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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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없는 자들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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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2월호>

어떤 “제시어” 하나를 보고 그 단어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인지 적어 보는 검사를 “반응 검사”(Response Test)라고 한다. 밥 존스 시니어는 “어떤 것에 대해 상대방이 나타내는 반응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례로 “하나님은 당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성경은 당신에게 어떤 책인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변해 보라. 당신이 어떤 대답을 하든지 간에, 그 대답은 당신의 현재 영적 상태를 그대로 보여 주게 된다. 형편없는 답변이 나오면 당신의 영적 상태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상태이고, 주옥같은 답변이 나오면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독특한 백성』(벧전 2:9)으로서의 영적 상태가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가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어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찬양, 기도, 예배, 설교, 헌신 등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따라 현재 주님과 올바르고 풍성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인지 가늠할 수 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최고로 영예롭게 생각하고 기뻐하는지 아니면 귀찮고 지루한 일로 여기는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1960년대 뉴잉글랜드에 있는 어느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45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반응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제시된 단어는 “크리스마스”였다. 그런데 이 단어를 보면서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떠올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들의 “마음속 여관”에는 이 땅에 구주로 오신 예수님께서 들어가실 방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자기의 첫아들을 낳아 그를 포대기로 싸서 구유에 누이니, 이는 여관에 그들이 들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눅 2:7). 산타클로스, 루돌프 사슴, 눈사람, 북치는 소년, 크리스마스트리, 크리스마스 캐럴 등을 위한 방은 있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방”은 없었다. TV, 잡지, 드라마, 영화, 게임, 연예인, 스포츠, 인터넷 쇼핑, 세상 음악,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생의 자랑 따위를 위해서는 쉽게 방을 내주어도 왕이신 예수님을 모실 방은 마련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Occupied,” 여기서도 “사용 중” 저기서도 “사용 중,” 하나같이 “빈방 없음”이라는 팻말만 문밖에 내걸고, 문 앞에 서서 두드리시는(계 3:20) 예수 그리스도를 초림 당시의 여관 주인처럼 문전 박대하는 것이다.

여관 주인이 이제 곧 태어나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았다면, 곧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주 매정하게 여관에는 드실 방이 없다면서 초라한 마구간이나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세등록을 하고 장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으로 몰려든 손님들의 “기존 예약”을 취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께서 청결하고 안정된 장소에서 태어나실 수 있도록 “최고의 호텔급 스위트룸”을 마련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최우선으로 모셔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도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의 마음속에 마련된 방 안에서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신다. 더 나아가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보시고 그 방 안을 주님의 풍성함으로 가득 채우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10:10).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풍성함은 실로 헤아릴 수 없으며,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고, 모든 것이 좋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보물 창고가 있어서 언제든지 이 창고를 여시어 우리의 마음속 방 안에 가득 부어 주기를 원하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런데도 주님을 위해 빈방을 준비하지 않고 내어 드리지도 않는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무지한 자들이고, 안다 해도 그것을 고의로 저버리는 완고한 고집쟁이들이다.


당신은 가장 소중하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고 있는가? 주님과 교제하는 장소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가? 과연 주님과 교제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당신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와 교제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빈방이 있는가?”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호흡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듯이,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순간마다 계속해서 빛을 발산하는 것처럼 우리의 혼이 강건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살아 있는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반드시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신선하고 풍성한 은혜를 공급받아야 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때만 얻을 수 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간절히 기다림으로써 하루를 시작하고, 반드시 시간을 드려 하나님을 만나라!”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야말로 애정이 듬뿍 담긴 교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마땅히 최고로 좋은 것으로 준비된 방으로 주님을 모셔 들여서 그 “마음의 궁전”과 “애정의 보좌”에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해 주신 주님께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최대한으로 사랑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시다!
한편 빈방을 마련하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을 마련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그 의미가 “빵집”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요 6:35,48)이시다. 또한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었는데,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예표하는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베들레헴만큼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장막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유대인들은 매우 종교적이고 형식적이며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사람들이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그들의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으며 나를 향한 그들의 두려움도 사람들의 법규로 가르친 것이라』(사 29:13).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긴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전통으로 섬기려 했던 자들인 것이다. 그런 자들이 모여 있는 여관이라면 아무리 그곳에 빈방이 있다 해도, 예수님께서는 무지와 완고함과 자기 의로 가득 찬 종교인들로 붐비는 그런 더러운 돼지우리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차라리 그들로부터 분리된 마구간이 그런 자들이 머물렀던 방들보다 훨씬 깨끗하고 편안하게 여겨지셨을 것이다. 당신의 마음속 여관은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언제라도 편하게 자리 잡고 쉬실 수 있을 만큼 말씀의 물로 잘 씻겨 있는가? 그리스도의 영께서 슬퍼하시지 않고(엡 4:30) 안식하실 수 있을(벧전 4:14) 만큼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는가?


