 14:26은 『너희 각자에게 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방언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말씀이 완성된 이 시대의 ‘선지자’는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하고 계시를 전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고린도전서가 아닌 다른 성경에서 교회 내에 직분을 하나 더 세우셨다. 이 직분을 우리는 흔히 ‘목사’라고 칭하지만, 성경은 이를 “장로” 또는 “감독”이라고 말씀한다(여기서 ‘장로’란 우리가 말하는 교회의 나이 많은 장로가 아니다). 그러나 여교역자들이 안수 받아서 되고 싶어하는 그 ‘목사직’은 사도나 선지자와는 달리 여자가 결코 될 수 없는 새로운 직분이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딤전 3:2), 『장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딛 1:5,6). 사도 바울은 한 아내의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딤후 1:11)는 될 수 있을지언정 장로(목사)는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장로인 나는』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요삼 1). 성경은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도이며 대제사장』(히 3:1)이시요 『선지자』(신 18:15, 마 21:11, 눅 7:16)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부를 가지고 계신 주님은 또한 『목자와 감독』이라고 불리신다(벧전 2:25).
그러나 한 아내의 ‘남편’이 될 수 없는 여자들은 결코 목사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굳이 목사가 되어서 ‘한 아내의 남편’이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을 레즈비언들과 동급으로 놓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레즈비언들은 자기들끼리 역할을 나눠서 부부노릇을 하기 때문에, 성경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이들은 동성연애자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여자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여자들도... 선한 것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그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도록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딛 2:3-5). 그러나 이처럼 나이 많은 여자가 젊은 여자를 가르치는 것은 괜찮아도, 여자가 목사가 되어 남자 위에 권위를 가지고서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려고 하는 것은 죄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너희의 여자들을 교회 안에서 조용히 하게 하라. 그들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였으니 율법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다만 복종할지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무엇을 배우고 싶어하면 집에서 자기 남편들에게 물을지니라.』고 말씀하고 있고(고전 14:34,35), 또 디모데전서 2:11,12에서 『여자는 온전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게 하라.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히 할지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직분이기에 여자가 목사가 되면, 당연히 남자 성도들에게 권위를 행사하여 무언가를 필연적으로 가르치게 된다. 이것은 주님께서 분명히 금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만일 여자가 안수를 받아서 목사의 직분을 가지게 된다면, 그녀는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위’를 가지고서 교회를 주관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교단 총회들은 지금까지 여성안수 문제를 놓고 씨름을 해 왔다. 이번에도 동일한 안건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것이다. 죄를 지을까 말까 머리를 싸매고 고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위와 같은 성경의 진리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여성안수 문제를 논한다면, 그들의 총회가 죄의 자리임을 말해줄 뿐이다. 결국에는 여성안수를 통과시키고 싶으니까 계속해서 똑같은 안건으로 투표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총회라면 그리스도인은 결코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국 교회의 각 교단 총회들은 이번 기회에 여성안수를 ‘이단 교리’로 규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것을 요구하는 자들을 출회시키는 쪽으로 총회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그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딤후 3:7) 어쨌든 이번에는 총회 안건의 해답을 성경에서 찾고, 성경대로 해결하는 총회가 열리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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