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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프올의 범죄와 새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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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07월호>
(민수기 25-27장)민수기 25장에는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중 받은 마지막 범죄와 징계가 기록된다. 그것은 “바알프올의 범죄”라 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모압의 음행 축제에 참여한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나온 출애굽 1세대가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가 행한 죄라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26장부터는 새 땅에 들어갈 세대를 계수하고 그들이 행할 구체적인 명령들을 주신다. 이제 본격적으로 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1. 바알프올의 범죄(25장)
1) 모압과 미디안의 종교 축제(1-5절)
『이스라엘이 싯팀에 거하였는데, 그 백성이 모압의 딸들과 더불어 음행하기 시작하였더라』(25:1). 이 일은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자기들의 종교 축제에 초대한 것에서 비롯되었다(2절). 그것은 이방의 희생제사였고, 이스라엘은 그 우상 숭배에 참여했다. 이것을 성경은 “음행”이라 부르는데, 이는 우상 숭배 자체가 영적 음행을 말하기도 하거니와, 이스라엘 남자들이 실제적 음행에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고대의 종교 축제는 음행 의식을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카나안의 종교, 즉 바알 종교는 그 자체가 음란했다. 태양신(혹은 폭풍과 비의 신) 바알과 하늘의 여왕 아스타롯의 결합으로 풍요가 온다고 믿었던 카나안인들은 왕이나 귀족이 신전 여사제와 성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종교 축제의 중요 의식으로 삼았었다. 그 결합은 신들의 결합의 상징적 행위였으며, 그래서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신성한” 의식이었다. 전문적인 신전 창녀들(여사제들)이 이 의식을 주관하기도 하지만, 일반 처녀들이 그 축제 기간 중 여사제들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대 카나안의 종교 축제는 음란 축제였던 것이다.
바로 이 축제에 이스라엘 남자들이 초대되었다. 광야에서 율법적 생활을 하며 살아 온, 특히 이집트를 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태어난 청년들은 이러한 모습에 눈이 뒤집혀졌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금 모압 땅에 와 있다. 그곳은 카나안 접경 지역이었다. 카나안 땅은 물리적으로는 풍요로운 곳이었지만, 도덕적으로는 퇴폐한 곳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그 땅 거민들의 종교와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었다(레 18:3). 이스라엘은 카나안 땅 앞에서 그 경고를 기억해야 했다. 모압이나 카나안이나 도덕적 상황은 똑같았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더 경계해야 했다. 마치 적군을 눈 앞에 두고 공격 명령을 기다리는 군사의 심정으로 경계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흐트러졌고, 이러한 “육신의 정욕”(요일 2:16)에 쉬 무너지고 말았다.
3절에서는 이 일을 『이스라엘이 바알프올에게 가담하였으니』라고 언급한다. “바알프올”은 “프올의 바알”이라는 뜻인데, 프올은 발라암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예언을 해 달라고 부탁받은 곳이었다(민 23:28).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이 발라암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23-24장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일이 실패하자 다른 계략을 준비했다. 그는 발락으로부터 많은 재물과 지위를 약속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막으셨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은, ‘하나님으로 그 백성을 저주하시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저주하실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 백성이 범죄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복 주신 자는 아무도 저주할 수 없으나, 그를 저주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그들의 죄인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행한 계략과 동일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아담과 이브는 뱀의 간계에 넘어가 죄를 짓게 되었고, 그 결과 저주를 받게 되었다. 발라암은 그의 아비 마귀의 지혜를 정확히 받았고(요 8:44, 약 3:15), 그 간계는 정확히 적중되었다. 그래서 이 일을 “발라암의 교리”(계 2:14)라 한다.
결과적으로 “주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했다(3절). 31:16에 따르면 이 진노는 “역병”이었다. 이 역병으로 총 24,000명이 죽었다(9절). 그 중 “하루에” 죽은 사람은 23,000명이나 되었다(고전 10:8). 이 진노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임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신음이 들려왔을 것이고, 아무도 어떤 것도 행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수습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일은 오직 주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모든 우두머리들을 잡아다가, 태양을 향하여 주 앞에 그들을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주의 맹렬한 진노가 이스라엘로부터 사라지리라.』(4절)고 명령하셨고, 모세는 “바알프올에게 가담하였던” 남자들을 죽였다(5절). 이 일로 우리는 바알프올에 가담한 사람들이 일반 청년뿐 아니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두머리들이 이방 제사에 참여했다는 것, 이것은 단순한 음행의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총체적 배교로 흐를 뻔한 모습이었다. 하마터면 이스라엘이 진멸될 위기였던 것이다.
