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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에게 속은 원문비평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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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1월호>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민족들을 연약하게 하였던 네가 어찌 땅으로 끊어져 내렸느냐!』(사 14:12)

영어의 “bread”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빵”이다. 그러면 “빵”은 원래부터 우리말이었는가? 빵은 포르투갈어에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말이다. 우리말로 완전히 정착되었기 때문에 “귀화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귀화어의 예로는 가방, 고구마, 구두, 냄비, 메주, 호미 등이 있다. 이런 말들은 원래 우리말이 아니었으나, 오랜 기간 우리말 안에 들어와 우리말처럼 사용되다가 결국 완전히 우리말이 된 것이다. 그 외에 “귀화어”처럼 완전히 정착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말로 쓰이는 말에는 컴퓨터, 엔진, 프라이팬 등이 있다. 이런 말은 “외래어”라고 한다. 대체할 다른 말이 없어서 그냥 원어의 발음과 유사하게 빌려 쓰다가 우리말로 정착된 것이다.
자기 나라말에 없던 말이 외국으로부터 들어올 때, 그 말을 수용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어 단어 “computer”를 “컴퓨터”로 받아들인 것처럼 발음 그대로 또는 발음과 유사하게 사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영어 단어 “airplane”을 “비행기”라고 하거나 “spaceship”을 “우주선”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 “뜻”을 살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쓰는 방법이다. 유럽에서는 라틴어와 헬라어의 단어들이 그런 식으로 각 유럽 언어들 안에 흡수되었고, 아시아에서는 산스크리트어와 한자어의 단어들이 그런 식으로 각 아시아 언어들 안에 흡수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어들이 처음 사용될 때, 그것을 그 나라의 말로 인정하는 것은 누가 하는 일인가? “사전 편찬자”(lexicographer)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그 일을 한다. 그들이 사회의 각 영역에서 사용하는 외국어나 신조어, 차용어 등을 조사하고 선별하여 단어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전에 실어 주면 일단 그 나라의 말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없었던 과거에는 각 영역의 전문가들이나 권위자들이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서 사용할 때, 그것이 그대로 인정되어 그 나라의 단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 사회에서 사용되던 단어 중에서 어떤 단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뜻이 변하기도 하는데, 원래 “어리석다”라는 뜻이었던 “어리다”가 “나이가 적다”는 뜻으로 바뀐 것이 그 예이다. 또 어떤 단어는 사회의 변화, 종교의 영향 등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거나 축소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발음이 바뀌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그런 영향을 많이 끼쳤다. 한 예로 “중생”(衆生)이라는 단어가 원래는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는데, 불교에서 이 단어를 “모든 생물”이라는 뜻으로 사용함으로써 현재는 “많은 사람”과 “모든 생물”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또한 “중생”이 변형된 단어인 “짐승”은 그 뜻도 “동물”이라는 의미로 변했다. 다른 예로 “부처”라는 말은 원래 “깨달은 자”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붓다”에서 왔는데, 후대에 와서는 “깨달은 자”의 의미로도 쓰이지만 주로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를 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런 것을 문법 용어로 “보통명사의 고유명사화”라고 한다. 즉 “깨달은 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로서의 단어가 “석가모니”라는 특정한 사람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변한 것이다.

