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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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최고 설교자’의 기준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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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5월호>

국내에서 설교를 가장 잘하는 설교자로 지구촌교회의 이동원 목사가 선정되었다. ‘월간 목회와 신앙’이 한국설교학회와 공동으로 국내 담임목사 5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 교회 설교 사역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6.1%가 이동원 목사를 한국 설교가들 중 설교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꼽았고, 곽선희 목사(21.6%), 조용기 목사(20.3%), 하용조 목사(18.0%), 옥한흠 목사(16.5%), 김삼환 목사(13.7%)가 뒤를 이었다. 가장 본받고 싶은 설교자에도 이동원 목사가 23.9%로 1위를 차지했으며, 이어 옥한흠 목사(19.8%), 조용기 목사(14.3%), 하용조 목사(14.0%) 순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설교자와 그의 설교>의 저자 알프레드 깁스(Alfred P. Gibbs)는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설교란 설득을 목적으로 성경에 있는 진리를 섬세하게 다루어 회중의 마음에 호소하는 구두연설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설교자로 부름받은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설득을 목적으로 성경에 있는 진리를 섬세하게 다루어 회중의 마음에 호소하는 구두연설’이 바로 설교라는 뜻이다. ‘월간 목회와 신앙’은 설교에 대한 이러한 기준을 근거로 국내 설교자들의 순위를 매겨 발표한 것인가? 만일 그랬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앞선 설문조사의 신뢰도는 0%이다.
현존 최고 설교자 선정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 1위의 이동원 목사를 비롯한 모든 설교자가 설교할 성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3만 3천 군데 이상을 변개하고 13구절이나 삭제한 변개된 <한글개역성경>을 쓰고 있으며, 대한성서공회가 개역판을 7만 군데나 손보아 내놓았다는 <개역개정판> 역시 개역판과 다를 바 없는 변개된 저급 성경이다. 그들이 곧잘 인용하는 NIV 또한 뉴에이지 사상을 담아 놓은 변개된 성경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시어 변개와 삭제가 가해지지 않은 <한글킹제임스성경>이 주님의 섭리 가운데 번역되어 나왔음에도 그것을 설교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변개된 성경을 펼치고 설교하려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경은 제쳐 두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신성모독을 가하는 변개된 성경들을 사용하는 그들에게 과연 “성경”(Holy Bible)이 있는 것인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책’은 없다. 성경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들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는 디모데후서 4:2의 명령을 결코 수행할 수 없다.
둘째, 설문에 참여한 목회자들은 설교자를 판단할 신학적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설문조사에 임했다. 이 나라 설교자들은 주님이 가르치셨고, 사도들이 인정했으며, 위대한 영적 부흥을 이룬 필라델피아 시대(A.D. 1500-1900) 부흥사들이 선포했던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이 나라 기독교는 처음부터 바른 성경도 없이 후천년, 무천년주의 무신론으로 점유당하여 자의적·풍유적 해석법을 바탕으로 한 ‘아 다르고 어 다른’ 성경 해석이 난무해왔다. 누가 성경에 위배되는 신학이론을 내놓으면 그것을 판단할 기준이 부재하기에 비성경적인 이단 교리라고 지적할 수 없었다. 교단신학교의 후천년·무천년 교단 교리로 세뇌된 이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을 판단할 영적 역량이 없었던 것이다. 또 자칭 교회라는 곳들은 거의가 친카톨릭적 교회관으로 무장하고 있어 성경에서 명하는 휴거될 준비는 하지 않고(살전 4:16,17), 오히려 지상에 천년왕국을 이뤄보고자 사회복음을 부르짖는 현실이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가 매스컴에 등장해 “교회가 주님께 받은 것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웃을 먼저 돌아보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카톨릭처럼 오류를 퍼뜨리면, 그것이 비성경적인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경의 진리를 전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 나라 목회자들은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로 올바른 성경 지식을 갖추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도 사회복음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바른 신학적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천년왕국을 가져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천년주의적 생각을 지니지 못한 이들은 성경과 반대로 가는 설교자들에 대해 아무것도 판단할 수가 없으며, 그들에게 인정받은 위의 설교자들은 인간적인 앙모에 힘입어 순위에 오르게 되었을 뿐이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들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고전 2:15,16).
