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개역개정판을 고발한다 분류

왜 성경에는 "bible"이란 단어가 없는가?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4월호>

<한글킹제임스성경>과 <개역성경>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한 구절씩 비교하겠다. 먼저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쓰고 그 뒤에 <개역한글판/개역개정판>을 쓰겠다.

<사도행전 8:29-35>
29 그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가서 이 마차에 함께 타라." 하시더라.
<개역>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그러므로 빌립이 거기로 달려가니 그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듣고 말하기를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느뇨?" 하니
<개역>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31 그가 말하기를 "나를 지도하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요?" 하며 빌립을 청하여 마차에 올라 자기와 함께 앉게 하더라.
<개역>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그가 읽고 있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즉 "그는 도살할 양처럼 끌려갔고, 또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더라.
<개역>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 중에 부당한 재판을 받았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선포하리요? 이는 그의 생명이 이 땅에서 끊어졌음이로다." 이었더라.
<개역>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1. 사도행전은 글자 그대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한 책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부터 사도 바울이 두 번째로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까지로 A.D. 33-63년까지 무려 30년 동안의 사건들을 기재하였다. 사도행전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다시 말하면 율법과 은혜 시대 중간에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전환기적인 책이다. 마태복음이 구약과 신약의 연결고리이고 히브리서가 교회 시대와 환란 시대의 연결고리인 것과 같다. 신학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신약성경에서 걸려 넘어져 성경 해석을 잘못하게 된 원인은 이 세 가지 전환기적 책들이 걸쳐 있는 양편을 분별하여 해석하지 못하고 아무것이나 가져와 교리로 써먹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복음서는 주님의 지상 사역 전반의 주요 부분들을 네 명의 제자들이 기록한 책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는 구약에 속한다(마 27장까지). 예수님께서는 율법 시대에 사셨던 것이다. 신약 교회가 사복음서에 은혜로 접근하여 교리화하려 하고 특히나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보다 우위라는 불필요한 견해를 덧붙임으로 인해 예수님의 산상설교나 황금율, 심지어 제자들의 기도를 주기도문이라며 신약 교회에서 암송하고 있다. 순복음 은사주의자들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와 다른 여러 이단들은 사도행전을 흉내내려다가 그렇게 곁길로 가게 된 것이다. 초대 교회는 바울이 서신서들을 기록하기 전까지 교리를 몰랐다. 그랬기에 그들의 논쟁점은 모세의 율례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성경이 최종권위가 되지 못하게 되면 혼란스럽게 되어 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안티옥, 시리아, 킬리키아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딱히 전할 말이 없으므로 우상으로 더럽혀진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삼가게 하자는 것만을 지키게 했던 것이다(행 15:20; 21:25).
히브리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시대와 환란 시대에 걸쳐 있기에 이 점을 인지하지 못한 목사들이 환란 시대에 적용될 구절을 가져다가 교회 시대의 교리로 적용하기 때문에 히브리서 6:4-6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도 이 부분을 해석하지 못하여 끝까지 견디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만들어냈다(마 10:22; 24:13은 대환란 상황이다). 대환란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해당된다. 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하며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요(마 27:25),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을 거부하고 있기에 그들은 유사 이래 전무후무의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환란 시대에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도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다시 율법 시대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교회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거듭난 성도들은 이미 휴거되어 지상에서 환란을 겪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목사들 가운데 환란성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들이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히브리서 6:4-6을 가지고 거짓되이 해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사도행전 기간에는 특별한 은사들이 여러 가지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부르신 종들을 통해 여러 가지 특이한 이적들을 행하셨다. 복음 전도자 빌립은 가자 광야를 달리는 에디오피아 여왕의 궁전에서 내시로 있는 사람에게 가라는 주의 천사의 명령을 받고 광야로 가서 그 마차에 다다른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주께 헌물을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가 마차 안에서 두루마리로 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는데 『그가 읽고 있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즉 "그는 도살할 양처럼 끌려갔고, 또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더라. 그가 굴욕 중에 부당한 재판을 받았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선포하리요? 이는 그의 생명이 이 땅에서 끊어졌음이로다."』(행 8:32,33)였다. 이 부분은 이사야 53:7b,8a이다. 『그가 어린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또 털 깎는 자들 앞의 양이 말없듯이, 그가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 그가 감옥과 재판에서 끌려갔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선포하리요? 이는 그가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음이요』 성경 변개자들은 구약에다 맞추기 위하여 신약 구절들을 다시 고쳐 썼던 것이다. 그 이유는 사도들이나 빌립이 사용했던 권위있는 구약성경이 있었다고 생각하도록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32절을 칠십인역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33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그가 감옥과 재판에서 끌려갔으니』(사 53:8)로 되어 있다. 칠십인역과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것이다. 신약에서 인용된 구약은 200구절이 넘는다. 그렇다고 해서 신구약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왜 그런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의도하신 대로 발설하시고 역사하시어 기록자들로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8:34-40까지 이어진다.