앞에서 단어의 생성과 사용에 관련된 몇 가지 원리를 거론했는데, 이런 내용은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언어의 역사성과 사회성 등을 가르칠 때 알려 주는 기초 원리이다. 그런데 이런 기초 원리도 모르면서 함부로 성경에 있는 단어들을 거론하며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무식한 자들이 있다. 물론 이러한 일이 최근에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인류에게 성경이 주어진 이래로 “사탄의 자녀들”은 항상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데 열심을 냈기 때문이다.
“사탄의 자녀들”이 공격하는 성경의 단어 중에서 가장 많이 도전을 받은 단어는 “루시퍼,” “리비야단,” “비히못”이다. 이 세 단어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두 “사탄”과 관련된 이름들이다. 사탄의 실체를 가리려는 사탄의 의도를 사탄의 자녀들이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루시퍼”에 대한 공격은 매우 강력한데, 모든 변개된 성서들에서 이 “루시퍼”를 “계명성,” “샛별,” “새벽별” 등으로 번역함으로써 아예 성경에서 “루시퍼”라는 단어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사탄”은 왜 유독 “루시퍼”라는 자기 이름이 가려지기를 바라는 것일까? 루시퍼라는 단어는 “빛나는 자, 빛을 나르는 자”라는 뜻으로서, 『빛의 천사로 가장』(고후 11:14)하여 활동하는 사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사탄은 이 단어가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에서 제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말은 “빛나는 자,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헬렐”을 번역한 단어이다. A.D. 120-150년에 라틴어로 온전히 보존된 성경인 <구라틴역본>에서는 그 의미를 올바르게 살려 “루키페르”(Lucifer)로 번역했고(이것을 영어로 발음한 것이 “루시퍼”임), A.D. 400년경에는 제롬의 변개된 성경인 <라틴벌게이트>조차도 이 번역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 이름은 중세 암흑시대가 끝날 때까지 천 년이 넘도록 전 유럽에서 사용되어 “빛을 나르는 자”라는 의미와 함께 “사탄”을 지칭하는 단어로 분명히 알려져 있었고, 유럽 모든 국가의 “귀화어”로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단어가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에 의해서도 그대로 “헬렐”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즉 굳이 히브리어 “헬렐”을 “빛을 비추는 자”라고 따로 번역할 필요 없이 그 의미를 지니는 귀화어 “루시퍼”를 그대로 사용하면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부처”란 단어가 “깨달은 자”라는 의미와 함께 “석가모니”를 칭하는 말로 정착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정택주 같은 어리석은 학자들은 언어의 생성과 사용 원리도 잘 모르면서 히브리어 “헬렐”을 “루시퍼”라는 올바른 단어로 번역한 <킹제임스성경>을 공격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신 후에 “보존”에 있어서는 손을 떼셨다고 버젓이 거짓말하면서, 학자들이 필사본들을 대조해서 원본을 추론해 준다고 말하며 변개된 개역성경을 두둔하고 있다. 어리석은 학자들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나님을 바보로 만드는 가증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정하신 신실한 필사자들을 통해 말씀을 섭리적으로 보존하신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그토록 믿기 어려운 일인가? 왜 성경 보존을 믿는 사람들이 가진 상식적인 믿음을 그는 가지지 못하는가? 정택주 자신이 하나님보다 학자들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학자들의 말만 맹신하고 구원조차 받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도 정택주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사탄의 이름을 “루시퍼”라고 말하면, 사탄은 “나는 루시퍼가 아닌데.”라고 말할 거라며 “루시퍼”라는 이름을 비웃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정택주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나는 ‘하나님’이 아닌데. 나는 ‘엘로힘’인데.”라고 하시며 그를 비웃으실 것이다. 번역된 이름도 바로 그 정확한 의미를 지니면 원어와 똑같은 위상을 갖는다. 상식 아닌가? “지옥”을 “스올”이라고 음역해서 지옥을 가려 버린 성경 변개자들이 “루시퍼”를 “헬렐”이라고 음역해서 『빛의 천사로 가장』(고후 11:14)하는 사탄의 실체도 가리고 싶어 했을지 모르지만, “헬렐”은 “빛을 나르는 자”라는 뜻과 더불어 사탄의 이름인 “루시퍼”라는 단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올바른 번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택주 등이 감싸는 개역성경은 어떤 성경인가? 개역성경은 마치 빵을 사 오라고 했는데, 떡을 사 온 심부름꾼과 같다. 개역성경은 왜 빵을 떡이라고 번역했는가? 개역개정판은 왜 떡을 빵이라고 개정하지 않았는가? 혹시 빵은 우리말이 아니기에 떡으로 번역해야 올바르다고 생각한 것인가? 개역성경의 “떡 타령”은 “무교병”이라는 단어에서 절정을 이룬다. 출애굽기 12:8에는 『또 그들은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을지니 불에 구워서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함께 먹을지니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무교절에 관해 말씀하시며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빵을 떡으로 번역해야 하는 개역성경의 번역자들은 『누룩 없는 빵』을 “누룩 없는 떡”으로 번역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원래 떡에는 누룩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누룩 없는 떡”이라는 뜻의 한자어 “무교병”(無酵餠)을 창안했다. 한자어로 슬쩍 번역의 허접함을 좀 가려 보려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 6:41)이시기에 “빵집”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그런데 개역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서 내려온 떡”으로 되어 있다. 개역성경의 번역대로라면 베들레헴의 뜻도 “떡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허접스러운 옷은 아무리 수선해도 온전한 옷이 될 수 없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아예 누더기처럼 된다. 빵과 떡도 구별 못 하는 허접스러운 개역성경을 수선한 결과 개역개정판처럼 누더기가 된 것을 눈으로 목도하지 않았는가? 혹시 그들은 “주의 만찬”을 할 때도 떡을 먹는가? 그들이 믿는다는 그 성경에 떡이라고 되어 있으니 떡을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혹시 빵을 먹는다면 무슨 근거로 빵을 먹는 것인가? 그들의 성경에는 빵이 없지 않은가!

한번은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 가운데 하나인 리처드 킬비(Richard Kilby, 1560-1620) 박사가 영국 잉글랜드 중부에 있는 더비셔(Derbyshire)를 여행한 적이 있다. 더비셔에서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러 그 교구의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 교구를 담당한 설교자는 젊은 설교자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설교하는 그 구절들의 어떤 단어들이 그 단어들로 번역되면 안 되는 세 가지 이유를 들면서 설교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그 젊은 설교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그 성경의 번역자 중 한 명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저녁 예배가 끝난 후 킬비 박사는 그 젊은 설교자를 숙소에 초대하여 “성경 번역에 대한 불필요한 반론”으로 설교 시간을 사용하기보다는 “청중들에게 필요한 좀 더 유용한 교리”를 설교하면 좋았겠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젊은 설교자가 설교했던 그 세 가지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을 번역할 당시에 다른 번역자들과 함께 충분히 고려했으며, 그 부분을 그렇게 번역해야 할 “열세 가지 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결국 그 젊은 설교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킬비 박사의 조언을 따랐다고 한다.




얄팍한 원어 지식과 편협한 원문비평학적 관점으로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을 함부로 평가 절하하는 무식한 학자들이 있다. 잘못된 지식으로 진리를 가리는 그런 학자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말씀을 신실하게 보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맡겨 주신 온전한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실행하며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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