셋째, 이 나라의 많은 설교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강단에서 오류를 퍼뜨리고 있다. 설교자란 기본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다. 만일 그가 강단에서 오류를 전한다면, 그 사람은 모든 오류의 근원인 마귀의 종이지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누구든지 정복을 당하면 그는 정복한 자의 종이 되는 것이라』(벧후 2:19). 일례로 이번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이동원 목사의 강해설교를 보도록 하자. 이목사의 강해설교집 <이렇게 기도하라>(나침반사) 하나만 보아도 심각한 강단 오류의 현실을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까? 첫째, 보편적인 의미에서 또는 일반 계시(General Revelation)의 차원에서 인류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사야 64장 8절에 “그러나 여호와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하였으며 말라기 2장 10절에는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pp.31-32, 이목사가 인용한 구절들은 변개된 <한글개역성경>임).
이목사가 하나님의 모든 인류의 아버지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제시한 이사야 64:8과 말라키 2:10은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다. 이사야 64:8의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앞선 63:18,19을 보면 알 수 있다. 『주의 거룩함의 백성이 그 땅을 차지하였으나 잠깐뿐이었고, 우리의 대적들이 주의 성소를 짓밟았나이다. 우리는 주의 것이니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다스리신 적이 없으며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나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의 거룩함의 백성”이요, 주님의 다스림을 받은 백성이며, 주의 이름으로 불린 백성이고, 주의 성소에서 경배를 드린 백성이다. 구약에서 이런 백성이 누구였던가? 그들은 이스라엘이며, “우리”는 바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목사가 제시한 이사야 64:8의 다음 구절에서는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9절)라고 말씀한다. “주의 백성”이 누구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다. 이목사의 주장처럼 “우리”는 ‘모든 인류’가 아니다. 다른 인용 구절인 말라키 2:10의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 모두가 한 아버지를 모시지 아니하였느냐?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를 거스르고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모독함으로써 패역되이 행하느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민족은 이스라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이방 민족과도 언약을 맺으신 적이 없다. 여기서 말씀하는 언약은 같은 장 5절의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다. 레위는 이스라엘에 속한 지파이며, 말라키 2:10의 “우리”는 바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목사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우리”를 ‘모든 인류’라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영적으로 곡해한 결과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가 거듭날 때 ‘영’이 거듭나고(요 3:6) ‘혼’이 구원받는다는(벧전 1:9) 진리를 모르고 ‘영혼’이 거듭난다며 이분법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p.39). 그의 강단의 오류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목사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설교자들의 공통된 문제이다.
또한 ‘현존 최고 설교자’라는 이동원 목사는 결혼하지 않는 카톨릭 사제들이 개신교 목사들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그들에게서 ‘관상기도’라는 것을 배워와 그것을 강단과 언론을 통해 퍼뜨려왔다. 관상기도는 “타락한 영들의 세계로의 문을 여는 비성경적인 기도의식”이다. 이것을 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의지를 상실하게 되고, 영적인 마비증세를 겪게 되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한다는 거짓 속임수에 걸려 넘어져 이교도들의 명상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뉴에이지 명상훈련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로마카톨릭에 의해 그것과 타협한 기독교 내로 유입된 것이며, 이것을 실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주파수를 맞추라’는 이교 경전들의 신비주의 의식을 답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출 필요가 없다. 주님은 우리가 주파수를 맞춰 찾아야 할 만큼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성경의 진리를 가르친다는 설교자가 마귀를 따르는 이교도들의 종교적 실행을 가르치는 일은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일보>에 따르면, 이목사는 관상기도가 ‘가톨릭적인 전통에 따른 기도 형태지만 종교개혁 이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분이 무의미했기 때문에 관상기도를 굳이 가톨릭의 기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교도’ 카톨릭의 속임수에서 깨어난 종교개혁의 의미도 모르고, 카톨릭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 무지를 드러내는 주장일 뿐이다. 이목사는 <국민일보>(2006년 9월 5일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발버둥치지 않아요. 목회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관상기도를 하면서 목회에 여유가 생겼지요. 아내에게 고백합니다. 나는 지금 은퇴해도 행복하다고요. 관상기도하면서 살면 되지 뭐. 하나님 만나고 살면 되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느냐고요. 제 유일한 욕심은 이런 기쁨을 후배들과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이것이 영적 무능력 상태를 초래하는 관상기도의 결과이며, 이목사는 스스로를 공개 검증한 것이다. 『일에는 게으르지 말고 영 안에서 열심을 내며 주를 섬기라』(롬 12:1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전 15:58).