2) 피느하스의 의로운 분노(6-18절)
이 징계의 와중에서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시므리라는 한 이스라엘 남자가 코스비라는 미디안 여인 하나를 자기 장막 안으로 데리고 와서 음행했다(6절). 하나님의 징계로 역병이 창궐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울부짖는 바로 그 와중에 그러한 일을 벌인 것이다. 육신의 정욕이 너무나 강렬해서 징계도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너무도 가볍게 여겼다. 온 회중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모독했고, 정면으로 대적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 고관 중 한 명이며, 그 여인도 미디안 주요 족장의 딸이었다(14-15절). 단순한 음행 차원을 넘어 부족 간의 결합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이방과 섞으려는 마귀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이에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피느하스가 창을 들고 그의 장막으로 들어가서, 음행 중에 있는 그들을 그대로 찔러 죽였다(7-8절). 이것은 의로운 분노였다. 대제사장의 아들다웠다. 또한 이스라엘의 희망을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같은 청년으로서 피느하스는 동료 청년들의 범죄에 대해 의분을 갖고 있었다. 비록 죄는 끊임없이 다가와 광야의 새 세대들까지 물들였지만 이 같은 청년이 있기에 이스라엘은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느하스의 이 행위로 인해 재앙을 멈춰 주셨다(8절). 오늘날 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서 가장 부족한 점은, “의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피느하스를 축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행위를 "나를 위한 열심"(11절)이라 하셨다. 주를 위한 열심은 죄를 책망하고 의를 위해 분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화평의 언약"을 주셨다(12절). 그것은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다(13절). 하나님께서는 피느하스가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했다고 하셨다(13절). 속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수행함으로 백성에게 화평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사장들은 희생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그 제물 위에 수행함으로써 죄인에게 화평을 가져오는 사람들이다. 피느하스는 하나님의 징계를 수행함으로써 속죄를 가져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분의 몸에다 수행하심으로써 속죄를 이루셨고, 하나님의 화평을 가져다 주셨다. 피느하스가 받은 것이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는 점에서, 피느하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의 예표가 되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이 일의 근원지인 미디안을 치라 명하셨다(17-18절). “프올의 일”과 “코스비의 일” 때문이라 하셨는데, 프올의 제사장 발라암도 미디안 제사장이요, 코스비도 미디안 여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 명령에 따라 미디안을 쳤고, 발라암도 그때 죽임을 당한다(민 31:8).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범죄를 징계하시지만, 성도들을 범죄케 하여 징계받도록 한 그 사람(들) 역시 심판하신다. 더 심하게 심판하신다.
2. 새 세대가 계수됨(26장)
2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계수하라 하신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들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우러 나갈 수 있는 모든 사람대로 계수하라』(2절). 이 시점에서 이 명령을 내리시는 것은 이제 곧 카나안 땅에 입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출애굽 당시의 계수가 카나안 땅 입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 세대가 실패했으니, 이제 새 세대가 카나안 땅에 들어감에 있어서 계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 명령은 출애굽 당시의 계수 명령과 동일하다.
첫 계수 명령은 민수기 1장에 나온다. 민수기 1장은 시내 산을 떠날 준비를 하는 시점으로서, 카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는 시작이었다. 이집트를 나온 지는 1년 정도의 시점이었다.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20세 이상” “싸우러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을 계수하라 하셨다(민 1:3). 즉 “군대”를 계수한 것이다. (이것이 성인 남자만 계수한 이유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즉 민족적 구속을 받을 때부터 “군대”로 인식되었다(출 12:51). 그들이 진행하는 모든 여정은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는 왜 성도들이 군사로 불려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우리가 구속받은 이후의 삶 역시 영적 전쟁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5절에서 르우벤을 계수하는 것으로 시작해 51절까지 지파별로 계수하는데, 그 총 계수 인원은 601,730명이다. 참고로 출애굽 당시 첫 번째 계수 인원은 603,550명이었다(민 2:32). 출애굽 당시의 인구와 광야 생활 끝의 인구가 비슷하다. 이는 광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반역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전염병 등 직접적 징계로 죽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첫 세대들이 다 죽어 버린 것이다(64-65절).
