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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전파와 칼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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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5월호>
칼빈주의자의 핵심 교리인 ‘선택’과 ‘예정’의 교리가 “복음 전파”와 전적으로 대치된다는 사실은 그들의 양심이 느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 아래 모든 일들이 발생하고 그 분의 판결에 의해 이미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해 놓으셨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해야 하는가?복음을 전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주의자 거스트너의 답변은 모든 칼빈주의자들의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다.
“우리를 택하기로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전도의 사명에 참여할 것을 우리에게 주권적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영광의 주님이요 왕 중의 왕이신 우리 구주께서 그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거스트너의 제자였던 스프로울은 같은 말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전파하고 증거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하나님께서 전도를 명령하셨다. 이것은 더 이상의 논란을 끝낼만큼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전도는 우리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특권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인 구속의 일에 우리를 참여하도록 허락하셨다.”
잠깐만 그의 말을 멈추게 하자. 왜냐하면 이 말은 너무나 엄청난 말장난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이 여태까지 절대은혜론을 외칠 때 한 말이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구원의 전과정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참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전도는 택한 자들을 위한 구원의 방법일 뿐”
만일 인간이 어떤 의미에서든 하나님의 구원과정에 개입하게 된다면 절대은혜주의(Monergism)가 무너지기에 인간의 믿음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그가 구원받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 주장해 왔다. 워필드가 했던 말을 기억해 보자.
“..은혜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도록 영혼의 문을 열게 하거나, 이미 받은 은혜를 이용하거나 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면서 구원 과정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는 일은 칼빈주의에 위배된다.”
그들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를 통해 구원받기 전에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침으로 복음이나 믿음이 전혀 무용하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구원받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수 있기에 사실 복음과 상관없이 그들은 거듭나는 것이다. 그는 계속 말한다.
Bible Believers / 27
“우리는 외적인 부르심을 제공할 따름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내적으로 부르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나는 여기에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위한 구원의 목적을 미리 정하셨을 뿐 아니라 그 방편들도 미리 정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전도의 미련함이다.”
목적뿐만 아니라 방편들까지도 정하셨다는 것은 뵈트너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더 엄청난 파장을 가져온다. 그들의 예정론이 모든 방법과 목적까지 포함한 것이라면, 그것은 쉽게 말해서 절대적인 운명론이 된다. 모든 사람들의 온갖 행동들은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며 그 결과도 정해진 대로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결과들을 피하기 위해 뵈트너는 다시 말을 바꾼다.
“미래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감추어진 것들이므로 우리는 마치 예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열심히 행해야 하며 우리의 일에 성실해야 한다.”
예정이 있고 확실하며 그 방법들마저 정해졌다고 하면서 이제는 예정이 없는 것처럼 행하라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답변인가? 이 같은 이유들로는 결코 구령의 열정을 가질 수가 없다.
쿠스탕스는 다른 칼빈주의자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파송되거나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파송되는 이유를 절대로 알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칼빈주의자들의 구호인 이사야의 말씀을 제시하고 난 뒤 그의 입을 다물고 만다. 『주가 말하노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이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이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사 55:8-9).
“복음은 거듭남의 수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거듭남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진리를 거부하는 한 칼빈주의자들은 결코 구령하고 선교해야 하는 이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들은 여러 번에 걸쳐 복음이 거듭남의 수단이 아니며 복음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공개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거듭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거듭났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구원받았기에 그리스도를 믿는다.”
칼빈주의자들은 수많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을 칼빈주의자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루터나 스펄젼, 에드워드, 휫필드 등)은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설교나 사역은 알미니안주의자들처럼 의지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단 한 번도 복음이 거듭남에 무용하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면 할수록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지옥에 던져질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것을 확신하였기에 복음 전파가 그들의 목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귀한 것으로 여겼다.
성경적으로 살펴보았듯이 칼빈주의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분명히 바울이 언급했던 “또다른 복음”(갈 1:6)이다.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된 복음(갈 1:12)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은혜의 기초 위에서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정확히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이다(고전 15:2).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결국 칼빈주의자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지 못하고 책임만 모면하려고 한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는 것이며, 복음을 전파함으로 각 사람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무엇이 좋은 소식인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온 인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죄와 저주가 되셔서 돌아가심으로 그 분이 대신 모든 죄와 그 형벌을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지적하는 죄는 살인이나 간음이나 강도짓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고의로 거부하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 분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요 16:8-9).
칼빈주의자 쿠스탕스는 사람의 입술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 극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쇄되어 전 세계의 인간이 읽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우리 같은 전도자들이 꼭 필요한 존재인가도 의심스럽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전혀 무익하다면 누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하겠는가? 더 나아가 누군가가 이미 지옥으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까지 설득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고 반항하는 자들이 아닌가?
바울은 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단언함으로 칼빈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파송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와 같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과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롬 10:13-1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