① 내시가 빌립에게 『당신께 부탁하노니 선지자의 이 말은 누구에 관한 것이뇨? 자신이뇨, 아니면 다른 사람이뇨?』(34절)
② 『빌립이 입을 열어 이 성경에서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를 전하니라』(35절).
③ 36-39절까지는 빌립이 내시에게 침례를 주는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 세례를 주는 자들은 성경을 아는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다. 여길 보라. 내시가 말하기를 『보라, 여기 물이 있도다. 내가 침례를 받는 데 무슨 거침이 있느뇨?"라고 하니』(36절).
- 『빌립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합당하니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라고 하더라』(8:37). 이 부분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받는 가장 중요한 구절인데 <개역성경>은 삭제시켰다.
- 『그가 마차를 세우라고 명한 다음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로 내려가서 빌립이 그에게 침례를 주니라. 그들이 물 속에서 올라오자...』 세례라면 굳이 『여기 물이 있도다』, 『둘 다 물로 내려가서』, 『그들이 물 속에서 올라오자』라는 표현이 있었겠는가?
성경을 고의로 삭제시키고, 변개시켜 인간의 전통(카톨릭 전통)을 만들어 놓고 그 전통으로 교리를 삼으려는 자들의 저의가 무엇인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3. 『빌립이 입을 열어 이 성경에서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를 전하니라』(35절). 여기에 나오는 성경이라는 단어는 "bible"이 아니라 "Scripture"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이 "성경"은 구약의 다니엘 10:21에 한 번 나오는 반면 신약에서는 51회나 나온다. 미국의 유수한 신학교들을 포함하여 교회 강단들까지도 성경의 정의를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최초의 원본이라고 알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나 이것은 대단한 착오요 무지이다. 성경에서(Bible) 성경(Scripture)이라는 말은 한 번도 최초의 원본을 말한 적이 없이 언제나 사본(Copies)이나 번역본(Translations)을 말한다. 최초의 원본을 말하는 사람들 중에 최초의 원본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최초의 원본은 나온 지 200년도 채 안되어 낡아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욥기는 B.C. 18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모세오경은 B.C. 15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 사람이 누가 있는가? 바티칸 사본은 1481년에야 발견되었고, 시내 사본도 1844년에야 발견되었다. (<한글킹제임스성경> 서문 참조) 이 두 사본은 원본에서 복사한 것이 아니라 카톨릭 사본이다. 신약 원본만 해도 원본은 마모되고 없고 사본에서 사본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셨던 이사야서(눅 4:16-22)는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었다. 예수님 자신도 원본을 보신 적이 없으셨다. 베뢰아 사람들이 공부했던 성경(행 17:11),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었던 이사야(행 8:32),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던 성경은 최초의 원본이 아니었다. 디모데가 읽었던 성경(딤후 3:15)은 최초의 원본이 아니었다. 만일 지금 그 원본이 있어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자들 앞에 제시한다 해도 그것이 원본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지상에 한 명도 없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필라델피아 시대에 제시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속이는 형태가 있어 왔는데 그것이 마귀가 일으킨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사람을 신뢰했던 자들은 모두 실족하여 헛소리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이 미국의 밥존스(Bob Jones)대학이다. 그들이 근본주의 운운하지만 그들은 말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다.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너를 세웠으니 이는 내가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이고 또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 9:17).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실 것을 미리 보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느니라.』(갈 3:8)는 성경을 의인화했다.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다.
독일어 <루터성경>은 독일인들에게, 영어 <킹제임스성경>은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한글킹제임스성경>은 한국 사람들에게,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레이나발레나성경>, 이태리인들에게 <디오다티>, 스웨덴은 <웁살라성경>이 그들의 최종권위이다. 우리에게 히브리어나 헬라어 성경이 최종권위가 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외국어를 우리말만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어도 마찬가지이다. 디모데후서 3:16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말씀인데 바로 이 모든 언어의 성경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최초의 원본 타령은 이런 점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의 잠꼬대 같은 소리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과 <개역성경> 구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어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성경인지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곧 성경을 믿는다는 말인데 변개되고 삭제된 성경을 선호하는 자들은 마치 얼굴과 몸이 일그러진 하나님을 선포하는 자들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어떤 조명을 주시어 깨닫게 하실 것 같은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이 쓰는 성경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종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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