일본의 마쓰다 미쓰히로가 쓴 <청소력>은 “청소가 지니는 힘”에 관해 쓴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재능은 있는 것 같은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든지, 무슨 일을 해도 잘 안 된다든지, 심지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 우선 더러운 자신의 방부터 깨끗하게 정리 정돈하는 일을 시작해 보라.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한눈에 보일 것이다!” 주위에서 방을 더럽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공공장소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 사무실조차 지저분하게 쓰는 사람들도 있다. 그곳이 사무실인지 쓰레기장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이다. 자기가 물을 마시려고 사용한 종이컵도 안 버리거나, 자신이 앉았던 의자 하나 책상 안으로 밀어 넣지도 않고 그냥 나가 버리는 사람이 있다. 정리 정돈 하나만 잘 해도 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인다. “정리”는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것이고, “정돈”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다. 어떤 식당이 청결하고 음식 맛도 좋고 장사도 잘 되는 식당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화장실의 청결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다. 식당뿐만 아니라 어떤 기업이나 조직이든 화장실 청결 상태 하나로 모든 것이 다 드러나기도 한다.


당신의 마음속 방들은 어떠한가?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방들을 하나씩 하나씩 둘러보시자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신 있게 모든 방문, 심지어 책상이나 옷장 서랍까지 다 열어 보여 드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모든 방문을 걸어 잠그고 꼭꼭 숨기려고만 하겠는가? “사랑하는 OOO야, 이 방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왜 문을 잠가 둔 것이냐? 내가 한번 보면 안 되겠느냐?” “네, 주님, 보셔도 되지만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음, 정말 그렇구나. 그렇다면 저 방에는 무엇이 있느냐?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아, 주님 거기만은 안 됩니다. 제발...” 결코 이런 식의 반응이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방은 어떤 방인가? 그것은 인간적인 의로 소제되어 있거나 종교적으로 단장된 방이 아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 그런 방이 아니다. 쓴 뿌리가 깊이 박혀 있다든지 불신과 증오와 위선으로 가득 찬 방이 아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생의 자랑으로 꽉 차 있어 어두침침하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문밖으로 나가 버릴 만큼 딱딱하고 완고하게 굳어 버린 그런 방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이가 없고 얄팍하다든지, 세상 염려들과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일들에 대한 욕심이나 쾌락으로 질식하게 만드는 그런 밀폐된 방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은 성령으로 꽉 차 있는 방이다. 곳곳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장되어 있고 기도의 향내가 그윽한 방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말씀의 물로 소제된 청결한 방이어야 한다. 말씀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어서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하게 내는 방이어야 하며, 세상의 혼란과 소란함이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하게 주님과 담소하고 교제하며 즐길 수 있는 그런 방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 방에는 창문 두 개가 나 있는데, 바로 두 개의 “눈”이다. “눈”은 몸의 빛이다(눅 11:34). 눈이 순전하면 온몸도 빛으로 가득 차서 모든 마음속 방들이 환하게 빛나겠지만, 눈이 악하면 온몸도 어두움으로 가득 차서 마음속 방들은 암흑천지가 되고 만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을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고정해 놓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생기는 일들을 일일이 알고 계신다(겔 11:5). 따라서 주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시는 그 모든 못된 장난들을 당장 그만두고 불필요한 모든 쓰레기를 마음속 방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내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미국에 있는 한 교회에서 누가복음 2:1-20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을 소재로 연극을 한 적이 있었다. 이 교회에는 “월리”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마음이 무척 여리고 말을 더듬는 지적 장애 아이였다. 이 아이는 연극에 너무나 참여하고 싶었다. 그 간절한 마음을 알았던 주일학교 선생님은 이 아이에게 대사도 가장 적고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역할을 맡겼으니, 곧 “여관 주인” 역할이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빈방을 구하기 위해 여관을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딱 한마디의 대사만 하면 되는 역할이었다. “방 없어요!” 월리는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연극이 시작되었다. 요셉이 여관 문을 두드리자, 월리는 문을 열면서 “방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선생님은 잘 넘어갔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요셉은 물러가지 않고 “아기 때문에 그럽니다. 아기를 낳아야 하거든요.”라고 말했다. 이제 “방 없어요!”라고 한 번만 더 말하면 되었다. 그런데 월리는 요셉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만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방이 있습니다. 제 방으로 들어오세요. 그렇게 좋은 방은 아니지만 제 방이라도 내어 드릴 게요. 어떻게 예수님을 마구간 같은 데서 태어나시게 할 수 있겠어요. 비록 변변치는 않지만, 정말이지 예수님께서 제 방에서 태어나셨으면 좋겠어요!” 결국 월리가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오히려 감동받았고 교회 전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1초에 약 6명의 신생아가 태어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목적, 곧 죄인들을 위해 죽으려고 태어나신 “유일한 아기”이셨다. 그러나 세상 죄인들은 크리스마스는 기념하면서도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구주를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이를 거절한 자들은 자기들의 죄를 제거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셔 들일 방을 마련하지 않는다. 결국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그들을 위한 영원한 거처가 마련될 것이다. “벌레들”(막 9:44,46,48)이 영원히 득실거리는 거처 말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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