하나님께서는 멈췄던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신다. 60만 명으로 시작했으면, 다시 시작할 때도 60만 명이다. 레위인들도 마찬가지다(57-62절). 계수된 레위인들은 23,000명인데(62절), 첫 번째 계수 때도 22,000명으로 큰 차이가 없다(민 3:39). 범죄 중 번성한 것은 하나님 앞에 기억되지 않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상태에서 혹은 육신적인 상태에서 좀 번성했다 치자.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번성했다고 그것이 번성한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저주일 수 있다. 그 성도가 하나님과 새롭게 다시 시작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모두 없애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밖에서 이룬 성취들에 가치를 두지 말라. 하나님 안에서 새로 시작한다면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라. 주님과 함께 이룬 성취만을 성취로 인정하고, 주님 안에서 이룬 번영만을 번영으로 인정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3. 유업의 법(27:1-11)
민수기는 율법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광야 생활의 다양한 면들을 다루는 책이다. 그런데 가끔 율법을 다룰 때가 있으니, 그것은 율법의 시행 과정에서 애매한 문제를 확정해 줄 때 구체적인 시행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다. 여기 27장에는 아들이 없는 자에게 유업을 물려 주는 문제가 설명되어 있다.
므낫세 지파 중 슬로프핫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네 명의 딸 외에 아들이 없었다. 그 때문에 슬로프핫의 유업이 끊기고, 그의 이름이 자손들 가운데서 사라지게 되었다(1-4절). 이에 하나님께서는 슬로프핫의 딸들에게 유업을 주라고 하시면서, 유업 상속의 권리 순서를 제정해 주신다(8-11절). 즉 아들이 없으면 딸에게, 딸이 없으면 본인의 형제들에게, 형제도 없으면 아버지의 형제들에게(삼촌), 삼촌도 없으면 가까운 친족에게 유업을 주는 것이다. 룻기에 보면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기 전에,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척에게 권리를 먼저 묻는 장면이 나온다(룻 3:12-13; 4:3-5). 그것은 민수기의 이 유업의 법에 따른 것이다.
이 법은 36장에서 조금 더 구체화된다. 만일 그 딸들이 혼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만일 다른 지파 사람과 혼인하게 되면 그 지파의 유업이 다른 지파에게로 넘어가게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딸들에게 자기 지파 남자와만 결혼하라고 하셨다(민 36:8).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지 유업은 그 지파와 그 가문 안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다. 유업이란 기본적으로 “땅”인데,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땅을 지파별로 나눠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지파들이 받은 유업이 옮겨지는 것을 싫어하신다(신 19:14, 잠 22:28).
4.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27:12-23)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역의 끝을 준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바림 산으로 올라가서 카나안 땅을 보라 하셨다(12절). 이 산에서는 요단 강이 보이고, 그 건너편 카나안 땅이 훤히 보인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확증이다. 모세는 비록 그 땅에 들어가진 못하지만, 이 일의 성취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임명하셨다(18절). 이때 여호수아는 『그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 불려졌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지만, 성령께서는 여호수아 안에 계신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서 성령님은 사람 밖에서 역사하셨고, 신약에서는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구약에서도 성령께서는 사람 안에서 역사하셨다. 다만 신약과 다른 것은, 신약에서 성령께서는 그 사람을 결코 떠나지 않으시는 반면, 구약에서는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임명식은, 먼저 제사장 엘르아살이 “우림의 판결”에 따라 묻고(21절) 온 회중 앞에서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함으로 이루어졌다(23절). 여기서 “우림”이란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기 위해 제사장의 흉배에 붙어 있는 도구이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우림에서 빛이 나와 그 뜻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는 사실을 온 백성 앞에서 선포해 주셨다.
여기서 중요한 경륜적 진리가 있다. 여호수아가 임명된 것은 모세의 율법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전환되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여호수아는 그 이름 자체가 “예수”라는 말이다. 모세는 광야를 위한 지도자였고, 여호수아는 새 땅을 위한 지도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땅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