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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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종교 간 대화를 위해 모인 성경 문외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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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6월호>

지난 4월 27일에는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와 한국교수불자연합회의 공동 주최, 한국교수불자연합회 주관으로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관 국제회의실에서 학술회의가 열렸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는 1967년에 창립되어 현재 300여 명의 회원이 있고, 한국교수불자연합회는 1987년에 발족되어 현재 1,500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단체다. 그들은 앞으로도 다양한 주제의 공동 학술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해, 불교와 기독교 학자들 간의 연대를 도모하고 종교 간 평화와 화해운동을 발전시켜 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작년 5월에 처음으로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붓다와 예수”라는 주제로 공동 학술회의를 열어, 불교와 기독교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계기를 가졌다. 지난 4월 27일에 열린 학술회의는 그 두 번째 행사였다. 이번에는 “오늘 우리에게 구원과 해탈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독교의 구원과 불교의 해탈의 공통점을 찾아 상대 종교의 진리(?)를 이해하고 종교 간 화해와 소통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 학술회의에서는 양쪽 단체의 회원 교수들이 기독교의 구원관과 불교의 해탈관을 각각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 행사에 참석한 자들은 기독교와 불교를 한데 모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렸다.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부분은 거기에서 기독교 측에서 나온 사람들이 주장한 내용들이다. 불교 학자들과 무언가 함께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보기 위해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타력(他力)에 의한 구원, 불교는 자력(自力)에 의한 해탈’이라고 간주되고 있지만 그러한 도식은 올바르지 않다. 불교 역시 인간이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이미 주어져 있던 진리가 스스로를 일으켜 인간의 포착 범주 안에 들어온다는 점에서 타력(他力)적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타력(他力)적인 면이 강조되지만 자력의 요소가 없지 않고, 불교 또한 자력(自力)이 중요하지만 타력의 요소가 없지 않다”(이찬수 교수, 종교문화연구원, 성공회대).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하노라』(롬 3:28).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롬 4:5).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이러한 말씀들은 성경적 기독교의 구원론이 이 세상의 온갖 종교들과 기독교의 이름을 딴 온갖 사이비 종파들과 차이 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번 학술회의에 참석한 그 교수는 기독교와 세상 종교를 합치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면서 핵심은 완전히 놓쳐 버렸다. 그는 불교에도 “타력(他力)적인 요소”가 있으니 불교의 해탈이 기독교의 구원과 유사하다고 억지를 썼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론의 핵심은 하나님의 구원이 “타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타력적인 선물”이라는 데 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그것을 “값없는 선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롬 3:24).
『그 범죄와는 다르지만 그 값없는 선물도 그러하도다. 만일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풍성하였느니라. 또 그것이 범죄한 한 사람으로 인한 것과는 다르지만 그 선물도 그러하도다. 이는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지만 값없는 선물은 많은 범죄로 인해 의롭다 하심에 이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값없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느니라』(롬 5:15,16,18).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또 내게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노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의 샘을 값없이 주리라』(계 21:6).
『또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하더라. 듣는 자도 “오라.” 말하게 하고, 또 목마른 자도 오게 하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게 할지어다』(계 22:17).
“타력적인 요소가 있는” 정도를 가지고서는 기독교의 구원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가 없다. 모든 종교에는 당연히 “신”이나 “절대자,” “교주” 내지 가르침을 준 “창시자”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구원’에는 “타력적인 요소”가 전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을 가지고 “온전히 타력적인 선물로서의 구원”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구원론과 유사하다고 갖다 붙이려는 시도는 핵심을 간파하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행동이다. 교수라고 불리면서 존경받는 사람이 이런 것을 연구 결과라고 내놓은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구원과 해탈에 중요한 것은 (기독교와 불교를 구분하는 것보다) 너를, 인류를 ‘우리’로 볼 줄 아는 자세로 전환하는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는 요즘, 구원도 근원적 관계성에 대한 통찰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라는 존재는 이미 ‘너’와의 관계성 속에 있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분석하면 수직적으로는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를 지나 인류의 첫 조상에 이르게 되며, 수평적으로는 아침에 먹은 밥, 이를 가능하게 한 비와 태양 등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즉, ‘너’ 없이 순수한 개체로서의 ‘나’는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의 구원도 이런 근원적 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조작하며 내세우는 과정에서 왜곡된 자아를 바로잡는 것에서 비롯된다. 상호 소통하고 있는 인간의 근원적 측면을 구체화시킬 때 구원은 완성되어 갈 수 있다. 소외된 남을 남으로만 보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 보는 가운데 의식적으로 남에게 맞추는 것이야말로 내적 개인 구원의 징표이자 사회 구원의 시작이며,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데서 구원은 최고의 구체성을 띤다”(이찬수 교수, 종교문화연구원, 성공회대).
기독교의 구원이 ‘너’ 없이 순수한 개체로서의 ‘나’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을 바로잡는(?) 것에서 비롯되는가? 기독교의 구원은 각각의 순수한 개체로서의 ‘자아(혼)’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그 각각의 순수한 개체로서의 ‘자아’들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기독교의 구원론에는 ‘나’와 ‘너’가 일체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따위의 가르침이 없다. 기독교의 구원에서 깨달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 ‘나’가 죄인이라는 사실,”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죄값을 다 치르셨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 등에 대한 깨달음일 뿐이다. 아무리 자기 생각 속에 ‘나’와 ‘너’가 모두 다 일체라고 상상하며 평생을 살았을지라도 ‘나’와 ‘너’의 미래가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일체 같아 보였던 ‘너’와 영원히 결별하게 될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자신처럼 생각하고 그들을 돌아보는 것이 선량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구원의 완성”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것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성경에서는 구원의 시작부터 구원의 완성까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의 행위와 노력이 개입되지 않는다. 인간의 행위와 노력은 구원의 문제와는 별도의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빌 1:6).