비단 1위의 이동원 목사의 경우뿐만 아니라, 이미 한국의 강단은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 은사주의에 오염되어 있어 샤머니즘과 기복주의가 수많은 교인들의 마음을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죄인들은 진리를 알고 영생을 얻기 위해 설교를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설교자에게 찾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러한 일을 조장하는 것을 강단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강단에서 오류를 퍼뜨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주님이 세우신 설교자가 아니다. 『욕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분리된 사람은 모든 지혜를 찾아 혼잡케 하느니라』(잠 18:1).
넷째, 이 나라에는 거듭나지 않은 설교자들이 많다. 오늘날 설교자들 가운데에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능력으로 거듭나지 못한 설교자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 노기를 띠며 반발할 설교자들이 있을 것이나, 그들은 자신의 양심에 손을 얹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칼빈의 예정론을 믿고 가르치는 설교자인가? 나는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고 가르치는 알미니안주의 설교자인가? 나는 세례(또는 침례)와 성찬을 죄사함의 수단으로 가르치는 설교자인가? 나는 방언을 해야 구원받은 증거라고 가르치는 설교자인가?’ 이 나라의 설교자들 가운데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고 그분을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어떤 사람은 하늘 나라에 보내기로, 다른 사람은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했다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저주이며,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받은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 역시 칼빈주의 예정론과 마찬가지로 이단 교리이다. 그들이 세례라고 일컫는 침례는 하나님께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간증으로써 보여드리는 ‘선한 양심의 응답’이며(벧전 3:21), 성찬이라 부르는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의식일 뿐이다(고전 11:24-26).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표적이며(고전 1:22; 14:22), 사도의 표적들 가운데 하나인 그것은 사도들의 사역이 끝나면서 함께 사라졌다(고전 13:8-10, 고후 12:12). 그것은 오늘날의 방언처럼 결코 뜻없는 혼미한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외국어로서의 언어였다(행 2:4,6,8). 그러니 소중한 복음의 진리는 전하지 않고 비성경적인 이상한 교리들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그렇듯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으로는 그 설교자는 물론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은 설교자는 주님이 세우신 설교자가 아님이 분명하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알 수 없는 자연인(고전 2:14)에게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설교를 맡기셨겠는가? 그래서 거듭나지 않은 설교자들에게는 설교가 하나의 직업이며 삶의 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신학교들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안수를 받아 소위 사역이라는 것에 들어갔어도, 결코 거듭난 적이 없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자인 토마스 찰머스는 거듭나지도 않은 채 10년 동안이나 설교자로서 설교했다고 고백했다. 하슬람이라는 설교자는 구원받지 않은 채 설교를 하다가 자신의 설교로 구원을 받았다.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머레이 맥체인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슬픈 일은 죽은 설교자가 죽은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없는 무자격자들이 설교한다고 나섰을 때, 성경은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
결론을 내리자면, 유명한 설교자는 많아도 훌륭한 설교자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유명세는 매스미디어가 만드는 거품이다. 설교자 역시 진리와는 상관없이 매스미디어가 몇 번 휘저어 주면 금세 유명하게 된다. 매스미디어는 인물을 만드는 거품제조기인 셈이다. 어떤 목사는 무슨 일만 있으면 그의 사진이 신문지상에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이는 사람들의 의식 한가운데에 그의 잔상이 박히게 하여 그 설교자가 그 사람 안에서 영향력을 갖도록 만들고, 그의 말이 비성경적일지라도 먹혀들게 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룻밤 사이에 매우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오염시키는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혹자의 말대로 뉴스는 언론사들이 만드는 것이지만, 인물 역시 언론사들이 만드는 것이다. 월간 목회와 신앙의 설문조사 역시 이번에 그런 일을 했다. 설문조사를 통해 베스트 설교자의 반열에 든 목사들은 이로써 한 번 더 띠워지게 되었지만, 그들에게서 성경적인 설교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기에 설교자로서의 가치를 조금도 인정받을 수가 없다. 현존하는 최고의 설교자는 누구인가? 그 사람은 바른 말씀에 계시된 참 진리를 섬세하게 다루어 진리를 갈구하는 회중의 마음에 강력하게 호소하여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성령의 사람이다. 그들은 과연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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