『그러므로 이제 그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더욱더 우리가 그를 통하여 진노로부터 구원받게 되리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화해하게 된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리라』(롬 5:9,10).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하여 예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이런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29-32)
“예수 운동과 하나님 나라 선포는 사회적 통합, 즉 사회적 구원을 선포한 것이다. 당시 사회적 조건에서 사회집단에 통합될 수 없었던 소외 계층에게 복음을 우선적으로 선포했다. 구원의 결과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이며, 해탈의 결과는 깨달음을 사회 속에 실천하는 보살의 길이다. 예수가 소외받고 고난 받는 갈릴리 민중들에게 일차적으로 구원의 손길을 뻗쳤고 붓다가 해탈과 열반에 이르기 위해 팔정도[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8가지 길]를 가르치며 육바라밀[열반에 이르기 위한 보살의 6가지 수행]의 요체인 보시[베푸는 것]와 자비를 강조한 것처럼, 그리스도인과 불자들은 아가페와 자비의 정신으로 동시대 소외받는 자들과의 연대성을 각성해야 한다”(이명권 박사, 코리아 아쉬람)([ ] 안은 필자의 설명).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을 때 그것은 사회적 통합을 외치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한 의와 평화의 왕국”인 메시야 왕국이 이 땅에 펼쳐질 것에 대한 선포였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사회 통합을 외치시지 않았다. 그분의 길을 예비했던 선두주자(침례인 요한) 역시 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전혀 사회 통합을 외치지 않았다. 침례인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둘 다 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쳤는데(마 3:2; 4:17, 막 1:15), 그것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도끼로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지며, 쭉정이가 알곡으로부터 분리되어 꺼지지 않는 불로 태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마 3:8-12; 5:22,29,30, 눅 3:8,9,16,17). 메시야 왕국은 완전한 의의 왕국으로서 악인들은 들어갈 수 없는 왕국이다. 악인들은 그 “사회”에서 “통합”을 이룰 수 없고 오히려 그 “사회”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처단되고 격리될 것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당시 세리와 창녀와 같은 “소외 계층”에게 복음을 우선적으로 선포하신 것은 그들을 “사회”에 “통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소외되지 않은” 종교지도자 계층과는 달리 죄를 인정하고 죄를 회개했기 때문이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교수들은 기독교와 불교의 종교 간 대화를 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주장들을 너무 많이 늘어놓았다. 사실이 아닌 것, 곧 기독교의 구원과 불교의 해탈이 같다는 개념을 주장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문외한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이것저것 갖다 붙인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불교의 해탈과 다르다. 비교할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다. 유사성을 따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양측 간에 공통점도 별로 발견하지 못했지만, 설령 살아 있는 사람과 마네킹의 유사성을 찾아내어 길게 열거했다 해도 마네킹이 살아 있는 사람과 같을 수는 없다.
이번 학술회의를 두고 한 언론인(중앙일보 백성호 기자)은 다음과 같은 어리석은 말을 늘어놓았다.
“정상에 진리가 있다는... 두 산은 같은 산일까. A국의 변방에 산이 있습니다. A국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부릅니다. 국경을 맞댄 B국의 변방에도 산이 있습니다. B국 사람들은 ‘어떤 산 보다도 높은 산’이라고 부르죠. 정상은 늘 구름에 가려져 있어 보이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궁금해 할 따름이죠. ‘정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꼭대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거기서 보는 풍경은 대체 어떤 걸까.’
전설도 있습니다. A국에는 ‘산의 정상에 진리가 있다’는 말이 전해져 오죠. B국도 마찬가지죠. ‘정상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예언이 옛날부터 내려오고 있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그 산을 올랐습니다. A국에선 남쪽 루트로만 오르고, B국에선 북쪽 루트로만 오르죠. 남쪽 길에는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죠. 반면 북쪽 길에는 구비마다 유채꽃이 만발합니다. A국과 B국 사람들은 늘 다투죠. ‘복사꽃을 통해야만 진리에 들 수 있다,’ ‘아니다. 유채꽃을 밟지 않고선 정상에 갈 수가 없다.’ 아무도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이는 없습니다. 길이 너무 험하기 때문이죠.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급기야 ‘산의 정상은 죽어야만 갈 수 있다’고 말할 정도가 됐죠.
그렇다고 정상에 올랐던 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A국에선 2,500년 전에 ‘석가모니’란 사람이 정상을 밟았다고 하네요. 또 B국에선 2,000년 전에 ‘예수’라는 이가 정상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바로 ‘불경’과 ‘성경’이죠. 그런데 ‘성경’과 ‘불경’에서 말하는 남쪽과 북쪽의 등산로, 주위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 산은 이 산이고, 저 산은 저 산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 언론인은 나름대로 비유를 만들어서 두 종교를 대등하게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놓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그가 2,000년 전에 B국에서 정상에 있었다고 묘사했던 그 예수님 자신이 그 정상에 오르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증언하셨다는 점이다(요 14:6). 그 길은 하늘 아래 하나뿐이다(행 4:12).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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